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첫 만남은 청혼부터 １권
두 번째 첫 만남은 청혼부터 １권
두 번째 첫 만남은 청혼부터
© 나강온
두 번째 첫 만남은 청혼부터 １권
· 차례 ·
프롤로그
CHAPTER 1. 두 번째 첫 만남 (1)
CHAPTER 1. 두 번째 첫 만남 (2)
CHAPTER 2. 첫 번째 첫 만남 (1)
두 번째 첫 만남은 청혼부터 １권
프롤로그
퇴근 시각이 다가온 시청 상담 데스크, 눈에 띄게 화려한 남자가 얼쩡거리는데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랑 결혼해 줄래?”
여전히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널 생각하면서 하나하나 고른 꽃이야.”
여전히,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남자가 꽃을 내미는 상대 또한 별 반응이 없었다. 하다못해 거리를 누비던 왕벌이 들어와도 이것보단 열정적인 반응일 게 분명했다.
“꽃이라고?”
“응!”
여자의 반응에 남자는 신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가가 본다면 신이 내려준 조각임이 분명하다고 찬탄할 외모였으나 데스크에 앉은 여자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꽃-이긴 하네.”
시청 소속 직원, 단테는 붉은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 묶은 남자, 루윈을 응시했다. 날카롭게 뻗은 눈매는 기쁨에 겨워 쭈글쭈글 누그러져 있었다. 꼭 눌어붙은 식빵 모서리 같았다.
“널 생각하면서 골랐으니까, 세상에서 너 다음으로 아름다울 거야.”
커다란 손에 들린 꽃다발은 루윈의 말마따나 아름다웠다.
당연했다. 저 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그리고 이거 받고 나랑 결혼해 줄래?”
황금과 마력석을 세공해 만든 꽃이었으니까. 꽃이 아니라 장식품에 가까웠다. 게다가 사이사이 장미 모양으로 접힌 종이꽃은-
“넌 청혼을 백지 수표로 하니?”
항구도시, 델링에서 가장 부유한 루윈의 서명이 멋들어지게 적힌 백지 수표로 만든 것이다.
“못할 것도 없지 않나? 네가 전에 너무 커다란 건 부담스럽다고 해서, 소소하게 바꿔 봤어.”
시청 직원의 반년, 아니 일 년, 어쩌면 이 년 치 월급이 단테의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상담 데스크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던 단테는 지극히 사무적인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고객님? 선물도 청혼도 못 받아요.”
단테는 델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잘생긴 남자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두 사람이 한 달 전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것, 하나는-
“공직자 청탁 방지법과 근무 조항에 따라, 현금성 500베르크 이상의 물품은 못 받습니다.”
단테가 청렴결백한 공무원이라는 것.
“그럼 살펴 가세요, 안녕.”
사무적인 미소가 거둬졌다.
오늘로써 루윈의 스물세 번째 청혼이 좌절됐다.
데스크 한쪽에서 청혼 내지는 청탁이 벌어졌지만 다른 직원들은 눈길도 주지 않고 제 할 일에 집중했다. 과연 효율과 인정이 넘치는 델링시청다웠다.
앞에서 적발의 미인이 꽃다발을 들이밀거나 말거나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직원들은 시침이 ‘5’자를 가리키는 순간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봬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청혼과 청탁은 남의 일이었지만 퇴근은 일과 중 가장 중요한 내 일이니까.
동료들이 재빠르게 일터와 멀어지는 사이 단테는 한발 늦게 서류를 정리하고 가방을 챙겼다. 3분 전 청혼을 거절당한 루윈은 여전히 단테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럼, 오늘도 데려다줄게.”
루윈은 왼손으로 단테가 받지 않은 꽃다발을 쥔 채 오른손을 내밀었다.
“개수작도 작작.”
단테는 코웃음을 치며 빛깔 좋게 그을린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러면서도 제 옆에 붙어 쫄래쫄래 따라오는 루윈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단테가 루윈의 말도 안 되는 수작에 적응한 지도 어언, 어언…….
한 달밖에 안 됐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두 번째 첫 만남은 청혼부터 １권
CHAPTER 1. 두 번째 첫 만남 (1)
델링시청 소수 종족 지원부 공무원 단테의 삶은 평화롭다.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에 자리를 잡은 건 평화로운 일상의 표본이나 다름없었다. 아카데미 전공을 살리지 못한 게 살짝 아쉽긴 하지만, 세상에 전공을 살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단테는 이른 나이에 휴식기 없이 공무원으로서 일하는 게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열 시에 출근해 다섯 시에 퇴근하는 여유로운 근무 시간과 성실하고 상냥한 동료들과 책임감 있는 상사, 그럭저럭 납득할 만한 수준의 월급.
전반적으로 시청 직원으로서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단테 씨,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유리 씨.”
“오늘은 단테 씨가 1층이죠?”
“맞아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비록 교대로 1층 상담 데스크에 앉아 내방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게 피곤하긴 했지만, 영 못 버틸 수준은 아니었다.
단테는 산뜻하게 손을 흔드는 유리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시청 건물은 백 년 전 사치스러운 귀족의 별장이었다는 곳을 보수해 쓰고 있었다. 덕분에 화장실이나 사무실 따위를 현대식으로 바꾸긴 했지만 계단이나 복도는 왕이 존재하던 시대의 멋이 남아 있었다.
“오늘도 빌어먹을 월요일의 시작이네요, 단테.”
“그러게나 말이에요.”
데스크 자리에 앉은 단테는 동기의 말을 능숙하게 받아넘기며 케이프를 가다듬었다. 사무실에 있을 때야 챙겨 입지 않아도 나무라는 이가 없었지만 상담실은 달랐다.
