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인 남자들의 청혼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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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인 남자들의 청혼
5
수이나
나를 죽인 남자들의 청혼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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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인 남자들의 청혼 5권
023
교회의 복도를 걷던 엘레나가 속도를 늦추며 슬쩍 곁눈질을 했다. 며칠 전부터 자신을 따라붙는 시선이 오늘도 어김없이 느껴지는 참이었다.
물론 요즘 엘레나에게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이목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 시선은 조금 달랐다.
몰래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면 사라졌다. 염탐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고 해서 능숙한 자의 소행은 아니었다.
‘뭐지, 대체.’
특별히 악의가 느껴지거나 살기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 가만 놔두고 있었지만, 의식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엘레나.”
“아, 다인.”
복도 반대편에서 반가운 표정을 한 다인이 빠르게 걸어왔다. 내내 도서관에 박혀 있었는지 다인의 얼굴이 푸석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하게 느껴져서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잠은 자는 거지?”
“그럼, 당연하지.”
“집에서, 자고 있는 거지?”
“아하하…….”
엘레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캐묻자 그는 어영부영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벌써 며칠째 집에도 가지 않고 자료만 뒤적였던 것이 분명했다.
허름한 수습 사제 의복을 입은 다인은 지쳐 보였지만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엘레나가 그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천직이다, 정말.”
“응?”
“사제복 말이야. 잘 어울려.”
“아…….”
제 차림을 한 번 내려다본 다인이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행색은 초라해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빛나 보였다.
엘레나는 썩어 빠진 작금의 교회에서 가장 사제라는 신분의 본분에 가장 가까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다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인과 같은 이들이 조금만 더 많았다면 교회가 이토록 타락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럼 어쩌면 헬라 제국이 멸망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구호소 쪽은 어때?”
“똑같아. 빈민은 끝이 없고, 백성들은 불안해해.”
엘레나의 한숨에 다인의 얼굴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풀 수 있는 곡식에도 한계가 있어. 길게 끌 수 없어.”
“그래……. 내가 얼른 실마리를 잡아야 할 텐데.”
침울하게 말끝을 흐리던 다인이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엘레나.”
“알아. 며칠 됐어.”
뛰어난 기사인 다인이 시선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엘레나는 티가 나지 않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악의가 있는 것 같진 않아. 그런데 좀 신경은 쓰이네.”
“끌어낼까?”
“흠…….”
엘레나가 낮게 침음했다.
“아냐. 내가 해결할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옮기던 걸음을 멈춘 엘레나가 단숨에 몸을 돌렸다.
“나오세요.”
정면 돌파를 선택한 엘레나가 곧은 시선으로 한곳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기둥 뒤편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숨을 죽인 채 웅크리고 있었다.
“며칠간 절 따라다니신 걸 알고 있습니다. 절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러니 나오세요.”
교회 안이니 섣불리 소란을 일으킬 수 없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게다가 다인과 자신이 함께 있는 이 상황에서 웬만한 건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정공법을 택한 것이었다.
“……송구합니다, 공녀님.”
천천히 그림자에서 걸어 나온 남자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낡았지만 정갈한 까만색의 수도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였다.
“신중을 기하는 일이기에 본의 아니게 결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중앙 교회 소속의 사제, 요하네스입니다.”
깍듯하게 예를 차린 요하네스가 이내 고개를 들고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저와 함께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딜 말이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결코 위험한 일은 아닙니다.”
엘레나가 슬쩍 다인을 바라보았다. 눈동자를 살짝 빛낸 다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여기 있는 드라우프니르 공자와 함께 가겠습니다.”
요하네스가 슬쩍 다인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경계하듯 훑어본 그가 몸을 돌리며 따라오라 손짓했다.
인적이 드문 교회 건물 지하의 좁고 어두운 복도로 두 사람을 인도한 그가 기둥 뒤로 휙 돌아갔다. 그 뒤에 감쪽같이 감춰져 있던 계단을 따라 또 한참을 내려간 그가 평평한 땅에 닿자 두 사람을 돌아봤다.
“여기서부터는 죄송하지만 이것을 착용하시지요. 제가 이끌겠습니다.”
요하네스가 건넨 것은 안대와 밧줄이었다. 아연했지만 군말 없이 안대를 쓰고 밧줄을 잡았다. 캄캄해진 시야 속에서 요하네스가 당기는 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길고 복잡하게 구부러진 길을 요리조리 걷던 요하네스가 한참 만에 다시 걸음을 멈췄다.
“이제 안대를 푸셔도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러고는 품에서 작은 나무 조각을 꺼내 들고는 벽을 손끝으로 슥 훑더니, 낡아서 깨진 듯한 벽돌 틈에 그 나무 조각을 꾹 밀어 넣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길을 막고 있던 벽이 소리도 없이 뒤로 열렸다.
“이게…….”
어안이 벙벙한 두 사람을 이끌고 요하네스는 또 한참을 걸었다. 등 뒤에서 열렸던 벽이 스르르 닫히는 것이 느껴졌다.
“교회 아래 이런 곳이 있었습니까?”
“예. 교회에도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대대로 교황님들에게만 전해지는 장소입니다.”
“잠깐, 그 말은…….”
막 물으려는 찰나 눈앞에 문이 나타났다. 키가 큰 다인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만큼 작고 낡은 나무 문이었다.
“예. 교황 성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벌써 수개월째 종적을 감춘 교황. 에리우스 3세.
지금껏 자신을 지켜보던 사람이 바로 그 교황이었다니.
놀란 엘레나의 얼굴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은 요하네스가 공손한 자세로 문을 열었다.
어두운 지하실, 햇빛 하나 없이 희미한 마정석 램프가 밝히는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다.
