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서면 남인데 1권
돌아서면 남인데 1권
돌아서면 남인데
1권
돌아서면 남인데 1권
차 례
1
2
3
4
5
6
돌아서면 남인데 1권
1
“떠날 거예요.”
“……레일리.”
한 번이라도 당신이 날 사랑했다면, 이토록 비참하진 않았을 텐데.
마주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숨이 막혔다.
알고 있었다.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자신을 그저 가문을 이어줄 자식을 낳아줄 여자로 생각했던 것도.
레일리는 테오가 그저 옆에만 있으면 좋다 생각했었다.
바보같이. 멍청하게도.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때 그제야 그가 저를 봐주기 시작했던 그때에도 레일리는 알지 못했다.
사랑.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허상에 사로잡혀 그녀는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었던 걸까. 그가 저를 정말로 사랑했더라면, 이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어쩌면 시작부터 잘못된 만남이었지 않았을까.
도망치기 위해 눈을 가리고 보여지는 것만 믿은 채 그의 손을 잡았던 저와, 제 가문의 힘을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감정을 만들어 낸 그.
그래도 그녀는 믿고 싶었다.
달라지지 않을까,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처음 저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것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안아주지 않을까 하고.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그래도 가족이니까.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위태롭게 아슬아슬했던 사이는 결국 썩어 문드러진 끈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는 행위에 불과했다.
끊어져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것 또한 저뿐이었다.
제 배 속에 품고,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자 도피처. 레일리의 아이가 죽어버렸으니까. 여전히 배를 발로 차던 느낌이 떠올라 슬픔이 몰려왔다.
따스한 느낌, 함께 있었던 그 온기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오로지 저만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
레일리는 천천히 이제는 텅 비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제 배를 쓸었다.
‘미안해, 아가.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보내서. 엄마가 미안해,’
그녀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들어보지 못한 아이의 울음소리, 웃는 얼굴, 제 손을 잡는 모습을 상상해 봤지만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아이의 일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어.”
예상치 못했다라…….
레일리는 허탈감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제 앞에서 입을 놀리고 있는 테오와 마주 선 지금도 그녀에겐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그 애가 나 혼자만의 아이였나요……?”
덤덤한 표정과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억양에 레일리는 끝없는 절망으로 끌려 내려갔다.
그래, 차라리 나 혼자만의 아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내 품을 떠나간 아이가 혹여나 들을까 초조해하지 않아도 될 테지.
테오는 레일리의 굳은 눈빛에 황급히 변명하려 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 여자가……. 당신이 사랑하는 그 여자가 계단에서 날 밀었을 때…….”
당신은 보지 못했잖아.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당혹감과 놀라움, 그리고 기쁨을.
아무리 제가 말을 해도 테오는 듣지 않았다. 이제 와 사실을 밝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일까.
떠나면 그만인 것을.
테오는 여전히 레일리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인내심이란 게 있을까? 정부와 매일 밤을 보내어 기어코 그녀의 배 속에 아이를 가지게 했는데.
“실수였잖아. 그녀가 일부러 그랬을 리 없어.”
“우리 아이였어요. 내 아이가, 당신 아이가! 죽었어요……. 난 아직도 내 배 속에 아이가 살아 있는 것만 같아요.”
참았던 분노와 절망감이 또다시 그녀를 덮쳤다.
저만 사라져 주면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거야? 아니. 오히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잖아.’
테오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레일리는 저를 바라보는 테오의 눈빛에 소름이 끼쳤다. 죄책감도 일말의 슬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밤, 배를 웅크리고 힘겹게 잠이 드는 것도 지쳤다.
이 저택에선 그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아이를 잃은 것이 대해 슬퍼하지 않았다.
아이를 가졌던 사실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아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레일리, 네 마음 이해해.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이혼하겠다는 건 안 돼.”
아이는 다시 낳으면 되잖아.
‘낳을 수 없을지라도, 우선은 이렇게라도 잡아야겠지.’
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을 늘어놓았다.
테오의 말에 레일리의 꽉 쥔 두 주먹이 떨렸다. 더는 한 공간에서 있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저만 놓으면 그만인 관계였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는 놓아주지 않겠다 말했다. 단순히 그녀가 제도에서 힘 있는 트라일라 가문의 딸이기 때문에, 자신의 명성과 힘을 위해서.
테오는 자신의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안나를 살게 했다.
매일같이 드나들며 사랑을 나누고 그녀의 앞에까지 데려와 인사를 시켰을 때, 레일리는 그를 놓지 못해 눈을 가리고 자신을 속였다.
얼마 가지 않을 거야. 내가 안주인이니까, 그녀는 내 자리를 위협하지 못해.
그러나 그 헛된 희망은 한 달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안나는 레일리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에선 자신이 우위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일리가 테오의 아이를 가지게 되자 안나는 상황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느꼈다.
