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이 남자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문제지.’
비 오는 날에도 예외 없이 차분히 내려앉은 갈색 머리카락, 목 끝까지 채운 단추와 주름 하나 없는 빳빳한 셔츠, 눈을 깜빡인 그 찰나에만 볼 수 있는 옅은 속쌍꺼풀, 초조할 때면 일정한 간격으로 검지를 까딱이는 오래된 습관 같은 것들.
내게서 멀어진 지 오래지만, 여전히 익숙하다. 아니, 익숙한 걸 넘어서…….
‘애틋해.’
첫 만남의 산뜻함은 노란색, 서로의 슬픔을 알아주던 안정감은 파란색, 같은 마음이란 걸 확인했을 때의 설렘은 분홍색, 첫 키스의 뜨거움은 붉은색. 마음이 온통 새까매질 정도로 덧칠해 온 수년의 애정이다.
새까만 마음 위로 실낱같은 균열이 메울 수 없는 새하얀 틈을 만들어 버렸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완전히 지워져 버린 것은 아니다.
‘역시 난 아직…….’
하지만 조금의 그리움도 내보이지 않게, 부러 목소리를 더 날카롭게 다듬는다.
“뭐야?”
카마리아의 물음에 테오도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커피 향과 어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놀랐어?”
“넌 태연하네? 다 알고 나온 사람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이 있는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카마리아와 달리, 테오도르는 언제나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당황한 기색조차 없는 테오도르의 그 표정은 역시나 카마리아를 자극했다.
카마리아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 최대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의자에 딱 붙은 등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그저 더 이상 좁혀질 수 없는 그 몇 뼘의 거리를 가만히 실감할 뿐이었다.
“약혼 상대가 나라는 거, 넌 알고 있었지?”
“……어.”
카마리아는 더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테오도르의 저의가 무엇이든 카마리아에겐 우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곳에 더 있다간 애써 감춘 속마음까지 보여 주고 말 것이다.
“네가 나를 또 기만하는구나.”
“아냐, 카마리아! 난…….”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카마리아의 움직임을 멈춘 건, 그녀보다 더 다급해 보이는 테오도르의 목소리였다.
“난 너와의 오해를 풀고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나왔어.”
“……오해?”
“그래. 아카데미 졸업 무도회,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네가 나에게 실망했다는 거 알아.”
아카데미 졸업 무도회.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구 하나 입에 담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테오도르의 입에서 먼저 그 얘기가 나오리라곤 카마리아도 예상하지 못했다.
카마리아가 머뭇거리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테오도르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땐 사정이 있었어. 앞으로 천천히 얘기할게, 나한테 기회를 줘.”
카마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해, 듣고 싶지 않아.”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는 감동이 없다. 이제 와 테오도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가 바뀌지도 상처가 사라지지도 않는다. 설령 상처가 아문다고 한들 상처가 생겼다는 사실과 그때 느낀 고통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
그렇게 아프고도 테오도르를 온전히 미워하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미워할 수 없는 이유가 갑자기 생겨 버리기라도 한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테오도르가 카마리아의 시선을 따라 몸을 기울였다. 눈만 마주쳐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단 한 번의 눈 맞춤도 어렵다니.
“변명 같은 건 필요 없어.”
카마리아는 작은 틈 하나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단호하고 냉담했다.
“같은 상황이 온다면 똑같이 행동할 텐데. 내가 뭘 믿고?”
“아냐. 아니, 네가 그런 생각 하게 만든 것도 내 잘못이야. 그렇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이 그때와 같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나 너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 아니야.”
테오도르에게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
“난 이 약혼을…….”
동의하지 않겠다고,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하는데.
카마리아는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거짓뿐이라 하더라도, 카마리아에겐 이 약혼을 성사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으니까.
모든 건 그날로부터 시작되었다.
***
로시난테 공작가.
카탈리 제국의 개국공신으로, 오랜 시간 제국의 무역에서 큰 성과를 보이며 직위에 걸맞은 명성을 펼쳐 왔다.
수년 전 제국을 뒤흔든 큰 사건의 주인공으로,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온 역사가 무너지나 싶었지만, 멈칫하나 싶다가도 금세 돌부리 하나 없는 성공 가도를 질주하며 지금까지는 건재함을 보여 주고 있다.
“저, 결혼할게요!”
음, 아직까지는.
“뭐?”
“하려고요, 결혼.”
여기 당당히 결혼을 선언한 소녀의 이름은 캐서린 로시난테.
