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세레나데>
<작전명 세레나데>
Operation Serenade
목차
1. Pendulum
2. Nuclear fusion
3. Nuclear fission
4. Black hole
5. Orbit
6. Epilogue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기업 및 배경은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기업 및 배경은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1. Pendulum
1. Pendulum
1933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늦은 오후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물리학부 강의실에는 수업이 한창이다. 청강하는 학부생들은 거의 남자였고 여학생은 극소수였다.
나디아는 맨 뒷자리에 홀로 앉은 낯선 남자를 보고 옆자리의 율리아에게 물었다. 그는 아무래도 이 학교의 학생이 아니었다.
“누구야? 맨 뒤에 앉은 저 남자.”
나디아의 낮은 속삭임에 율리아도 슬쩍 뒤를 돌아 남자를 확인했다.
“총장이 초대한 청강생. 미국에서 왔대.”
나디아는 다시 고개를 틀어 남자를 봤다. 가로로 긴 눈이 늘씬하게 빠져 두 눈은 날카로웠다. 그런 눈으로 열정적인 강의를 펼치는 레하르 교수를 무료한 눈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나른한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매서웠다. 미형의 얼굴이었으나 이상적인 비율로 자리 잡은 이목구비가 차가운 인상을 풍겨 위압감이 느껴졌다. 나디아는 남자에게 호기심은 느껴도 호감을 품을 수 없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돌려 와 나디아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었다.
“미국에서 여기까지 수업을 들으러 왔다고?”
“아무래도 물리학은 독일이 최고니까.” 율리아는 저 의문의 미국인이 의심스럽지도 않은 듯했다. 그녀도 다시 뒤를 돌아보고는 나디아에게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까? 양자 역학을 독일어로 알아들을 거 같아?”
나디아는 무료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남자의 모습을 생각하다 쿡 웃어 버렸다. 못 알아들을 게 뻔했다.
“내기할래? 저 미국인이 독일어를 할 줄 아는지.”
율리아가 내기를 제안했고 “그래. 좋아.” 나디아는 승낙했다. 율리아와의 내기에 그녀는 항상 자신 있었다.
“저 남자에게 신이 알테 브뤼케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는지 안 하는지 물어보자.”
나디아는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율리아는 남자를 아주 골탕 먹일 생각이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의 무작위성을 거부하면서 나온 인용구였고, 알테 브뤼케는 하이델베르크의 상징과 같은 카를 테오도르 다리를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말이었다. 영어로 풀이하면 올드 브리지로 이 도시를 방문하는 외지인들은 알테 브뤼케를 테오도르 다리 혹은 올드 브리지로 통상 알았다.
강의가 끝나고 나디아와 율리아도 행동을 개시했다. 총장의 손님은 다행히 수업 중간에 나가지 않았고 어려운 강의를 뒤로하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누가 저 남자에게 말을 걸지 실랑이를 하다 율리아가 떠미는 바람에 결국 나디아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남자의 등 뒤에서 나디아가 그를 불러 세웠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잿빛이 도는 남자의 녹색 눈과 마주치는 순간 나디아는 덜컥 겁부터 났다. 분자의 충돌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밀도 높은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내려다보자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하고 도망가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율리아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그녀는 책을 더 힘주어 안고 남자에게 독일어로 물었다.
남자는 이제 완전히 제 쪽으로 몸을 틀어 정면으로 섰다. 세 계단 위에 서 있긴 했지만,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키가 컸다. 냉랭한 인상에 늘씬한 체형이라 예민해 보였다. 하지만 뼈대는 이상적으로 큰 편이라 남자의 몸은 정말 근사하고 아름다웠다. 꿰뚫어 보는 시선은 거의 부동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샅샅이 탐색하는 듯했다.
아주 짧은 몇 초의 시간이었으나 나디아는 긴 시간 남자에게 수색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남자의 입술이 떨어졌다.
“아인슈타인이라면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할 거 같은데.”
남자는 유창한 독일어는 물론 엉뚱한 질문의 의도까지 간파하고 있었다.
나치당의 히틀러가 총리가 된 이후로 유대인들은 소리 없는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학자들부터 직격타를 맞았다. 아인슈타인이 미국으로 떠난 것도 그 탓이었다. 아인슈타인의 국제구조위원회 사무실은 뉴욕의 브라이언트 파크 맞은편에 있었다.
낭패였다. 나디아와 율리아는 사색이 되었다. 남자를 얕잡아 보다 민망해진 상황이었다.
“미안해요. 놀리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긴장 섞인 정적이 맴돌았다. 남자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유머 감각도 없어 보였다. 입안이 말라 갈 때 남자가 물었다.
