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첫 만남은 청혼부터 ３권
두 번째 첫 만남은 청혼부터 ３권
두 번째 첫 만남은 청혼부터
© 나강온
두 번째 첫 만남은 청혼부터 ３권
· 차례 ·
CHAPTER 4. 수석 입학생의 잘생긴 친구 (2)
CHAPTER 5. 동행자 (1)
CHAPTER 5. 동행자 (2)
두 번째 첫 만남은 청혼부터 ３권
CHAPTER 4. 수석 입학생의 잘생긴 친구 (2)
이 효율성 없는 평가는 어쩌다 시작되었나, 마른 아랫입술에 앞니 모양 자국이 남았다.
재학 중 딱 한 번 이뤄지는 ‘종합 평가’는 4학년 마지막 전공 평가를 대체하는 아주우 중요한 시험이었다.
명목은 협동심 향상.
다른 학부의 학생과 함께 과제를 수행하면서 서로서로 잘 알고 지내라는 아카데미 측의 배려……로 단테는 전에 없던 위기를 맞이했다.
‘이 좁은 교우관계에 왜 이렇게 전공의 다양성이 넘치는 거지?’
마법 학부인 루윈과 예언 학부인 지젤, 그리고 검술 학부인 단테.
이데리움의 세 학부가 골고루도 섞였다.
몇 주 전이라면 이게 무슨 행운이냐며 좋아라 했겠지만……. 이 중 한 놈과 냉전 상태를 넘어 절교한 거나 다름없다는 게 문제였다.
‘마음 같아선 나 혼자 하고 싶다.’
여타 평범한 조별 과제였다면 그러고도 남았다. 단테는 서너 명분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익숙했으며, 다른 사람과의 의견 조율보다 이쪽을 더 편하게 여기기도 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냐고.’
하지만 이번 종합 평가는 그런 꼼수가 불가능했다.
“이름 확인하겠습니다. 검술 학부 단테, 마법 학부 루윈, 예언 학부 지젤. 다 모였나요?”
“네.”
“입장하겠습니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증표를 찾아 완성해 오면 됩니다.”
이 빌어먹을 ‘증표’가 문제였다.
과제는 몇백 년 전 신물이었다는 ‘증표’의 조각을 모아 맞추는 것. 그 ‘증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영적인 감이 발달한, 훈련된 예언 학부밖에 없다.
그 길로 가는데 설치된 방해물을 제거하는 게 검술 학부의 몫, 비마력자는 접근하지 못하는 ‘증표’를 손에 넣어 조합하는 건 마법 학부의 몫이었다.
“제한 시간은 없지만 모든 조의 평균을 기준으로 점수가 차등 분배될 겁니다. 지하 5층 아래로 내려가지 마시고, 그곳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는 내지 마시고. 비상시엔 나눠준 반지를 빼시고요. 그럼, 이대로 쭉 내려가면 됩니다.”
그러니까, 개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손발이 잘 맞아야 한다는 뜻이다.
세 사람은 조교수가 안내해준 방향을 따라 조심스레 내려갔다. 평가 장소는 본관 지하, 학생 출입 금지 구역이자 과거 성의 감옥으로 쓰였던 곳이다.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스산한 바람이 웅웅거렸다. 옆에서 움찔거리는 기척이 여과 없이 느껴졌다. 단테는 한숨을 내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루윈은 공격 마법을 잘 못 쓰지. 방해물이 오면 전적으로 내가 처리해야 해.’
루윈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런 평가 방식에 적합한 인재는 아니었다. 단테는 냉정하게, 이미 겁을 집어먹은 소년을 훑었다.
아닌 척 허세를 부리려 했지만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숨길 수 없었다.
‘지젤만 잘 말해주면 어떻게든 빨리 끝낼 수 있을 텐데.’
5년 우정을 깔끔하게 말아먹은 건 슬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성적까지 말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단테는 평생 남는 성적표에 사감을 끌고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 그냥 관둘래.”
다른 쪽 생각은 영 다른 듯했지만.
평가 특성상 초반부에는 예언 학부의 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능력이 없다면 아무 감도 없는 사람 둘이서 넓고 넓은 본관 지하를 일일이 뒤져야 하니까.
“그만둔다고?”
“어. 짜증 나서 못 해먹겠어.”
그런데 지젤이 지금 그 짓을 너희들끼리 해보라고 선언한 것이다. 단테는 머리통이 뜨겁게 달아오르다 못해 팽팽 도는 걸 느꼈다.