어엿한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로시난테 공작가의 귀여운 막내이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햇살 같은 존재다.
찬란한 금발, 초록빛을 띠는 검은 눈동자, 말갛게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면 누구든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씨는 나긋나긋하고 마음씨마저 고우니, 한 성깔 한다는 로시난테 공녀들마저 캐서린 일이라면 껌뻑 죽는다는 것이다. 아버지인 로시난테 공작은 말할 것도 없다.
“음……. 캐서린? 너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게 바로 어제 아니더냐.”
캐서린은 실없는 장난이나 할 아이가 아니다. 그렇기에 공작은 지금 상황을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맞아요, 아버지. 아카데미 가기 전부터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로는 방학 때도 만나 왔고요.”
캐서린이 가슴에 손까지 얹고 결의에 찬 얼굴로 한 글자 한 글자 꾹 눌러 말했다.
“뭐야? 그래서 상대가 누군데?”
공작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냉수 한 잔, 단추 한 개, 숨 한 모금 정도로는 진정 효과를 내기 어려워 보인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있겠냐만, 로시난테 공작에게 캐서린은 깨문 자국이 조금 더 오래 남는 손가락이었다.
참다 참다 잔소리라도 한마디 하면 역으로 두 마디 세 마디 화를 내거나 아예 귓등으로 듣는 나머지 세 딸과 달리, 캐서린은 애초에 잔소리할 일을 만들지도 않을뿐더러 어쩌다 꾸중을 들으면 하루 종일 상심해 있을 정도로 순진하고 여렸기 때문이다.
“아버지, 전 연인 사이는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집안, 재산, 지위를 막론하고요.”
그냥 상대가 누군지 말하면 될 것을 이렇게 뜸 들이는 걸 보니, 어디서 이상한 남자에게 속아 넘어간 건 아닌지 불안하기만 하다.
캐서린은 입학도 어렵다는 제국의 최고 명문 카탈리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까지 한 수재 중 수재인데, 이런 면에서는 또 영민하지 못한 것 같다.
아카데미로 보낼 때 가장 걱정했던 것이 남자 문제였으니, 어떻게 보면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도 그랬듯 아카데미에서 연인을 만들어 오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나? 어떤 놈이야?
“그래서 누구냐. 누군지 들어 보기나 하자.”
공작의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캐서린은 침착하게 입을 뗐다.
“더스틴 백작가의…….”
더스틴? 생각보다 괜찮은 가문이 나오자, 로시난테 공작은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더스틴 백작가는 명예로운 기사 가문이니,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거라 믿으니까. 사람을 믿는다기보다 그들이 오랜 시간 지켜 온 기사도 정신을 믿는 것이다.
더스틴 백작가, 그 정도면 상당히 좋은 조건이다. 상대는 기사 가문이니 로시난테 가문의 군사력도 올라갈 것이고, 캐서린 역시 기사를 남편으로 둔다면 위험에 빠질 일도 없을 것이다. 로시난테 공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상상을 이어 갔다.
첫째인가? 아니면 둘째?
첫째와는 나이 차이가 좀 나는데. 약혼식을 먼저 해야 하나? 결혼 얘기는 아직 이르긴 하지.
근데 어쩌다 둘이 그렇게 된 거야? 황태자 추도식이 끝나면 더스틴 백작과 만나 봐야겠군.
자식을 낳으면 기사로 키우려나? 이름은 뭐라고 짓지? 캐서린을 닮았으면 황궁에서 일하거나 가문의 경영을 배워도 좋은데.
아니 일단 막내인 캐서린이 가장 먼저 결혼하는 것은 제국법상 불가하니까 일단…….
“아버지? 듣고 계세요?”
“……어, 그래. 그래서 첫째랑 둘째 중에 누구냐.”
“……둘 다 아니에요.”
“……뭐?”
“더스틴 백작가의…….”
“……?”
“정원사요.”
***
커다란 우편 마차가 로시난테 저택의 정원을 막 벗어난 참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카마리아가 창밖의 우편 마차를 확인하곤 걸음을 멈췄다.
다가오는 우편 마차 바퀴 소리에도 가슴 설레던 날이 있었지만, 이젠 반복되는 일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럼에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아리는 건 어쩔 수 없는지,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카마리아는 발길을 돌려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주인에 따라 편지들을 분류하던 집사가 카마리아를 향해 말을 걸었다.
“공녀님, 편지가 왔습니다.”
