Contents
목차
1. 루비아
2. 악연
3. 가족 여행
4. 별빛해파리
5. 데스나이트
6. 부탁
7. 낯선 만남
8. 결투
9. 꿍꿍이
1. 루비아


“아…… 흐윽…….”
보름달이 높이 떠오른 밤.
모두가 잠자고 있을 시간에 아테나는 자신의 발목을 움켜잡은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양쪽 발목에는 천이 감겨 있었다. 원래 하얀색이었던 천이 지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테나가 감옥에 갇힌 날, 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클레어가 용병 몇 명을 데리고 감옥을 다시 찾아왔다.
-도주의 위험이 있으니 발목의 힘줄을 잘라 놓으세요.
클레아 파울러의 명령에 용병들은 당혹스러워했다. 아무리 사건의 용의자라고 하지만 아테나는 성혈이었다.
-클레아 님…… 이 감옥은 마력을 흡수하는 레어메탈로 만들어져서 쉽게 부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아테나 님께서는 지금 마력봉인구를 착용하고 계시니…….
-저 아이의 실력을 생각하면 방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용병들이 끝끝내 망설이자 클레어가 용병의 뺨을 후려쳤다.
짝.
날카로운 소리가 감옥을 가득 채웠다. 놀란 표정을 짓는 용병에게 클레아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명령을 들었으면 잠자코 따르기나 할 것이지 왜 이렇게 말이 많지?
-크, 클레아 님…… 그게 아니라…….
-지금 용병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누군지 들었을 텐데? 울리크를 불러서 매질이라도 해야 분위기 파악을 할 생각이야?
그 말에 아테나는 아버지의 대리인 자리를 누가 차지했는지 알 수 있었다.
클레아의 자식인 울리크 호퍼였다.
사실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울리크 호퍼는 마스터클래스이자 용병대 내에서도 독보적인 강자였으니 말이다.
-알아들었으면 빨리 시키는 대로 해!
클레아의 외침에 용병들은 하는 수 없이 아테나를 둘러쌌다. 하지만 클레아의 명령을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전 괜찮아요.
아테나는 울리크 호퍼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정직하고, 믿음직스럽지만 어머니의 명령을 절대로 어기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클레아가 진짜로 울리크 호퍼를 불러온다면 용병들은 꼼짝없이 매질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파프니르 용병대는 규율이 엄격하지 않은 편이었지만 대신 형벌이 혹독했다. 심하면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그러니 명령대로 하세요.
용병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칼을 뽑아서 아테나의 발목을 칼로 베어 냈다.
뒤꿈치의 인대는 무척 두꺼웠다. 그만큼 끊어졌을 때,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아테나는 몸을 잘게 떨 뿐,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독한 년 같으니.
클레아가 짜증을 내며 감옥을 나갔다. 용병들도 같이 사라졌다.
그제야 아테나는 신음을 토해 낼 수 있었다. 발목을 움켜잡은 채 힘겨운 티를 낼 수 있었다.
“……아파.”
그 뒤로 몇 시간이나 지났지만, 고통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아테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고통이 약해지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감옥의 철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아테나는 눈을 뜨고 방문자를 확인했다.
클레아 파울러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꼴좋구나.”
클레아가 아테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발목의 힘줄이 끊어진 탓에 아테나는 그녀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유치한 짓을 하시네요.”
그렇다고 태도까지 낮출 수는 없었다. 아테나는 평소와 똑같은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유치? 그런데 이를 어쩌니. 그 유치한 짓을 할 때마다 난 속이 다 후련한데.”
클레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테나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추악한 감정에 살짝 몸을 떨었다.
“……저한테 왜 이러는 거죠?”
아테나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무리 모든 파벌 사람들이 아테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유독 클레아 만큼은 그 정도가 심했다.
“좋은 질문이구나. 마침 나도 누구한테라도 털어놓고 싶었거든.”
클레아가 무릎을 굽혔다. 아테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넌 네 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아테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네 아버지, 칼은…… 호색한 중의 호색한이었어.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를 바꾸거나, 마음에 드는 여자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안거나…… 아주 끔찍한 인간이었지.”
아테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얼마나 문란한 인간인지 말이다.
“하지만 칼에게 안긴 여자들 중에서 불만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단다. 불만이 생길 수가 없지. 이 세상에서 칼처럼 잘생기고, 강하고, 지위도 높은 남자가 어디에 있겠니?”
용병왕 칼 호퍼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남자였다.
부와 명예, 그리고 개인의 실력, 심지어 잘생긴 외모까지.
“게다가 칼은 늙지도 않았어. 나는 기사가 아니라 잘 모르지만 너무 강해서 노화조차 이겨 냈다던가? 그러니까 다들 칼을 싫어할 리가 없지. 문제는 바로 그거였어.”
칼 호퍼는 늙지 않는다. 언제나 잘생기고, 멋진 남자였다.
하지만 여자들은 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늙어갔다. 피부는 탄력을 잃고, 눈가는 처졌다. 여자로의 외모가 날이 갈수록 시들었다.
“늙은 여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고 있니? 칼에게 철저하게 외면받는단다. 젊은 시절의 총애가 거짓말인 것처럼 단 한 번도 찾지 않아.”
클레아의 목소리가 살짝 격양되었다.
“그나마 아이를 낳은 여자는 다행이지. 아이조차 낳지 못한 여자는 용병대에서 쫓겨나. 청춘을 모두 칼에게 바쳤는데. 조금의 보답도 받지 못하고 말이야.”
용병왕의 아이를 낳은 여자들도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용병대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뿐, 칼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한때 죽도록 사랑했던 남자를 다른 젊은 여자들한테 뺏길 때 심정을…… 네가 감히 짐작이나 할까?”
클레아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테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거랑 제가 무슨 상관이죠?”
“아, 그래. 그 이야기를 해야지.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네 어미는 칼이 오랫동안 찾아다녔던 여자였던다.”
지난날 아버지에게 직접 들었다.
젊은 시절, 강적을 만나서 치명상을 입고 죽어 가는 아버지를 구해 낸 게 어머니라고 말이다. 어머니의 간호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그 뒤로 아버지는 계속 어머니를 찾았지만 큰 소득이 없었다고 말이다.
“결국 칼은 네 어미를 찾아냈지. 그때는 이미 다 늙고, 병들고…… 정말 별 볼 일없는 여자였단다. 그래서 나는 네 어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 칼이 그딴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까득.
클레아가 이를 갈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땠는지 아니? 칼은 네년의 어미만 찾았어. 네년의 어미가 죽기 직전까지 그 여자한테만 매달렸지. 어째서지? 나는 늙었다면서 단 한 번도 다시 안지 않았으면서. 외면했으면서. 왜 네 어미만! 그 여자만!”
클레어가 주먹으로 철창을 후려쳤다. 피부가 찢어지면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클레어는 오로지 아테나만 노려볼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널 죽이고 싶지만 다들 그것만은 막더구나.”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클레아가 한숨은 내쉬었다.
“내일 널 용병대에서 추방시킬 생각이다. 파프니르 용병대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마라.”
클레아가 몸을 돌렸다. 감옥을 나가기 전,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참, 데미안이라는 남자는 죽었단다.”
갑작스러운 말에 아테나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데미안이 왜 죽었다는 거예요!”
“나도 몰라. 저녁 식사를 주려고 간수가 들어갔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걸 발견했어.”
아테나는 두 팔을 질질 끌며 철창으로 다가갔다. 철창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믿기 싫으면 믿지 마렴. 하지만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니.”
그 말을 끝으로 클레아는 감옥 밖으로 나갔다.