시청 본관 1층. 외부인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시청의- 나아가 델링의 얼굴이라는 이유로 시장은 상담실 직원의 복장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단테는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한 케이프를 툭툭 털며 첫 방문객을 만날 준비를 했다. 데스크를 맡을 때마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아무도 오지 않길 바라지만 그 소원이 이뤄진 날은…….
“좋은 아침이에요, 선생님. 우선 신분증 확인부터 할게요.”
없었다.
심지어 기록적인 폭우가 왔을 때도 방문 상담을 하러 온 시민이 있을 정도니까.
단테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첫 손님이 의자에 앉기를 기다렸다.
“신분증을 만들려고 왔어요.”
“그렇군요. 종족은 어떻게 되시나요?”
“혼혈이면 어떻게 말해야 하죠? 전부 다요?”
“낳아주신 분들을 모두 알고 있으신가요?”
“네.”
“그럼 그분들만 적어주세요. 아틀라스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으신가요?”
“네! 읽고 쓸 줄 알아요.”
단테는 서류철에 끼워져 있던 종이를 찾아 손님에게 내밀었다. 머리카락 끝자락이 다이아몬드를 녹인 것처럼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요정과 인간 혼혈, 아버지는 뱀파이어와 요정 혼혈. 네, 알겠습니다. 델링이 첫 도시인가요?”
“네. 그전까지는 산에서 살았거든요. 파라탄의 ‘요정의 산’이라고.”
“알겠습니다. 여기 남은 서류 작성해 주세요.”
방문객은 종이를 빠르게 채워나갔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요정의 묘기라도 부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여기요.”
그리고 단테는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서류를 확인하고 도장까지 찍었다.
“감사합니다. 정식 신분증이 발급되려면 일주일 정도 걸려서요, 다음 주 월요일에 찾으러 오세요. 이건 임시 신분증. 다음 주에 오실 때까지 사용하시면 됩니다.”
요정의 술수보다 1분이라도 더 놀고 싶다는 직원의 열망이 더 힘이 셌다.
첫 손님은 단테의 예술적인 일 처리에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눈만 깜빡이다 돌아갔다.
“휘유, 아침부터 방문 손님이라니. 빡센데요?”
옆자리에 앉은 산타는 휠체어 바퀴를 도르르 굴리며 단테에게 다가왔다.
“그러게요. 월요일이라서 그런가?”
월요일부터 일을 하고 싶은 직원은 아무도 없기에, 방문객이 없는 상담실은 꽤나 수선스러웠다. 다른 부에서는 출근하면서 산 블라우스를 자랑했고, 응접실에선 꽃차와 커피 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단테 역시 산타가 나눠준 아몬드를 오독이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일이라니? 안 될 말이었다.
“이대로 아무도 안 오면 좋겠어요.”
단테는 남은 아몬드를 모조리 털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산타의 희망은 반쯤 이뤄졌다.
퇴근하기 1시간 전까지는 정말 아무도 오지 않았으니까. 홍수도 폭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사람이 안 올 수 있나! 직원들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흥겨워했다.
하지만 흥은 곧 깨졌다.
“저기, 여기-”
도로 붙었다.
“세상에…….”
“맙소사.”
두꺼운 유리문이 열렸다. 흐릿하게 보이던 두 번째 방문객의 실루엣이 선명해지자 데스크 안쪽에는 숨을 참는 소리가 속속들이 들렸다. 이러다가 단체 호흡 곤란으로 실려 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이는 몹시, 몹시 훌륭한 외관의 소유자였다. 검은 리본으로 올려 묶은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불처럼 붉디붉었고 시원하게 뻗은 눈매 가운데 황금빛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개방적인 델링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너른 가슴 역시 개방적이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풀다니! 단테는 퍽 감동받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감동할 수는 없었다.
이곳은 직장이었고, 지금은 근무 시간이었으며 저 화려한 인상의 손님이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선생님. 우선 신분증 확인부터 할게요.”
다행히 수천 번은 외웠을 문장을 내뱉는 건 쉬웠다.
의문의 손님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단테는 찬찬히 그를 살폈다. ‘소수 종족 지원부’라는 부서 이름에 맞게 단테에게 오는 이들은 소수 종족이었다.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 요정, 천사 혹은 악마의 후손들. 멍청한 짓인 걸 알면서도 단테는 손님의 종족을 가늠하려 했다.
‘야행성인 뱀파이어는 제외하고, 늑대인간보다는 날렵한 체구고, 사람을 홀리는데 익숙한 악마나…….’
“단테.”
“네?”
세상에, 목소리 역시 좋았다. 자주 가던 극장의 뮤지컬 배우처럼 감미로웠다. 화려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사근사근하고 쾌활한 어조였다.
단테는 내심 감탄하면서도 능숙하게 응대했다. 외모에 홀려서 몰랐는데, 아직까지 신분증을 받지 못했다.
“손님. 우선 신분증을,”
“나는 루윈이라고 해.”
근데 왜 초면에 반말이지?
훌륭한 외모와 목소리로 쌓였던 호감도가 무차별적으로 깎여져 나갔다. 조금 달아오르던 은청색 눈동자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4년 차 공무원 단테는 초장에 대뜸 반말을 하는 부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첫째론 진상이었고 둘째론 개진상이었고 셋째론.
“우리 결혼할까?”
“미친…….”
구제 불능 미친 개진상.
델링시청 소수 종족 지원부 공무원 단테의 삶은 평화로웠다.
3분 전까지는.
* * *
“저기, 저는 손님 이름도 모르는데요?”
“아까 말했잖아. 나는 루윈. 성(Family Name)은 너랑 맞추려고 해서 아직은 없어. ‘루’라고 불러주면 더 좋고.”
“저희 오늘 처음 만난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