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의 커플 계약
후계자의 커플 계약
후계자의 커플 계약
1장.



입학식 당일 아침, 문동하는 유난히 찬 공기를 머금은 봄바람 속에서 검은 슈트를 정돈하고 있었다. 다른 신입생들은 후줄근한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고 교정을 서성이지만, 그는 달랐다. 처음부터 달라야만 했다. 아니,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문동하, M 그룹 장남.
대한민국 10대 재벌 중 하나인 M 그룹의 후계자.
그리고, 한국 대학교 경영학과 신입생.

그가 입학과 동시에 받은 첫 번째 지시는 ‘연애하라’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정략결혼을 망치지 않기 위한 계약 연애를 하라’는 지시였다.

‘너 아무하고나 사귀었다가 결혼 망치면, 그땐 네가 아니라 집안이 책임지게 된다.’

입학식 전날 밤, 아버지 문건호 회장이 건넨 말이었다.
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동하에게 그것은 명령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략결혼 대상과 만나는 날까지, 철저히 ‘정리된 연애’를 해야 한다는 것.
즉흥적 감정도, 우발적 스캔들도 없어야 한다.

“계약 연애 상대는 우리 쪽에서 선별할 거다. 주변에 얼씬대는 여자들 차단하고,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유지해. 그 이상은 절대 안 돼.”

이것이 계약 커플의 시작이었다.



강의실 입구, 이미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문동하는 교정에서부터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스쳐 지나갔고, 모두가 그를 힐끗 돌아봤다.

“야, 저 사람 누구야? 연예인 아냐?”
“와, 진짜 잘생겼다. 무슨 드라마 주인공 같다.”
“근데 저런 애는 여자 친구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익숙한 시선, 익숙한 관심.
하지만 그 모든 것 위로, 동하는 짜증과 피로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문동하 씨 맞으시죠?”

낯선 여자 목소리.
동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붉은빛이 도는 브라운 헤어를 한, 단정한 재킷 차림의 여학생이었다.
신입생 같지 않은 침착한 눈빛.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좁혔다.

“…누구시죠?”

“채예린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맑고 선명한 발음.
당당하고 또렷한 눈빛.
그 순간, 문동하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올렸다.

“오늘부터 여자 친구 역할 맡기로 했습니다. 계약 조건에 따라.”

마치 사무적인 회의에 참석하듯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계약서는 이미 서명했고, 어제 지급된 계약금도 확인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첫 만남에 악수부터 청하는 여자.
예의 바르고, 똑똑해 보이고, 무엇보다 자신감 넘친다.

동하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정말 계약 때문인 거죠?”

예린은 웃지 않았다.

“네. 저한텐 돈이 필요했고, 문동하 씨에겐 여자가 필요했잖아요.”

너무도 정확하고, 냉정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사랑도 바라지 않는다.
동하는 처음으로 불편함을 느꼈다.

‘돈이 필요해서 계약을 했다’는 말이, 어쩐지 속을 긁는 듯한 감정을 남겼다.



그날 저녁, 동하는 개인 기숙사로 돌아와 홀로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계약서를 다시 펼쳐 들었다.

제1조. 피계약자는 문동하의 대학 생활 중, 외부의 여성 개입을 방지하며 여자 친구 역할을 수행한다.
제3조. 계약 해지 시 피계약자는 위약금 10억 원을 부담한다.
제5조. 계약 완수 시 성공 보상금 10억 원 지급한다.

그는 웃음 섞인 숨을 내뱉었다.
10억 원짜리 여자 친구.
심지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용한 보호막.

“웃기고 있네.”

종이를 내려놓고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하루 동안, 여러 명이 예린을 쳐다봤다.
몇몇은 SNS로 그녀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그는 그 장면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불쾌하고, 거슬리고, 뭔가 찝찝했다.

‘그런 거 신경 안 쓸 줄 알았는데.’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처음으로, 계약의 의미가 그의 감정에 파고들었다.
자신이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깊게.

* * *

계약서에 사인한 건, 겨우 이틀 전이었다.
채예린은 자신의 서명이 적힌 그 서류를, 아무런 감정 없이 내려다봤다.
마치 취업 계약서라도 되는 양, 묘한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혹시… 고민은 안 하셨어요?”

선발 위원이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예린은 짧게, 그러나 또렷하게 대답했다.

“고민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녀의 아버지는 중견 기계부품 회사를 운영했다.
경영은 성실했고 기술력도 괜찮았다.
하지만 원청업체가 거래처 계약을 파기하자 부도는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원청업체의 이름이 바로 ‘M 그룹 기계사업부’라는 건 예린조차 커플 계약이 확정되고 나서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어머니는 울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