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인 남자들의 청혼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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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인 남자들의 청혼
2
수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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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인 남자들의 청혼 2권
006
궁정 예법대로 허리를 숙이며 흐드러지게 웃는 얼굴이 민망함을 배가시켰다.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부드럽게 손을 끌고 가더니 그 위로 입술을 누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무도회가 끝나면 다시 한번 카발리에를 청하지.”
“그건…….”
“장담컨대, 아마 한 번 써 보면 무르고 싶지 않아질 거야.”
물건이라도 파는 듯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피식 웃음이 샜다.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볍게 만들어 버린 남자가 산뜻하게 웃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참 종잡을 수 없는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이, 엘레나의 시야 속으로 저택 쪽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린다의 모습이 들어왔다.
“공녀님!! 지금 공작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안일하게 풀어졌던 마음을 단번에 잡아 옥죄는 말이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상황이 흘러가기 시작하자 엘레나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다녀와. 내가 무도회를 위해 아주 멋진 선물을 준비해 둘 테니, 각하께서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더라도 그 생각으로 버텨 보라고.”
장난스럽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예민하게 굳어졌던 마음의 모서리를 한 꺼풀 깎아내린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슬그머니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엘레나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각하의 안목을 한번 기대해 보도록 하죠.”
자못 도도한 말을 내뱉은 엘레나가 린다와 함께 저택을 향해 멀어지자,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카엘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흠, 안나 황제와 요제프 공작이라…….”
조금 전, 비에라 길드 2층에서 엿들은 내용을 떠올린 카엘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 들었다. 어차피 사전에 보고 받았기에 정보의 내용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엘이 굳이 엘레나가 정보를 넘겨받는 장면을 지켜본 이유는 그걸 들었을 때 그녀의 반응을 관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카엘은 꽤나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엘레나는 아버지에게 혼인 전 다른 약혼녀가 있었다는 사실보다, 그 약혼녀가 ‘안나 황제’라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은 듯했다는 것.
‘희한한 일이야.’
귀족 자제가 아버지의 외도 여부를 조사할 때 그 목적이야 뻔했다.
첫째, 혹시라도 어디선가 튀어나와 자신의 상속분을 좀먹을 가능성이 있는 사생아 문제를 사전에 대비하기 위해.
둘째, 상속 경쟁자의 정당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셋째, 그걸 빌미로 아버지를 협박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상속 구도를 만들기 위해.
어느 것이건 결국은 제 몫의 상속분을 최대한으로 확보할 카드로 쓰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엘레나의 반응은 그 ‘뻔함’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자신의 출생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
게다가 자신의 어머니 후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안나 황제라는 사실에 경악을 넘어 혐오를 느끼는 듯한 눈치였다.
정보원 앞에서는 애써 표정 관리를 했지만, 그 이후 로엠 성에 돌아올 때까지 쭉 그 뒤를 밟은 카엘은 엘레나의 적나라한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제가 숨겨 둔 사생아.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잖아?’
현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안나 황제의 유일한 오점은 정통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다.
20년 남짓 되는 재위 기간 동안 총 다섯 명의 황후를 갈아 치우고, 몇십 명에 달하는 후궁을 들이면서도 황제는 끝내 후사를 보지 못했다.
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친동생인 베요나의 아들을 입양해 황태자로 세우긴 했지만, 만일 자신의 피가 흐르는 혈육이 있다면 그건 또 다른 얘기였다.
물론 그 아비가 세르베니아 공작가의 가주라면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지지만.
하지만 아비의 정체 따위 눈 깜짝할 사이에 바꿔치기하는 것 정도야 안나 황제에겐 일도 아닐 것이다. 온 제국이 떠들썩했던 제 약혼 사실마저 말끔하게 지워낸 황제가 아닌가.
덕분에 비에라 길드에서 이번 일을 조사하는 데 엄청나게 애를 먹기도 했고.
