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물질은 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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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물질은 나였다 1
목차
1.
2.
3.
4.
5.
이물질은 나였다 1
1.



“휴우…….”
나는 몇 번짼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렸다.
오동통한 손가락과 짧뚱한 팔다리, 보송보송한 피부. 그에 비해 잘 먹지 못해 홀쭉한 배와 부스스한 머리칼.
믿기지 않았다.
‘회귀라니. 5살로 회귀했다니……!’
아니, 어쩌면 빙의라고 해야 할까.
나는 우울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신전을 떠나기 전. 그러니까 8살 때까지 썼던 좁고, 허름한 방을 보니 더욱 기가 찼다.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이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읏차!”
이 상황이 조금도 믿기지 않지만, 이대로 두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꼬르르륵!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타닥!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린 나는 방 한편에 있는 책상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우선 상황부터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모른 채 열과 성을 다해 썼을 글자 연습장 위로 새 종이를 덧댔다. 그리고 단풍잎 같은 손으로 야무지게 연필을 움켜쥐었다.

― 왜 회귀했을까?

종이 위에 한 문장을 끄적이고 나니, 뒤늦게 왈칵 울음이 치솟았다.
왜냐하면, 전생의 나는…….
아주아주 비참하게 죽었으니까.

***

내가 빙의한 이곳, 에레아는 신성 국가였다.
귀족부터 평민까지, 신분을 막론하고 여신을 믿었다. 그만큼 신전의 위엄이 드높았으며, 여러 성인(聖人)들이 일으킨 기적이 역사서를 채웠다.
이런 종교 국가에선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신전의 꽃! 성녀다.
에레아의 역대 성녀들은 특이점이 하나 있었다. 하나같이 신전에서 운영하는 수도의 고아원 출신이라는 점이다. 꼭 성녀가 아니더라도, 고아원의 아이들은 다방면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편이었다. 춤, 그림, 음악, 검술 등등…….
사람들은 그런 고아들을 보며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하곤 했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게 퍽이나 안쓰러웠나 보지. 먹고살 재능 하나 정돈 내려 주게.’
아니꼬운 마음에 여신을 비꽈도 소용없었다. 나도 그 축복을 받은 아이 중 하나였으니까.
치유의 힘.
그것을 지닌 나는, 무려 성녀 후보로 거론됐다. 하지만 ‘후보’에 그친 이유는, 치유의 힘을 가진 아이가 또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나이, 같은 시기에 고아원에 버려진 디아나였다.
어디 높으신 귀족 나리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지닌 디아나는 모두에게 쉽게 사랑받았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평민 출신인 나와는 달랐다.

“선생님! 벨제가 또 때렸어요!”
“벨제! 너 또 식판 뒤엎었니? 자꾸 이러면 원장님이 맴매할 수밖에 없다고 했지!”

매번 사고만 치는 문제아 취급을 받던 나.

“아유, 우리 디아나는 어쩜 이렇게 착하고 똑똑할까.”
“디아나! 나랑 놀자! 벨제 넌 저리루 가! 베에!”

그리고 고아원의 모두가 천사처럼 떠받들던 디아나.
고아라도 다 같은 고아가 아니란 것을, 나는 그 애 때문에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두각을 드러낸 힘마저 같다니…….’
나는 모든 면에서 디아나와 비교당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월등히 달렸다.
똑같이 치유력을 쓸 수 있었지만, 나는 고작 작은 생채기를 낫게 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치유력 외에 가지고 있던 특별한 능력이 사라진 뒤에는 더 볼품없어졌다. 그런 주제에 인성도 거지 같았다.
그에 반해 디아나는 크고 깊은 상처도 단숨에 치료했다. 경전 속에 나오는 역대 위대한 성녀들처럼, 순식간에.
그러던 중 치유의 힘에 대한 소식을 들은 신전에서 우리 둘을 불렀다.

“벨제 자매님과 디아나 자매님은 여신의 성스러운 힘을 지닌 귀한 분들이에요.”
“앞으로 신전에서 열심히 배우고 기도해서, 그 힘을 널리 이롭게 쓰이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알겠지요?”