“너 지금 포기하면 0점일걸.”
“그게 뭐.”
지젤은 지금, 단테 보란 듯이 삐딱선을 타고 있었다. 덕분에 같은 조인 루윈은 함께 엿을 먹게 생겼다.
“저기, 지젤? 평가는 끝내는 게 좋지 않을까? 불편한 건 알겠는데, 일단 할 건 마저 해야지.”
지젤보단 성적을 소중히 여기는 루윈이 말을 얹었다.
“내 알 바냐고. 너희들이 알아서 해. 난 짜증 나서 못 해먹겠으니까.”
씨알도 안 먹혔지만.
공지된 시각에 모이는 것부터 비협조적이던 지젤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원활한 과제 수행을 위해서라면 그를 잡아 어르고 달래야겠지만, 단테는 도무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애한테 친구 아니란 소리 들은 건 난데 왜 지가 화내? 양심이 없어?”
“절반이 악마라며. 근데 양심을 찾는 거야?”
“쟨 절반은 인간이잖아. 그리고 악마도 기본적인 상도덕은 있거든? 괜히 악마가 쓰는 주술의 기본이 등가교환이라고 하겠어? 으, 저 자식 예전부터 성적에 관심 없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나한테 엿을 주네?”
“나도 같이 받았으니까…… 우리끼리라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
붉은 입술이 나긋하게 호선을 그렸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침착함을 연출할 수 있다는 게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한 명이 줄어든 발걸음은 아까보다 빠르게 복도를 지나갔다. 지하 5층까지 연결된 이곳은 99개의 감방이 있었다. 철창으로 분리된 감방은 열려 있을 수도, 잠겨 있을 수도 있다.
학생들은 그 감방과 주변을 수색해 증표를 찾아야 한다.
“영력은 쥐뿔도 없는 우리 둘이서 말이지…….”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멍해졌다. 시작도 하기 전에 중간 탈주한 조원 덕분에 단테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최대한 빨리 뒤지는 수밖에 없겠네. 빨리 가자, 내가 최대한 엄호할 테니까 너는 멀쩡한 조각을 찾는 데만 집중해.”
둘은 보폭을 넓혀가며 최대한 빠르게 조각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예언 학부의 지도도 없이 무작정 둘러보는 건 한계가 있었다.
“여기 아까도 오지 않았나?”
“그런 거 같은데. 이 천장 무늬, 한 시간 전에 봤어.”
마치 미로처럼, 길은 멋대로 꼬인 실타래처럼 얽혀있었다. 눈이 밝은 루윈 덕에 왔던 곳을 또 왔다는 사실 정도야 알 수 있었지만, 가보지 않았던 길을 찾아내는 건 고단하고 고달팠다.
“젠장.”
휘웅-
퍽!
단테는 벽면에서 튀어나온 점액질을 두 동강 낸 뒤 마저 한탄했다.
“어떻게 조각을 하나도 못 찾을 수가 있지? 벌써 2시간은 지난 거 같은데?”
꾸물꾸물 찢어진 점액질이 바닥 밑으로 스며들었다. 아카데미에서 준비한 방해물은 죄 이런 식이었다. 징그럽고 확실하게 통행을 방해했다.
“3시간 반.”
루윈은 바지 안에 넣어둔 회중시계를 확인한 후 답했다.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있던 단테의 이성이 점점 둔해졌다. 골치 아픈 상황에 골치 아픈 놈까지 생각하자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올라가면 지젤 목부터 따버릴 거야.”
“찬성.”
“너도 같이 딸래?”
“내 능력으로? 응원의 불꽃 쇼는 보여줄 수 있는데.”
“올라가면 해줘.”
여유롭게 웃을 기력도 소진됐다. 단테는 눈앞을 막아선 식물의 줄기를 날카롭게 베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잇새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망할 자식.”
‘거절당한 게 충격적인가? 갑자기 친구를 잃어버린 내가 더 충격적이다!’
매몰차게 거절한 게 잘못이었나, 하지만 밤새도록 생각해도 제 태도는 틀리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달랠 만큼 상냥해야 했나? 그 말을 듣고도 ‘넌 참 좋은 친구지’, 하면서 넘어가야 했나?