“왜 내게 묻지 않는 거지?”
그의 거만한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느냐’ 이 질문을 자신한테도 물으라는 뜻인가? 속이 꽉 막히는 불편함을 느끼며 나디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자신을 느릿하게 죽 훑는 남자의 시선에서 도망가고 싶어 말로 꺼내기 껄끄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당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나요?”
오만한 눈빛을 지우지 않은 그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내기하지. 내가 이기면 나와 알테 브뤼케에서 만나.”
나디아는 당황해서 율리아를 쳐다봤다. 하지만 율리아도 새하얗게 질려 굳어 있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디아는 다급하게 말했다.
“우린 방금 처음 만났어요.”
최대한 남자의 빈정이 상하지 않도록 돌려서 거절했는데도 그는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부터 시작하지.”
“난 당신 이름도 몰라요.”
남자는 선택의 기회마저도 거절하는 여자를 비스름하니 응시했다. 유대인 피가 반이나 섞여 대학에서 쫓겨날 날이 머잖은 여자는 같잖게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계속되는 거절에도 남자는 동요도 없었다. 나디아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다른 누군가가 돕기를 바랐지만, 강의실에는 저와 저 남자 그리고 얼어붙은 율리아밖에 없었다.
남자의 손이 움직이자 나디아는 움찔했다. 그는 그걸 신경도 쓰지 않고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절제된 동작으로 그는 나디아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나디아는 머뭇거리며 남자가 내미는 두꺼운 종이를 받았다.
명함이었다.
클리프 미카엘 R 애서턴.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인 이름이라 생각하다 나디아는 낯설지 않은 이름에 흠칫 놀라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는 차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저주받은 애서턴 형제라고 나디아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맏이는 지난 큰 전쟁으로 죽고 셋째는 독살당했다고 한다. 남자는 형들이 죽은 후 후계 자리를 차지한 그 남자였다. 그의 이복형제가 이탈리아 휴양 도시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그 사건은 멀리 떨어진 하이델베르크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남자는 이상하게 제 이름은 묻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저 남자와 절대 데이트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제겐 결혼을 약속한 이도 있었다.
“앞면, 뒷면?”
남자는 제가 곤란해하는 걸 보며 웃었다. 남자의 미소는 보기 드문 만큼 근사했지만 나디아에게는 그 미소가 소름 끼칠 뿐이었다. 율리아가 말려 주길 바랐지만 율리아는 침묵했다. 남자는 제가 동전의 면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나디아는 다시 한번 자신의 운에 맡기고 남자에게 도전적으로 대답했다.
“앞면.”
“결연한 선택이군.”
남자의 느긋한 말투는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반반의 확률이었고 승패가 확실했다. 나디아는 50%의 확률에 승패를 걸었다.
그리고 남자가 동전을 던졌다. 허공에 뜬 동전은 빙그르르 돌다 중력에 의해 다시 그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 * *
학교 밖에서 나디아를 발견한 기사는 차 문을 열었다. 다소 기운이 없어 보이는 아가씨의 얼굴은 창백했다. 빅토르 씨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나디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며 말을 아꼈다.
차가 출발하고 나디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전은 앞면이 나왔다. 남자는 결정이 난 승부에 딴지를 걸지 않고 그녀를 보내 줬다. 나디아는 율리아의 손목을 잡고 빠르게 강의실에서 도망 나왔다. 강의실에서 멀리 떨어진 교정에서 나디아는 율리아의 손목을 놓았다. 잠깐 사이였는데 손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나디아는 조금 전 율리아와 나눴던 대화를 곰곰이 생각했다.
“정말 다행이지 않아? 뒷면이 나왔으면 정말이지 끔찍했을 거야.”
율리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디아가 그녀의 안색을 살폈을 때 율리아는 고개를 돌리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나디아는 율리아가 기분이 상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그래? 나한테 왜 화났어?”
율리아는 머리카락만 뒤로 넘기며 바로 대답하지 않고 혼자 가 버렸다. 하지만 나디아가 끈질기게 따라붙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넌 항상.” 말을 삼킨 율리아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너한테만 관심이 집중돼.”
말문이 막히는 이유였다. 나디아는 발끈하여 율리아에게 바로 대꾸했다.
“네가 나한테 떠밀었잖아. 그 남자한테 말 걸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솔직하지 그랬어.”
율리아는 잘게 고개를 흔들고 웅얼댔다.
“난 거기서 없는 사람이었어.”