* * *

“어떻게 내 거짓말을 알았지?”
데미안은 루비아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어차피 용병왕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했던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굳이 거짓말에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스승님께 연락이 왔어요. 그분께서 스승님의 계획을 듣고, 용병왕의 영혼을 얻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더군요. 그분께서 당신을 보냈다면 스승님께 따로 연락할 필요는 없었겠죠.”
데미안은 실소를 흘렸다. 하필 지금 슬라에게서 연락이 올 줄이야. 운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어요.”
루비아가 데미안을 노려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흑마법사들은 단 한 명도 ‘그분’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요.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위대한 분이신데다 행여나 제국에게 정체가 들킬 수 있으니까요.”
데미안이 도르고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차마 도르고 따위에게 경칭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분께서 가롯을 죽이라고 한 것도 어딘가 이상했어요. 우리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시는 그분께서 우리를 죽이라고 할 리가 없는데 말이죠.”
그 말에 데미안은 하마터면 폭소를 터트릴 뻔했다.
도르고가 흑마법사들을 아끼는 이유는 그저 멸망전쟁에 동원할 소중한 전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날 속인 것도 모자라서 카르닥까지 죽이다니…… 그 녀석이 얼마나 쓸모가 많았는지 알아요? 그 정도 실력을 가진 만독학파 흑마법사를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루비아는 ‘카르닥’이 죽어서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쓸 만한 ‘도구’가 사라져서 화를 내고 있었다.
전생에 봤던 루비아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남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사용하다 버리는 도구로 생각했다. 그녀의 스승인 슬라와 정반대의 태도였다.
“쉽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살아서 맛볼 수 있는 고통을 모두 겪게 한 다음에 영혼을 붙잡아서 평생 괴롭힐 거니까.”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군. 이미 두 놈이나 나한테 죽은 걸 잊은 거냐?”
데미안의 말에 루비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두 명과 날 비교하는 거예요? 이건 좀 자존심이 심하게 상하네요.”
대흑마법사는 비전 마법에 따라서 수준이 나뉘었다.
이제 막 대흑마법사가 된 존재보다는 오랫동안 비전 마법을 연구하고 다듬어온 대흑마법사가 당연히 압도적으로 강했다.
루비아는 대흑마법사일 뿐만 아니라 거악 슬러의 제자였다.
그녀가 연구하고 있는 비전 마법은 두 사람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하긴, 대가리가 텅 비어 있는 기사 따위가 뭘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해하기 쉽게 두 눈으로 직접 보여 드리죠.”
루비아의 몸에서 흑마력이 해방되었다. 농밀한 흑마력이 폭주했다.
뚜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