카마리아는 꽤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집사의 행동이 의아했다. 날마다 받는 게 편지이니만큼 집사는 항상 보고 없이 편지를 모아 서재 책상에 올려다 두기 때문이었다.
카마리아가 어렸을 때부터 로시난테 공작저에서 일한 사람이니 이런 사소한 걸 헷갈렸을 리도 없는데.
“……서재에 올려 두라고 했을 텐데.”
“그게······.”
감히 주인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해도 될지 망설이는 듯, 집사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조심히 입을 열었다.
“빈센트 공작저에서 온 편지입니다. 공녀님 앞으로요.”
아버지가 아니라 내 앞으로?
발신인을 알아챈 카마리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집사가 편지를 건네려 하자, 카마리아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됐네.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굳이 언급하는 이유가 뭐야?”
심란해진 마음은 말투에서부터 티가 났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노련한 집사답게 그는 바로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산책이라도 하고 온 건지 막 저택 문을 열고 들어온 비앙카가 이를 보고 당황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카마리아는 지겹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돌아섰다. 남들이 보기엔 이 정도로 짜증이 날 일인가 싶겠지만 적어도 카마리아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 지긋지긋한 고통을 이겨 내고 지금과 같은 잔잔한 일상을 보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야 그 이름을 들어도 어느 정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는데, 괜히 주변에서 의식하고 흔들면 괜스레 마음이 동하지 않나. 제발 다들 모르는 척 좀 해 달라고.
카마리아가 걸음을 빨리했다. 일 얘기라도 하며 머릿속을 비워야겠다.
“나가!”
그 순간, 카마리아는 서재 안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고함에 깜짝 놀라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원체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아버지인데, 이렇게 복도 끝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치시다니.
다행히 막 모퉁이를 돌았던 카마리아에게만 들렸는지, 뒤돌아 확인한 사용인들의 표정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온했다. 아니, 들었다 한들 으레 그렇듯이 저나 비앙카에게 한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카마리아는 지나가던 시녀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서재에 아버지 손님이 오셨나?”
“아뇨, 공작님께서 캐서린 공녀님을 부르셨습니다.”
“……뭐라고?”
그러면 지금 우리 캐서린한테 저렇게 소리를 질렀다는 거야?
카마리아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재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카마리아가 문 앞에 귀를 바짝 대고 서재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엿듣는 게 아니라 그냥 문 앞에 서 있는 거야. 소리가 내 귀로 온 거지. 그렇고말고.’
당장이라도 쫓아 들어가서 말려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조금 기다려 봐도 캐서린의 목소리만 미약하게 들린다. 더 이상의 고성은 없는 듯하다. 그게 좋은 일이긴 하지만 어째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냥 들어가?’
어차피 캐서린이라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솔직하게 말해 줄 텐데, 여기서 이러고 있자니 모양 빠지는 일을 자초하는 것만 같다. 카마리아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서재의 문은 금방 열렸다.
“……카마리아 언니?”
“카마리아?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몇 걸음 떨어져 있길 다행이라 생각하며, 카마리아는 태연히 대답했다.
“아버지 고함 소리가 복도까지 들려요. 무슨 일이에요?”
카마리아는 자연스럽게 서재 안으로 들어오며 공작을 향해 옆구리에 끼워 넣었던 서류를 들어 보였다. 그 바람에 캐서린도 나가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다시 카마리아의 옆에 섰다.
“쯧!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긴요. 캐서린, 무슨 일이야?”
그렇게 소리를 질러 놓고 별일이 아니라니. 미간을 찌푸린 카마리아가 캐서린을 돌아봤다.
“나 결혼하려고.”
“……뭐?”
“아, 별일 아니라니까! 그냥 애들 장난이지. 들을 필요도 없다. 사춘기가 지금 온 것도 아니고, 거참.”
공작은 고개를 내저으며 카마리아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받아 들었다.
이제 이성이 좀 돌아온다. 어릴 때부터 말썽 한번 안 피우고 얌전하게 컸으니, 한 번쯤 이런 일탈을 할 수도 있지. 순간 당황해 큰소리쳤던 게 민망할 정도다.
그래, 카마리아처럼 말없이 가출한 것도 아니고, 비앙카처럼 외부 활동은 다 거부하고 방 안에 틀어박힌 것도 아니고, 포이베처럼 온 세상 사람 다 투명 인간 취급해 뒷수습에 애쓰게 한 것도 아니고. 첫 연인과 결혼하겠다는 결심은 애교 수준 아닌가.
“장난으로 가볍게 하는 말 아니에요. 언니, 나 진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