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인 남자들의 청혼 1권
나를 죽인 남자들의 청혼 1권
나를 죽인 남자들의 청혼
1
수이나
나를 죽인 남자들의 청혼 1권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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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나를 죽인 남자들의 청혼 1권
001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은 하나같이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이 나곤 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어릴 때조차 단 한 번도 그게 자신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더러운 이교도의 왕이여! 네 앞에 있는 그 여인이 바로 신성한 우리 아스티아 제국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너희가 보낸 마녀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황당한 끝을 상상했던 건 결단코 아니었지만.
“지금이라도 그 마녀를 네 손으로 죽이고, 아스티아의 깃발 아래 무릎을 꿇고 빈다면 자비로운 아시타 여신의 뜻에 따라 너희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이다!”
등 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골이 울렸다. 마법이 만들어 낸 바람으로 한껏 증폭된 소리였다.
위협과 과시의 의도가 다분한 그 외침에 비쩍 마르고 갈라진 엘레나의 입술 사이로 피식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여간, 가진 거라곤 혈통 덕에 얻은 바람의 마법 하나뿐인 멍청한 새끼 같으니.
한때 자신의 남동생이었고, 주군이었으며, 또 유일한 구원이었던 남자의 허세 가득한 도발에 엘레나는 차가운 비웃음을 흘리며 앞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드넓은 구릉을 뒤덮은 수많은 병사 중 누구도 그의 기세등등한 목소리를 듣고 겁내지 않았다.
“이게, 마녀라고.”
낮고 단단한 울림이었다.
마법을 써 인위적으로 확성한 것이 아닌, 그 자체만으로 모든 사람의 심장을 움켜쥐고 흔드는 듯 강인한 목소리.
엘레나는 피딱지가 잔뜩 눌어붙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들어 그 목소리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끝도 보이지 않는 대군의 선두. 까만 투구를 쓴 채 거대한 흑마에 올라탄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
투구 사이로 드러난 보랏빛 눈동자가 엘레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훑었다.
신발이 없어 훤히 드러난, 발톱이 다 빠지고 끝이 뭉개진 발끝. 빈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꼼꼼하게 인두로 지져진 살갗과 모조리 부러져 뒤틀린 채로 간신히 이 빠진 검의 손잡이를 부여잡은 손가락.
그리고…….
눈알이 뽑혀 나간 듯 움푹 들어가 검붉게 굳어 버린 한쪽 눈과 잔뜩 부은 눈꺼풀 사이로 숨어 버린 남은 한쪽 눈동자. 얼굴 뼈 곳곳이 부서지고 내려앉은 듯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까지.
칼날처럼 서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이 지나는 곳마다 마치 베이기라도 할 듯 서늘한 한기가 타고 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품평이라도 하듯 천천히 엘레나를 훑어본 남자가 이내 천천히 고삐를 당겨 말을 움직였다.
“어? 전하! 설마 저들의 요구에 따르실 건 아니죠? 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부관의 목소리에도 사내는 거침없이 말을 몰아 엘레나 앞에 섰다.
스르릉, 맑은 소리를 내며 뽑혀 나온 검 위로 정오의 햇살이 쏟아져 눈 부신 빛을 뿌렸다.
‘끝이라고? 정말 이렇게?’
황당했다. 억울했다.
아시타 여신이 지금 눈앞에 있다면 그 멱살이라도 틀어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고르고 골라 최악의 운명만 모아 나를 만든 거냐고.
아득하게 가파른 절벽을 아등바등 기어올라야 하고, 겨우 다다랐다 싶으면 가장 낮은 곳으로 패대기쳐지기를 수없이 반복하게 만드는 악취미적인 운명.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가져 본 적 없이, 평생을 누군가의 그림자로만 살아야 했던 음습하고 비루한 인생.
자신을 죽이러 다가오는 칼날조차 기껍게 느껴질 만큼 인색하고 비참한 삶.
의지했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끝내는 육체마저 지독한 고문에 유린당하는 동안 여신은 엘레나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었다.
