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러브 버그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수빈의 손을 꼭 잡고서는 해온은 수빈의 집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더 이러고 있다가는 분명 아파트 주민과 어색하게 마주치고야 말테니까.
아직까지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것도 용했다.
해온은 아직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를 않는 건지, 조금 비척거리며 수빈에게 끌려갔다.
아기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 거대한 아기를 소파에 앉혀 놓고서 수빈은 곧장 따뜻한 물을 따라 건네주었다.
얼마나 저 바닥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지금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몇 시간을 있었든, 몇십 분을 있었든, 전부 다 문제였다. 문제.
“형, 옆에 앉아요.”
물컵을 다시 가져다 놓으려던 것뿐이었는데, 해온은 자기를 두고 어디에도 가지 말라는 듯 수빈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제까지는 계속 소매나 겨우 붙잡았었는데. 손이라니. 먼저 손을 잡았다니.
장족의 발전이다, 라는 생각이 순간 들기도 하였으나. 하긴, 입술도 부딪히고 혀도……섞어 본 사이에 뭔들 못 하겠는가.
가벼운 사이도 아니고,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그리 말하는 사인데.
“물컵만, 가져다 놓으려고 했는데. 가지 말까?”
“……물컵, 가져다 놓아야……죠.”
그제야 조금 민망한 듯 꽉 잡았던 손을 놓고서, 해온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키스 한 번 진하게 하고 뽀뽀 몇 번 했다고 그새 부어 버린 것 같은 해온의 입술을 수빈은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서는 컵을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해온이 급한 마음에 꽉 붙잡았던 손의 끝부분에 고스란히 붉은 자국이 남아 버렸다. 정작 수빈은 아픈 줄도 모르고, 그냥 발전했구나 생각했는데.
혹여나 또 해온이 미안해하고 사과하고, 그렇게 굴까 싶어 수빈은 자국을 없애려 다른 쪽 손으로 대충 벅벅 문질러 댔다.
선명히 남은 손자국의 경계가 그나마 흐려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붉은 기는 사라지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빈은 소매를 끝까지 내려 손을 최대한 감추었다. 지금처럼 이제 막 시작인 순간, 이런 사소한 걸로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거실로 향한 수빈이 마주한 것은 멍하니 앉아 수빈이 손가락으로 누른 곳을 제 손으로 살살 만지고 있는 해온이었다. 어쩐지 조금 멍한 표정을 짓고서 해온은 헤실거리고 있었다.
바보 같았다.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바보 같았다.
어쩌다 자신이 저 바보 같은, 하지만 아주 귀여운, 여섯 살이나 어린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하늘에 있을 조상님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만약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신마저도.
“아팠던 건 이제 다 괜찮은 거 맞아?”
사실 만나자마자 한 번 확인해 봤어야 하는 거였는데. 어쩌다 보니 조금 늦어졌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확인은 해 봐야겠다 싶어 수빈은 조심스레 해온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고전적인 방법이기는 했으나, 나름대로 정확한 방법 중 하나였는데.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휘몰아친 고백과 온갖 스킨십 덕분에 수빈도 해온도 정상적인 체온보다는 체온이 꽤 높아져 있었으니.
이대로 열을 재 봤자 수빈이나 해온이나 둘 다 분명 최소한 미열은 나올 것이 뻔했다.
“네, 괜찮아요. 그냥 잠시 아팠던 거고, 아니 아팠던 것도 아니었는데요.”
“병원에서 괜찮다고 그랬어?”
“…….”
그래도 병원 정도는 다녀왔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전혀 아니었던 모양인지 해온은 자연스레 시선을 피했다.
어제저녁에는 분명 그렇게 하겠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확하게 네, 라고 대답하지 않은 이유가 아무래도 여기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집 앞에 뒀던 약은, 챙겨 먹었어?”
“네.”
병원 갔냐는 말에는 시선을 피하더니 약을 먹었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열정적으로 끄덕여 주기까지.
“약은 먹고, 병원은 안 가고?”
“약 먹고도 아프면 가려고 했는데요, 하나도 안 아파서요. 형이 사랑을 담아줘서 그랬나 봐요.”
사랑은 무슨 사랑인가. 그런 낭만적인 마음 따위 약에 넣을 생각도 없었고, 애초에 들어가지도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그때는 좋아한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땐데 들어갈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내 사랑이 느껴져서 안 아파진 거야?”
“네, 완전.”