그런데 단숨에 이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가 될 수도 있는 정보를 손에 쥐고도, 엘레나는 마치 자신이 사이코 살인마의 딸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뭐, 사실상 다를 바 없긴 하지만.’
아무리 잔혹한 살인마라도 그 여자가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심드렁하게 납득한 카엘은 다음으로 사고를 이동시켰다. 그렇다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 현재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해서 다른 사람의 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가능성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오답이고.
남은 하나는…….
“증오하는 건가? 그 여자를.”
논리적 사고법으로 봤을 때 남는 결과지는 이것 하나였지만, 책상 놀음이 아닌 현실을 반영해 보면 상당히 의아한 결론이었다.
평생을 이 로엠 성에 갇혀 있다시피 살아온 열아홉 소녀가 자신의 모국인 제국의 황제를 증오할 일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점점 재미있어지네.”
“진짜 좋아하기라도 하십니까?”
“아, 깜짝이야!”
불쑥 얼굴 옆으로 치고 들어오는 그림자에 놀라 카엘이 펄쩍 뛰며 옆을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가임이 등 뒤에서 거북이처럼 고개를 쑤욱 내민 채 게슴츠레한 눈으로 카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안경알 너머로 의뭉스럽게 빛나는 눈동자에 시선이 닿자 카엘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미쳤느냐? 그 얼굴을 감히 어디에 디밀어?”
“……사람 얼굴 가지고 그렇게 막말하시는 거 아닙니다.”
상처받은 표정으로 슬그머니 목을 움츠리는 가임의 꼴이 기가 막혔다.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은 채 노려보고 있자니, 가임이 머쓱하게 안경을 한 번 밀어 올리더니 시무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반하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러다 만약 찾고 계시던 분이 아니면 어쩌시려고요.”
처음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요즘 점점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꾸 공녀를 보며 실실 웃었다가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가 혼자서 난리를 쳐 대는 거야 원래도 이상한 사람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공녀가 길드에 의뢰한 내용의 조사를 직접 챙기기 시작하더니, 심지어 정보를 전달하는 자리까지 부득부득 찾아가 지켜보기까지 하는 것 아닌가.
그 모습을 보니 의심은 불안의 단계까지 확장되었다.
결정적으로 얼마 전에 난데없이 값비싼 여성용 장신구를 구해 오라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만한 명령을 내렸을 때 가임은 턱이 빠질 뻔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하도 크게 벌려서.
이러다 우리 전하가 돌이킬 수 없는 감정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원래 첫정은 부모도 못 알아볼 정도로 격렬하고 답도 없다던데. 정말 회까닥 돌아 복수까지 집어치우는 건 아니겠지?
점점 폭주하는 마차처럼 달려 나가는 불안감에 가임은 내심 마음을 졸이던 참이었다.
“흠, 글쎄.”
하지만 정작 그 모든 의문과 경악, 그리고 염려를 응축한 질문을 받은 카엘은 설렘도 당황도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러면 그땐 새로 찾아낸 그 사람을 좋아하도록 노력해 볼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와, 진짜 냉혈한. 그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뭘 새삼스럽게. 그러니 제 부모를 죽인 여자 밑에 들어가 살랑대며 살고 있지.”
질린다는 표정으로 비난의 눈길을 쏘아붙였다가, 이내 뒤따른 말이 가임의 눈꼬리를 축 처지게 만들었다.
하여간, 불시에 멀쩡한 사람 나쁜 놈 만드는 건 이 인간이 온 대륙에서 일인자다.
“……딱히 살랑대는 것 같진 않던데.”
“뭐 인마?”
위기다.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빛을 슬그머니 피하며 가임은 이런 위기 상황에 꺼내려고 아껴 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말씀하신 자색 사파이어 세트가 준비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지고 들어오라고 할까요?”
“그럼 깜짝 선물이 안 되잖아. 내가 내일 직접 확인하러 가겠다고 일러두어라.”
정작 상대방은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은데 참 구질구질 지극정성이다.