오래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책과 서류 더미들, 오래된 양식으로 그려진 그림과 태피스트리,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각종 물건들이 뽀얀 먼지를 얹은 채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치 완전히 다른 시간의 흐름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놓인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리던 노인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고 시선을 던져왔다.
깐깐하고 완고한 표정으로 안경 너머의 엘레나를 보던 교황이 이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장꼬장하던 표정은 이미 경악으로 바뀐 채였다.
“오, 세상에……. 여신이시여.”
떨리는 목소리가 감격스럽게 기도문을 읊었다. 책상을 돌아 엘레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온 교황 에리우스 3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이제야 뵙습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엘레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하……!!”
당황한 엘레나가 황급히 몸을 숙여 교황을 만류하려 했지만, 그보다 더 먼저 에리우스 3세가 엘레나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렸다.
“용의 후예, 여신의 적법한 계승자, 헬라 제국의 마지막 황태녀, 엘레나 기르얀 리오아네스 전하. 이 비겁한 죄인 에리우스가 감히 전하를 뵈옵니다.”
다인과 엘레나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흠칫 놀라며 뒤를 바라보니 여기까지 자신들을 인도해 준 요하네스는 모습을 감춘 후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용이라니요. 성하, 저는 세르베니아의 엘레나입니다.”
당황한 목소리로 부정하며 자신을 부축하는 엘레나를 올려다보는 에리우스의 주름진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설마, 기억을 잃으셨습니까?”
“……예?”
거침없이 던져지는 진실에 엘레나의 몸이 바싹 굳었다.
방어적인 엘레나의 태도에 힘겹게 몸을 일으킨 에리우스가 그림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으로 가더니 그중 하나를 낑낑대며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 힘겨운 모습에 급히 달려간 다인이 에리우스를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액자 안에는 한 가족의 초상화가 담겨 있었다.
“이건…….”
나뭇가지 모양으로 세공된 금관을 화려하게 수놓은 오색찬란한 수정.
헬라 제국 황제의 관을 쓰고 붉은 비단으로 만든 황좌에 앉은 여인이 막 걸음마를 떼었을 법한 어린아이를 안은 채 온화한 낯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까만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수려한 중년 남성이 여인의 손을 잡고, 제 앞에 선 어린 여자아이의 어깨 위에 다정히 손을 얹고 있었다.
그림을 마주한 엘레나가 순간 숨을 멈췄다. 저 그림을 그리던 날의 기억이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엘레나를 덮쳤다.
내내 칭얼대던 동생 필리프. 그런 아이를 손수 어르던 어머니의 노랫소리, 지루해하는 자신을 달래던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떠돌던 먼지와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유화 물감의 냄새까지도.
불쑥 눈물이 솟아날 것만 같아 엘레나는 두 주먹을 꾹 쥐었다. 오래전에 빼앗긴 시절의 파편이 그곳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와 정말 많이 닮으셨습니다, 전하.”
“이 그림은 대체…….”
헬라 황실에 대한 기록은 아스티아 황실에 의해 깡그리 다 불태워졌다.
엘레나와 카엘, 그리고 다인까지. 그동안 작은 기록이라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그 흔한 궁정 관리 기록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게 보존되어 있는 거지?
“교회에서 황실 몰래 대대로 보관해 오던 그림입니다. 아마 헬라 황실의 마지막 남은 초상화일 것입니다.”
“아…….”
“아마 역대 교황들 중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이 서고는 교황들에게만 전해지는 비밀 서고이지만, 이 먼지투성이인 곳을 속속들이 파고든 사람은 거의 없었을 테니까요.”
아니라면 이리 멀쩡하게 보존되어 있을 리 없었겠지요.
에리우스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황실에 철저히 빌붙은 지금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면, 발견한 즉시 비밀리에 불태워 버렸어도 이상할 게 없을 터였다.
“교황직을 맡고 난 후 저는 이 서고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과 아스티아 제국이 세워지던 당시 교황이었던 갈리스토 성하의 회고록을 발견했습니다.”
노쇠한 얼굴 위로 회한과 죄책감이 만든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여신의 뜻을 거역하고 반역자들의 손을 들어준 것을 참회하며 적은 그 회고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회고록에는 루아나 황제 폐하를 도와 마지막 용의 후손인 황태녀 전하를 시작의 숲에 봉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지요.”
한 번에 많은 말을 해서인지 에리우스가 잠시 말을 멈추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노인의 가슴팍이 힘겹게 부풀었다 꺼졌다.
“치유의 힘을 보이셨다기에 설마설마했습니다. 그래서 무례를 무릅쓰고 형제들을 시켜 전하를 며칠간 지켜보았고, 확신을 얻었습니다. 봉인되었던 용이 깨어난 것이 확실하다고.”
거기까지 말한 에리우스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으며 짧은 기도문을 읊었다.
“여신께서 아직 이 세상을 버리신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이렇게 구원자를 보내 주셨으니.”
엘레나와 다인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다인은 눈짓으로 에리우스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기억을 되찾았지만, 황태녀이던 시절은 까마득히 먼일이었다. 게다가 너무 어렸을 때였기에, 엘레나는 이런 대우가 처음인 것처럼 어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우 기쁜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던 교황이 먼저 아군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니까. 게다가 매우 호의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나를 먼저 알아보는 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아아……. 그렇다면 역시…….”
“맞소. 내가…….”
갑자기 목이 막혀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긴 시간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잊혔던 이름을 혀끝으로 가만히 굴려 보았다.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무척 어렵게 느껴져, 엘레나는 작게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헬라 제국의 황태녀, 엘레나 기르얀 리오아네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