살면서 들어본 말 중에 가장 말도 안 되는 말 중 하나였다. 사랑을 하는 건 하는 거고, 아픈 건 아픈 거였다.
해온은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수빈을 바라보았다.
아픈 것마저 왜 숨기려는지는 도통 모르겠으나, 이럴 땐 그냥 바로 병원에 가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오늘은 글렀고. 내일 하는 곳이 있으려나.’
“내일 아침에, 아침에 그건 다시 확인하고요. 지금은 저한테 그냥 온전히 집중해 주시면 안 돼요, 형?”
지금 자신한테 온전히 집중해 달라고?
그럼 지금 수빈이 말하고 있는 사람이 해온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다른 누군가가 아픈 것도 아니고 본인이 아픈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뿐이었는데.
해온이 설마 자기 자신한테 붙어 있는 질병에도 질투를 하는 미친놈일 것이라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한 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수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웬만해서는 해온의 말은 다 해석할 수 있다고 자부했건만 전부 착각이었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수빈은 손은 아주 자연스럽게 해온의 손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이상한 놈이라는 걸 모르고 좋아하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아무렴 어떤가.
“……그럼 병원은 아침에 다시 생각해 보자.”
“네, 내일 아침에 아프면 진짜 갈게요.”
지금이라도 확답을 들었으니 되었다. 그래, 내일도 아프면 정말 병원에 가기로 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저 아픈 건, 어떻게 알았어요?”
“사람 시켜서도 물어보고, 사장님한테도 직접 물어보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빈은 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제 사귀기까지 하는 사이인데, 이런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었다.
뭐 부끄러워할 문제도 아니고. 아니, 애초에 문제인 행동이 아니니까.
“……사람을 시켰어요?”
“응, 진영 씨한테 너 상태 좀 확인해 달라고 했지.”
직접 가는 건 영 아닌 것 같고 숨어서 보자니 어쩐지 잘 보이질 않아서. 무슨 스파이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사람까지 시켜 댈 줄이야.
“이제는 안 그래도 되니까, 조만간 밥 한 끼 사야겠네.”
진영은 힘들기는커녕 어딘가 조금 신나 보이기까지는 했고, 지금까지 그가 쓴 커피값도 다 수빈이 내주었지만. 어찌 되었든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본인도 모르는 새에 오작교가 되어 준 셈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해 줄 수 없겠지만, 밥 한 끼 정도는 사주는 게 도리일 것 같았다.
“그 눈 올라간 남자요?”
“응, 그 사람.”
“……아.”
해온은 누군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해온이라고 한들, 진영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놓고 물어봤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수빈이 봐온 진영의 성격상 분명 해온에게 최소한 두 번은 말을 걸었을 테고, 해온도 그렇게 말을 걸어 오는 남자 손님은 처음이었을 테니.
“밥 사 주지 마세요.”
“어?”
“……좀 유치한 거 아는데요, 그냥 밥 사 주지 마세요. 아니, 단둘이 밥 먹지 마세요.”
“……진영 씨 게이 아니야.”
“저도 원래는 게이 아니었어요. 형도 게이 아니었고.”
“해온아.”
“아니면 셋이 가요. 저도 형이랑 다시 잘 지낼 수 있게 해 준 거 고맙다고 하면서 같이 가면 되는 거죠.”
그래, 해온이라면 이렇게 나오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진영은, 진영 씨는 진짜 단순한 직장 동료일 뿐인데. 아니 애초에, 그런 쪽으로 관계가 진전될 리도 없었고.
해온과는 아주 많이 다른 경우인데. 뭐가 저렇게 싫은 건지.
“……억지인 건, 알지?”
같이 가자고, 그렇게 말해 놓고서는 먼저 눈을 피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본인도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한 말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인지.
“……그럼, 그럼 진짜 점심만 같이 먹어요.”
“응, 그럴게.”
“카페에 앉아서 2차니 뭐니 즐기지도 말고요, 분위기 좋은 맛집이니 뭐 그런 곳에서 점심 먹지도 말고요.”
해온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애초에 그런 곳은 해온과 가 보기만 했지, 원래의 수빈이었다면 갈 생각도 하지 않을 곳들이었다.
해온이 하고 있는 걱정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쓸데없는 걱정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였다.
“안 가. 안 그럴게.”
“방금 한 말 다시는 무르면 안 되는 거 알죠?”
“무슨 말?”