엘레나 공녀가 쌩하니 사라져 버린 저택 쪽을 떨떠름하게 일별한 가임이 끝내 참지 못하고 말을 붙였다.
“에스코트 승낙은 받으신 겁니까? 거절당하면 어쩌시려고 이런 고가의 물건을 미리 주문하십니까?”
“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알아호멧의 재정이 그 정도까지 거덜 났더냐? 네놈 대체 얼마나 해 먹은 것이냐?”
“……해 먹을까요? 진짜 알뜰살뜰하게 어디 한번 빼돌려 볼까요? 예?”
“네가 어디 그럴 배짱이나 있는 놈일까.”
쥐락펴락 마음대로 가임을 농락한 카엘이 마치 악당처럼 낄낄대며 웃었다.
“난 이기지 못할 내기에는 걸지 않는 주의다. 내 걱정일랑 말고 네 걱정이나 하거라.”
“저요? 전 왜요?”
“네놈에게도 파트너는 필요하지 않겠느냐? 설마하니 무도회에서까지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닐 생각은 아니겠지?”
회심의 일격이라도 날리는 것처럼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카엘에게 가임은 얼토당토않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코웃음을 쳐 보였다.
“전 또 뭐라고. 파트너야 애초에 구해 두었죠. 저를 뭘로 보시고…….”
“뭘로 보다니, 모태 솔로로 보지.”
“아 진짜!!”
“아니 그보다, 정말로 구했다고? 대체 누구를?”
카엘의 얼굴에 오랜만에 당황이 떠올랐다. 버럭 성을 냈다가 카엘의 반응을 보고 의기양양해진 가임이 슬쩍 턱을 쳐들었다.
“아이린 공녀요.”
“……미친놈. 애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공갈? 협박?”
“아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쪽에서 먼저 청했다고요!!!”
버럭 소리를 지른 가임이 씩씩거리자, 카엘은 마치 이 세상에 신이 없다는 소리를 들은 성직자 같은 얼굴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집안 여자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역모 그까짓 거 한번 해 볼까, 진짜.”
사나이 인생 뭐 별거 있나. 할 말은 해 보고 죽는 거지.
진지하게 집안의 사병 규모를 되짚어 보는 가임을 기가 차다는 듯 바라본 카엘이 그 동그란 이마에 꿀밤을 날렸다.
딱! 경쾌한 소리가 청량하게 울렸다.
“아! 각하!!!”
“멍청한 생각 말고 잽싸게 따라오너라. 진짜 역모죄로 볼기짝 맞고 싶지 않으면.”
“제가 아직도 열 살 꼬맹이인 줄 아십니까? 볼기짝이 뭡니까, 볼기짝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잽싸게 제 뒤를 따라붙는 가임이었다. 그런 자신의 충직한 친우를 보는 카엘의 얼굴 위로 소년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가임이 연신 투덜대는 소리와 그걸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카엘이 태평하게 날씨 타령이나 하는 소리가 로엠 성의 오후를 채웠다.
* * *
가주의 방.
로엠 성의 가장 위층, 아름다운 장미 넝쿨이 섬세하게 수놓아진 거대한 호두나무 문을 마주한 엘레나가 천천히 심호흡했다.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언젠가 마주해야 하는 문제였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불시에 그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니 주먹을 쥔 손아귀에 축축하게 땀이 솟고 자꾸만 입이 말랐다.
‘아닐 수도 있어.’
그 가능성도 아직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과거에 약혼자 사이였다고 해서 꼭 그들 사이에 사생아가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애써 회피하고 있는 선택지이긴 했지만 엘레나가 요제프와 베요나, 그리고 안나, 그 누구와도 혈연이 아닌 생판 남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역시 버젓이 존재했다.
하지만 일평생 요제프 한 사람에게만 제 마음을 온전히 허락했던 엘레나에게 그 가능성은 허탈하고 쓸쓸한, 그리고 두려울 만큼 괴로운 이야기였다.
결국 이 세상에 자신과 연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확인받는 꼴이 될 테니까.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