칼을 든 채 엘레나 앞에 말을 세운 남자가 이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대가 아스티아 제국을 혼란에 빠뜨렸나?”
글쎄. 나는 몰라. 근데 쟤들이 그렇다던데?
대꾸하려 벙긋 입을 열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못했다. 말할 때 필요한 혀는 이미 잘려 나간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지독한 제국 놈들.”
열린 입 속에서 엉망으로 잘려 나간 혀를 본 건지,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남자가 훌쩍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렸다.
까만 투구, 그리고 그와 똑같이 까만 밤처럼 어두운 빛깔의 갑옷을 두른 남자의 모습을 보자 엘레나는 마치 그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사신처럼 느껴졌다.
“잘했어. 상을 주지.”
남자의 손이 피와 오물이 섞여 엉망으로 뒤엉킨 엘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장의 한가운데, 바늘 같은 살기로 뒤덮인 이 공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으.”
이상한 일이었다.
엘레나는 그의 손길에서 평생을 바랐던, 하지만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던 다정한 칭찬과 인정을 느꼈다.
이 말 한번 들어 보자고 평생을 아등바등 살았는데. 이제 와서, 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온 이교도의 왕에게서 듣다니.
허탈함과 황당함, 벅차오르는 먹먹함이 뒤섞여 엘레나의 하나 남은 눈동자에 눈물로 차올랐다.
피가 섞인 붉은 눈물을 담담하게 손가락 끝으로 닦아 준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겠다.”
아아……. 이 얼마나 달콤한 보상인가.
엘레나는 낮게 웃으며 쥐고 있던 이 빠진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조롱처럼 저들이 억지로 쥐여 준 이 빠진 검을 내던진 순간, 엘레나는 자신을 옥죄던 모든 의무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위대한 아스티아 제국은 개뿔.
아시타 여신의 지엄한 율법? 염병하네.
그래. 이렇게 너희를 마음껏 욕할 수만 있다면 그깟 마녀, 얼마든지 돼 주지.
지옥 끝에서도 나는 원령이 되어 너희의 매일을 저주하고 또 저주할 것이다.
엘레나가 부들부들 떨리는 가운뎃손가락을 힘껏 뻗어 하늘을 향해 들어 보였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짜릿한 배덕감이 꽤 나쁘지 않았다.
참고 또 참고. 언제나 남의 잣대에 맞춰 억눌러 오기만 했던 삶에 난생처음 느껴 보는 해방감이었다.
‘이왕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냥 내키는 대로 살 것을. 눈치 보지 않고, 나를 감추지도 말고.’
뒤늦은 후회가 들끓었다.
학대와 멸시만 받았던 가문에서 내쳐진 후, 유일하게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줬던 황태자 막시밀리안.
그의 신뢰와 사랑을 얻기 위해 기꺼이 신분과 얼굴을 감추고, 그가 시키는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그림자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황태자비 바실리아를 성녀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 모든 일들이 언젠가는 인정받고, 자신도 당당하게 세상에 나갈 수 있게 되리라 믿으면서.
하지만 결국 난생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갖게 된 ‘내 것’은 ‘마녀’라는 기가 찬 오명뿐이었다.
허무한 웃음을 흘린 엘레나가 이내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모든 걸 포기한 채 처형을 기다리듯 목을 길게 뺀 자세였다.
하지만 그 굽어진 등에서 풍겨 나오는 기세만큼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흉흉하고 형형했다.
‘아시타 여신이여, 당신에게 정말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 엘레나는 또 한 번 덧없이 여신의 이름에 대고 소망을 빌었다.
‘절대 나의 이 원통함을 잊지 말아야 할 거야.’
남자가 높게 치켜든 검신에 반사된 빛이 또 한 번 반짝, 잘게 부서졌다.
그 황홀한 안식의 빛을 똑바로 마주 본 엘레나가 눈을 부릅떴다. 그 속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눈빛이 마치 잘 벼려진 검처럼 날카로웠다.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베어 죽일 수 있을 만큼.