그 쉬운 검도 골백번씩 휘두르니 힘에 부쳤다. 드문드문 놓인 전등은 꺼림칙할 만큼 환했고, 기세 좋던 루윈의 걸음걸이는 점점 뒤처졌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단테는 힘껏 순화한 어조로 말했다.
“루윈, 네가 좌우를 안 보면 내가 저것들을 썰어버린 보람이 없지 않을까?”
“나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거든?”
뾰족한 어조가 상대방을 치고받았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손바닥이 무뎌질수록 단테는 점점 초조해졌다.
‘디트리히는 3시간 만에 끝냈다고 했어. 잉그리언은 영력이 있으니까 조원이 없어도 잘할 거고, 노엘은 조원 구성이 좋았지. 나는, 나는…… 어떡하지?’
대련 때마다 다른 애들에게 조금씩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게 세상에 있기 마련이니까. 어쨌든 나름대로 노력했으니까.
단테는 이제 그만큼은 자신을 보듬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
조원 한 명이 튄 책임을 온전히 감수해야 한다니, 분했다. 가지런한 윗니가 아랫입술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비릿한 선혈이 혀끝으로 번졌다.
“단테, 일단은 진정해.”
“뭘 진정해? 이번 평가가 망하면 디트리히는 무슨, 다른 애들한테도 왕창 밀릴 텐데?”
“너 지금 흥분한 거 같은데 잠깐,”
“네가 대체 뭘 안다고 그래!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단테는 제 어깨 위로 얹어진 손을 거칠게 잡아 내리쳤다. 그러자마자 제풀에 놀라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미안, 루윈. 그, 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 지금,”
× 됐어.
단테는 그제야 ‘큰 소리를 내지 말라’는 조교수의 경고를 떠올렸다. 몇 년 전 졸업시험용으로 배치한 7학년 전담 주술을 깨울지도 모른다고.
“성적 망했네.”
두꺼운 덩굴식물이 벽을 뚫고 자라났다. 단테는 지체 없이 남은 조원의 손목을 낚아채고선 계단을 향해 뛰었다.
* * *
지하에서 빠져나왔을 땐 이미 해가 어스름이 지고 있었다.
“단테, 이제 괜찮아! 단테!”
단테는 그제야 자신이 힘을 주고 있던 손을 내려다봤다. 보기 좋게 그을린 손목 위로 붉은 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어떡해, 내가, 지금, 너, 너한테…….”
그제야 다른 사람의 평가를 망친 거로도 모자라 좋아하는 애를 다치게 했다는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쭈뼛 올라왔다.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괴수를 발견했을 때도 차분했던 몸이 그제야 떨렸다.
“야아, 왜 그렇게 당황해. 괜찮아. 진짜 괜찮다니까?”
“내가, 나는…….”
지하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목이 아팠다.
단테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발끝을 응시했다. 한나절 동안 지하를 누빈 신발은 거무튀튀한 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미안. 나는, 내가, 잘못했어.”
상황이야 어쨌든 자신의 실수였다. 그렇게 언성을 높이는 게 아니었다, 우악스럽게 손목을 잡아채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가쁘게 쌓인 호흡은 점점 단테를 짓눌렀다.
“응. 단테 네가 잘못했어.”
이상하게도, 단테를 바라본 두 눈은 평소와 같았다.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얇게 굳힌 설탕 시럽처럼 친근한 눈빛.
“네가 잘못했고, 그게 끝이야.”
“……뭐?”
“실수했고, 넌 사과했고. 그럼 됐다고.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긴 손가락이 잠시 머뭇거리다 가까워졌다. 따뜻한 엄지가 눈가에 닿았다. 루윈은 울지 않는 단테의 눈 모서리를 다감하게 쓰다듬었다.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늘 없는 미소에 가쁜 호흡이 진정됐다.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이는 얼굴엔 주홍빛 음영이 그려졌다.
* * *
당연히, 종합 평가는 깔끔하게 말아먹었다. 그런데도 썩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내가 드디어 돌았구나.’
단테는 차분히 납득했다.
암막 커튼 사이로 빛이 한 자락 삐져나왔다. 소맷자락을 둘둘 올린 팔이 단단하게 커튼을 쳤다.
“너 또 집에서 어머니가 뭐라고 하지 않을까?”
“그러네. 그러면 이번에도 너희 집에 가도 돼?”
“그러든가.”
낮은 웃음소리가 작게 울렸다. 덜 자란 소년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뼈가 여물었고 봄과 여름이 다르게 목소리가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