율리아가 속상한 이유는 모든 관심이 제게 쏠리는 탓에 있었다. 몇 없는 여자 학우로서 나디아는 율리아를 많이 좋아하고 의지했으나 원치 않은 남자들의 관심과 비교로 율리아와의 사이가 불편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정말 싫은 사람. 나디아는 무례하고 오만한 남자의 얼굴을 지우기 위해 눈을 감았다.
하이델베르크의 헤센하우젠 백작가는 유서 깊은 군인 귀족 가문으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다. 현 백작인 막시밀리안은 무인보다 문인으로 군인의 길이 아닌 과학도의 길을 걸었다. 대신 그의 아들들이 가풍을 이었다.
백작가의 삼 형제는 귀족 사교계 내에서도 유명했다. 장남인 알렉산더는 육군 최고 인재만이 선발되는 장군 참모 과정을 밟고 있었으며 셋째인 루드비히 또한 형의 영광스러운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었다. 둘째 요제프만이 형제와 달랐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 양자 역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지도 교수의 총애를 받은 그는 로켓 연구소에서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내딸, 나디아 엘가 마리 폰 헤센하우젠. 막내딸은 백작 부인의 태생이 아니었다. 백작과 연구소 조교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백작 부인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편의 잘못을 용서하고 사생아를 자신의 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백작의 조교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그들의 불륜은 학계는 물론 사교계에서도 너무나도 유명해 백작 부부가 아무리 딸을 귀족가 여식으로 귀하게 키워도 나디아에게 유대인 피가 섞였다는 사실까지는 지울 수 없었다.
나디아는 등을 기대고 창밖을 봤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도시지만, 최근에 작은 소란들이 있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굽는 안의 빵 가게는 오늘도 닫혀 있었다. 가게의 문엔 주홍색 페인트로 마구잡이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Jude
주인인 안은 유대인이었다. 4월부터 나치 정권은 유대인 불매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동네 양아치들은 어느 순간부터 갈색 정복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갈색 옷을 입고 경찰이라도 된 거처럼 구는 그들은 며칠 전부터 빵 가게에 주둔해 가게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막아섰다. 결국 안은 가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저렇게 한심하게 살까?
나디아는 지금의 무질서와 혼란이 금방 잦아들 거라 믿었다. 오랜 기간 경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극우라 자칭하는 무리가 불만을 표출하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 * *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이는 휴일로 나디아는 곧 자신을 불쾌하게 했던 남자와 예민하게 굴었던 율리아를 잊었다. 세 오라비는 이복형제인 나디아를 누구보다 아꼈다. 그중에 나디아와 친한 사람이 요제프였다. 요제프가 구하기 힘든 양자 역학 책을 가지고 온다고 했기 때문에 나디아는 어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저택으로 가고 싶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나디아는 저택에 가족 외의 손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백작 부인이 다가와 아버지께 인사하러 가려는 나디아를 막고 방으로 올려 보냈다.
“중요한 손님이 오셨다.” 그리고 나디아를 모시는 미카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넌 반드시 내가 일러둔 대로 내 딸을 모셔야 할 거다.”
얼마나 중요한 손님이길래. 방으로 올라오자마자 미카에 의해 욕탕으로 끌려간 나디아는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도 않는 장미 오일까지 꺼내는 미카에게 물었다.
“손님이 누구야? 넌 봤지, 미카?”
“토니아가 하는 말이 젊은 남자래요. 키도 크고 잘생겼다고 하던데요.”
“군인이야?”
“아뇨.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도 외국인이라고 했어요.”
아버지를 찾는 학계 박사들이 많았기에 나디아는 손님이 외국에서 온 과학자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무슨 연유로 제게 중요한 파티가 있을 때나 입을 만한 드레스를 입으라 하는지 몰라도 군말 없이 입었는데도 어머니는 그것도 부족한지 자신의 애장품 중 하나인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나디아의 목에 걸어 줬다. 선명한 녹색 다이아몬드는 나디아가 입은 청록색 드레스와 어울렸다.
“아끼시는 건데 왜?” 나디아는 거울을 보며 백작 부인이 가장 아끼는 보석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백작 부인은 말을 아꼈다. “잘 어울리는구나.” 그 한마디뿐.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무뚝뚝했다. 그리고 자신이 낳지 않은 딸의 등허리를 밀어 다이닝 홀로 떠밀어 보냈다.
“나디아!” 가장 먼저 요제프가 벌떡 일어났다. “말괄량이가 못 본 사이 숙녀가 되어 있었구나.” 그리고 알렉산더와 루드비히까지. 가족 모두가 모였다. 그런데 아버지 곁 상석에 손님이 앉아 있었다. 오라비들의 열렬한 환영 인사는 백작 부인의 만류로 끝났다.