진영과 점심 먹는 자리가 아닌 곳에서 단둘이 안 만나겠다는 말? 카페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말? 한순간에 뱉은 말들이 워낙 많아 해온이 말하는 게 대체 어떤 건지, 바보처럼 수빈은 되묻고야 말았다.
“저랑, 저랑 만나겠다는 말이요.”
아, 그 많고 많은 말들 중 가장 처음 했던 말이었구나.
이미 할 거 다 한 마당에, 무를 일이 있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닌가.
“응,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어디서 저런 말도 안 되는 불안을 달고 왔는가 싶다가도, 가만 생각해 보면 저렇게 말할 법도 했다.
키스까지 한 마당에 고백을 대차게 거절했던 과거도 비교적 최근에 있긴 있었으니까.
“……뽀뽀할래?”
“네에…….”
그래도 한 번쯤은 아니요, 하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해온은 슬그머니 수빈에게로 다가와 곧바로 입술을 내밀었다.
바보 같은 자신의 애인을 보고 기가 차다는 듯 짧은 웃음을 내뱉은 수빈은 그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쪽, 소리가 선명히 들리게 입 맞춰 주었다.
내일이나 모레는 정말 붕어가 되어서 지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며.
* * *
그냥 친구인 사이에도 같은 집에 머무는 게 그리도 어색하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그냥 친구도 아닌 사이에, 다른 침대를 쓰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같은 침대에서.
뽀뽀나 쪽쪽거리던 게 분명 아까 전의 일이었는데 어쩌다 이 상황이 벌어진 건지에 대해 생각하며 수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쁜 의미의 한숨은 전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싫다기보다는, 좋은 쪽에 가까웠고.
정말 입술이 팅팅 부어 버릴 만큼 그렇게 무식하게 입술을 맞부딪혀 오던 해온은 스무 번이 넘어가고도, 5분이 넘게 그렇게 바보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나서야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몸을 떨어뜨렸다.
어쩌다 보니 바짝 붙어 있던 두 사람의 몸이 떨어지며 후끈하던 공기도 재빠르게 흩어져 버렸다.
“형, 집에 가게요?”
가기야 갈 거지만, 아직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이제는 부끄러워하거나 머뭇거리는 모습 하나 없이 수빈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해온은 슬쩍 미소 지었다.
“오늘 자고 가면 좋겠는데.”
“……오늘?”
이제 막 사귀자고 서로 마음을 확인한 마당에, 설마 벌써부터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싶어 그냥 자고 가자 싶다가도 문득 역시 이건 좀 아니지, 하는 이성이 수빈을 꽉 붙잡았다.
전과는 정말 달랐다.
서로를 대하는 태도나, 마음이나 뭐 다른 무엇이든. 해온은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라고는 브레이크가 약간 고장 났다는 점 외에는 다 같았지만, 수빈은 특히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수빈이 걱정하는 건 해온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수빈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진 자신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오늘이 오기 전에는 해온에게 어느 정도 이성을 부여할 수 있는 쪽이었다고 하지만, 아까 전의 그 힘겨운 뽀뽀를 가만히 받아낸 것처럼 이제는 통제고 뭐고 모든 것들을 전부 쉽게 받아들일지도 몰랐다.
그건 싫었다. 그건 아니었다.
지금의 이 갓 타오르기 시작한 마음으로 충동적인 어떠한 짓도 할 마음은 없었다.
“오늘이 꿈이 아닌 걸 확인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내일 아침에 형이 우리 집에서 눈 떴으면 좋겠어요.”
“꿈 아닌 거 다 확인했잖아. 그래도?”
“저 어제까지만 해도 꿈에서 형이 안아주고 뽀뽀해 주는데 몇 번을 그러고 있어도 현실인 줄만 알았어요.”
“…….”
“거짓말 아니고 진짜로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눈 떴을 때 형이 제 눈앞에 있으면, 그러면 진짜 꿈 아닌 거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
“세상에는 진짜 엄청 긴 꿈도 있는 거잖아요. 근데 눈 감았다 떴는데, 시간 지나 있고 형 눈앞에 있고 하면 그건 진짜인 게 확실한 거니까.”
해온의 말들은 한 마디 한 마디 전부 수빈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수빈의 선택지는 이제 오직 하나였다. 그래, 알았어. 이 대답 하나.
아픈 와중에도 꿈속에서 수빈을 보았단다. 정확히 왜 아팠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 이유에는 수빈도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