하지만 신전에서 살게 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디아나는 떠나게 됐다. 그 애를 후원하겠다고 나선 귀족 가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특출난 능력을 지닌 신전의 고아들을 후원했다. 개중 드물게 입양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디아나를 데려간 가문은 바로, 그녀를 고아원에 버렸다는 소문이 돌던 바렐롯테 후작가였다. 이제 와 버린 사생아가 눈에 밟혔던 건지, 아니면 성녀 후보로 거론되던 그녀가 탐이 났던 건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후작과 신전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이뤄졌고, 디아나는 곧바로 후작가로 떠났다.
신전엔 나만 남겨졌다. 아무리 성녀 후보라 불린다 한들, 출신 모를 고아, 게다가 또 다른 후보인 디아나보다 빈약한 힘을 가진 나를 후원하겠다는 가문은 없었다.
분명 그런 줄 알았는데…….

“벨제, 너를 후원하겠다는 분들이 계시는구나.”
“인사해라. 칼리오스 공작 각하와 소공작이시다.”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기적처럼 내 앞에 나타난 젊고 잘생긴 공작. 그리고.
그리고…….

“네가 벨제구나. 혹시 기억나니? 작년에 봉사 활동에서 본 적이 있는데…….”

공작이 내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그 옆에 있는 소공작이란 남자애에게 온통 시선을 빼앗겨 감히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 내가 뭐라 했더라.

“빤짝빤짝…… 예뿌다.”
“이거, 벨제 꺼 할래!”

금빛 눈동자를 손가락질하며 우렁차게 외친 내 말에 당황해서 진땀을 빼는 대신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리던 공작.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 나를 흘겨보던 그 애가…….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그들이 나를 후원하게 된 이유는 나중에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봉사 활동을 하러 왔다가 넘어진 공작의 차남을 내가 치료해 줬다는 이유였다.
안타깝게도, 이후 얼마 안 가 차남은 죽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병을 앓고 있었기에 예정된 일이었다고 한다.
솔직히 공작의 아들을 치료해 준 일 따위, 나는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았다. 고아원에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내게 치료를 해 달라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예에, 공작님. 제가 했어요. 벨제, 치료 잘해요!”

그렇게 내게도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하지만 한껏 부풀어 올랐던 기대와는 달리, 공작가에서도 나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벨제 아가씨가 이번 티파티도 엉망으로 망치고 나왔다며?”
“오죽하면 트리아나 영애가 벨제 아가씨 오는 모임에 자긴 초대하지 말라고 선언했겠어.”
“역시 평민 출신이란…….”

슬프게도, 나는 그 집에서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
나는 번번이 공작가의 애물단지 취급받았다. 그도 모자라.

“그거 들었어? 이번에 디아나 님이 황후 폐하의 상처를 감쪽같이 치료했다던데?!”
“이러다가 진짜 디아나 님이 성녀 되는 거 아니야?”
“대체 벨제 아가씨는 뭘 하는 거야? 공작님이 후원하는 돈만 해도 얼만데!”

그놈의 디아나, 디아나…….
어딜 가도 내 옆엔 디아나가 따라붙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가 행하는 기적에 미칠 수 없었다. 게다가.

“세상에, 저기 봐! 에드윈 도련님과 디아나 님이셔!”
“설마, 두 분이 곧 약혼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진짠가?”
“얼마 전에 시녀장님과도 같이 쇼핑을 가셨다잖아!”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마저 디아나에게 뺏기는 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18살의 생일을 앞두고 질투와 시기에 미쳐 있던 그즈음의 내게, 누군가 접근했다.

“바렐롯테 영애와 소공작의 약혼을 막고 성녀 자리를 꿰차고 싶지 않나?”

황태자의 심복 중 하나였다.

“바렐롯테 후작은 지금 2황자와 손을 잡고 반역을 꾀하고 있다. 황제 폐하를 독살할 계획이지. 이것이 바로 그 증좌다.”

그 남자는 내게 증좌로 바렐롯테 후작과 2황자가 나눈 편지 몇 개를 보여 줬다.

“이걸 어떻게든 바렐롯테 후작의 집에 놓고 와. 그러면 모든 게 네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테니까.”

그리고 함께 건넨 것은 다름 아닌, 독약이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멍청하고 어리석었던 나는 그걸 들고 곧장 바렐롯테 후작가로 향했다. 오랜 친우 디아나를 만나겠다는 명목이었다.

“벨제! 어서 와.”

당연하게도, 상황은 내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