‘만약 당신이 마지막까지 나를 외면한다면.’
휘익-.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하얗게 드러난 엘레나의 목덜미로 향하는 소리였다.
서늘한 검날이 피부에 닿는 순간, 엘레나는 질끈 입술을 짓씹었다. 공포 때문이 아닌 끓어오르는 증오와 원통함의 발현이었다.
‘그땐 내가 원귀가 되어서라도 그 연놈들부터 당신까지 모두, 철저하게 짓밟아 버릴 거니까.’
제국의 서남부를 지키는 세르베니아 공작가의 장녀. 하지만 이제는 이교도의 마녀가 되어 버린 여인, 엘레나 이나바흐 헤센 세르베니아.
고작 25년 만에 막을 내린 그녀의 이야기는 이렇게나 처절한 배드 엔딩이었다.
* * *
그렇다.
그렇게 엔딩을 맞았어야 했는데…….
“공녀님, 일어나셨어요?”
익숙한 듯 낯선 시녀의 목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오늘도 설마설마했지만 역시나 똑같은 풍경이 엘레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죽기 전 주마등을 삼 일 동안이나 볼 리는 없고.”
“네?”
“아냐. 세숫물이나 준비하렴. 꾸물대지 말고.”
침대 옆에서 뭉그적대다 난데없는 쓴소리를 들은 시녀, 린다는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며 도망치듯 욕실로 종종걸음 쳤다.
요 며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공녀님에게 된통 당했던 일을 뒤늦게 떠올린 것 같았다.
“그럼 이게 진짜라는 거네. 꿈도 아니고, 주마등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승도 아닌 거 같고.”
이교도의 왕에게 목이 달아난 후 눈을 떴을 때.
그래. 분명 몸통과 분리되었어야 할 자신의 머리가 여전히 그 자리에 멀쩡히 붙어 있는 걸 확인했을 때 말이다.
엘레나는 당연히 이게 죽기 전에 보는 환상이거나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당히 이 시간이 지나고 얼른 저승으로나 가길 바랐다.
즐겁지도 않았던 인생 따위 이제 와서 다시 본들 뭐가 달라질까. 그저 얼른 죽어서 바라던 대로 아시타 여신의 멱살이나 잡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로 벌써 삼 일째.
엘레나의 시간은 이어지고 있었다.
“……미치겠네, 진짜.”
그것도 스무 살을 앞둔 봄, 엘레나의 인생이 완전히 꼬여 버린 세례식을 앞둔 시점부터 말이다.
“네 복수는 네가 알아서 해라 이거야?”
이게 기도에 대한 응답이란 말인가. 정말이지 기도 안 찼다.
기가 막힌 여신의 안배에 엘레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 햇살을 받은 보랏빛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래, 나도 바라던 바야.”
끝이 났어야 할 자신의 이야기가 정말로 다시 시작된 것이라면…….
이번 이야기의 장르는 자신이 직접 정할 것이다.
다름 아닌 아주 처절하고 통쾌한 복수극으로.
“세숫물 준비했어요, 공녀님.”
린다가 쭈뼛대며 세숫물을 대령하자, 엘레나는 얼굴을 씻으며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먹은 이상 우선은 지금의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오늘이 제국력 몇 년 몇 월 며칠이지?”
“예?”
옆에서 수건을 든 채로 기다리던 린다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치켜떴다. 여전히 버리지 못한 무례한 모습을 보며 엘레나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내가 널 더 가르쳐야 하니? 요 며칠간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아?”
“아, 아뇨. 아닙니다, 공녀님. 오늘은 340년 3월 4일입니다.”
“무슨 요일?”
“일요일입니다, 공녀님.”
제국력 340년.
몇 번을 확인해도 대답은 같았다. 벌써 며칠째 날짜를 확인하는 주인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린다의 시선을 무시하며 엘레나는 얼굴을 가볍게 닦았다.
바싹 긴장한 린다의 손길을 따라 태연하게 몸단장을 하면서도 엘레나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