안나가 가질 수 없는 것, 테오와의 아이 그리고 공작부인의 자리였다.
그때부터였던가, 음식의 맛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레일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구역질이 나고 아이를 잃을 뻔하는 일을 겪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다간 나도, 내 아이도 위험해.’
안나를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레일리는 스스로를 좀 먹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레일리는 매일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다 지켜본 후에야 먹곤 했다.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은 없었다. 테오는 레일리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으며 이곳에서 그녀는 그저 허울뿐인 공작부인이었다.
안나가 계단에서 저를 밀기 전까지만 해도 저만 조심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제가 가진 아이를 죽이기 위해 저를 잡아 당겼을 때, 레일리는 그제야 제가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더 빨리, 이곳에서 벗어났다면…….
레일리는 자신을 죄여오는 죄책감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녀는 제 손을 붙잡는 테오에게서 뒤로 물러나 표정을 갈무리했다. 손끝이 스쳤을 뿐인데도 역함이 몰려왔다.
“당신을 사랑하고, 아이를 낳아줄 저 여자와 행복하길 바라요. 그곳이 지옥이었으면 좋겠지만…….”
이를 악문 잇새로 그녀의 분노가 새어 나왔다.
으득 갈리는 소리가, 얼마나 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레일리 이제 와 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이제라도 벗어나는 게 다행인 거겠죠.”
테오가 입술을 짓씹었다. 도무지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제길, 이건 예상에 없던 일인데.’
테오의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레일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테오를 향해 경멸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나를 이토록 잡는 것은 제가 트라일라 가문의 딸이기 때문이겠죠.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하찮은 작위의 귀족이고.”
“레일리!”
집에 말하지 못한 것은 달라질 것이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도망쳤다면 나았을까?
무엇 때문에 믿고 싶었던 허상을 붙잡고 참으며 비참해졌을까.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가문도 다를 게 없기 때문이었다. 명예, 사람들의 시선. 그녀의 아버지가 알아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라도 그에게서 벗어나기로 했다. 저를 잡아먹은 이 감정으로부터, 자신의 아이를 잃게 만든 저로부터.
끔찍했던 이곳에서의 삶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그러니 이혼해요, 이곳에서 떠나줄 테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내가 이곳에서 당한 일은 말이 되나요?”
“레일리.”
테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혼이란 말이 나오고서야 표정에 변화를 보게 되다니, 레일리는 저도 모르게 조소가 흘러나왔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바보 같은 나 때문에 떠나간 내 아이를 위해서.
“다신 보지 말아요, 우리.”
그녀는 손을 뻗어 자신의 팔을 잡는 테오를 뿌리치곤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눈물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목에서 문양이 나타나더니 따끔거렸다.
“정말 괜찮겠어? 능력을 쓰게 되면 눈치를 챌 거야.”
중저음의 목소리와 함께 레일리의 맞은편에 장발의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괜찮아요. 어차피 평생 숨기지는 못할 거 알고 있었어요.”
“…….”
“그냥 나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줘요.”
“그래, 네가 원한다면.”
레일리의 은빛 머리칼이 남자의 손길 한 번에 검은색으로 변했다.
시야가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심장에 뭉근한 아픔이 느껴졌다. 가만히 두 눈을 감은 레일리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왜 우는지조차 모른 채.
테오, 그를 만난 건 동생을 따라나선 연회장에서였다.
저를 향한 시선들이 곱지 않음을 알기에 그녀는 애써 무시하며 동생 주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레타를 보며 레일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트라일라 가문에서 버려진 공녀, 쓸모없는 레일리.
허울뿐인 공작가의 적녀.
그게 레일리를 뒤따르는 수식어였다. 그녀의 아비는 연회장에서 혹여나 딸의 외모를 보고 반해 결혼하자는 남자가 있을지 모른다며 그녀에게 드레스를 사 입혔다.
실로 오랜만에 입어 보는 제대로 된 드레스였다.
목을 축이며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저를 향한 시선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레일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려 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밖에서 뵙지 못해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격식을 갖춘 인사에 레일리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저에게 말을 먼저 걸어준 사람은 지금 이 남자가 처음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프린츠 가문의 테오 알베르입니다.”
놀랍게도 그는 저와 같은 공작 가문의 사람이었다. 레일리는 사교계의 소문에 귀가 어두웠지만 레타를 통해 종종 많은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녀가 말하기를 그는 참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했다. 테오 공작은 누구에게나 친절했으며, 올곧고 일에 대한 열망도 강해 쉬지 않고 열심히 저를 가꾸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는 트라일라 가문의 레일리 공녀예요.”
“말씀하지 않으셔도 한 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실 줄은 몰랐군요.”
“아……. 감사합니다.”
처음 듣는 칭찬에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는 참으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날 연회에서 레일리는 그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