“막내딸 나디아입니다.” 아버지가 손님에게 말한다. “나디아, 인사하거라. 애서턴 씨는 미국에서 오셨단다.”
그제야 그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오후에 봤던 불쾌했던 그 남자였다. 나디아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요제프는 놓치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야?”
나디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남자는 마치 저를 방금 처음 보는 거처럼 동요가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그랬던 걸까 그러면?
“레하르 박사님의 강의를 청강하던 분이었어….”
요제프는 아버지의 손님이라는 작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레하르 박사는 열역학의 대가였고 그의 수업은 어려워 학기마다 중도 탈락자들이 항상 있을 정도였다. 그런 레하르 박사의 수업을 청강했다고? 더군다나 레하르 박사는 외골수라 전공과 무관한 사람의 청강도 허락하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사업이나 하는 졸부라 물리학을 전공으로 하는 이도 아니었다.
“레하르 박사는 청강생을 두지 않는 걸로 유명한데 어떻게 강의실에 들어간 겁니까? 애서턴 씨.”
제 누이를 막아서며 적의를 드러내는 요제프에 클리프는 의아한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지만 요제프 눈에는 비열하게 보였다.
아들의 무례에 당황한 백작이 아들에게 무슨 무례냐며 호통을 쳤다. 반면 클리프는 자신을 노려보는 삼 형제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백작 부인과 귀족 여식이 와도 자리에 앉아만 있던 오만한 남자가 그제야 일어난다. 그는 풀어 뒀던 재킷의 단추를 잠그며 나디아를 향해 걸어왔다.
“제대로 인사드리죠. 레이디.”
남자가 손끝을 잡는 순간 나디아는 흠칫 떨며 어머니 쪽을 돌아봤다. 백작 부인은 완고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디아의 손은 남자에 의해 올라갔다. 제게서 눈을 떼지 않은 남자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클리프 애서턴입니다. 낮의 만남은 우연이었습니다. 아가씨가 백작님의 딸인지 알았으면 에스코트했을 건데요.”
그는 자신이 일부러 접근했을 것이라는 나디아의 의심을 무마시켰다. 나디아는 자신의 생각을 들킨 걸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백작 부인은 불순한 태도를 숨기지 않는 아들들을 짧게 노려봄으로써 그들을 제압하고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녀는 나디아를 남자의 맞은편에 앉혔다. 나디아가 항변의 눈빛을 보내도 백작 부인은 모르는 척 사용인을 불러 만찬의 시작을 알렸다.
만찬은 처음엔 평범했다. 화목한 가족의 식사 자리에 손님 한 명이 더 있을 뿐이었다. 오라버니들과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다정한 대화가 오갔다. 자식들이 그러는 사이 백작은 손님과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나디아는 요제프에게 어서 가져다준다는 책을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요제프는 그럴 줄 알았다며 감춰 뒀던 책을 건넸다. 나디아가 신이 나 소리를 내자 백작 부인이 경고했다.
나디아는 요제프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고마워 오빠. 오빠밖에 없어.” 요제프는 나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소원을 말했다. “나디아 너도 졸업하면 내가 있는 연구소로 왔으면 좋겠어.”
그때 백작 부인이 이목을 집중시켰다.
“애서턴 씨, 나디아는 영어는 물론이고 불어와 스페인어도 할 줄 안답니다.”
어머니가 대뜸 저 남자에게 자신을 자랑하자 나디아는 의아했다.
“영어는 듣고 말하고 작문도 잘합니다. 그렇지, 나디아?”
“나디아 양은 4개 국어를 할 줄 아는군요.”
남자는 흥미로운 척하며 제게 말을 걸었다. 나디아는 저 남자가 강의실에서도 물론이고 지금도 제게 호감이 있는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들이 보기에 그가 저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제 느낌상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랬다. 나디아는 퉁명스럽게 남자에게 대꾸했다.
“히브리어도 할 줄 알아요.”
백작 부인은 소리 없이 나디아에게 당장 멈추라고 나무라고 있었다.
“거의 사어나 마찬가지인 언어를 할 줄 안다니 대단하시군요.”
“사어가 아니에요. 언어가 쓰인 책이 읽힌다면 죽은 언어라 부를 수 없죠.”
“나디아!” 백작 부인이 나디아의 말을 끊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남자와 설전이라도 치렀을 거다.
그리고 백작 부인은 실패한 시도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제 남편인 백작을 독촉했다. 백작은 딸의 어두워지는 얼굴을 외면하고 이어서 말했다.
“나디아는 굉장히 똑똑한 아이입니다. 학교도 2년을 월반할 정도로요.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 없던 아이였습니다. 건강하고 활달한 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