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중입니다 2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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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워크숍도 실전처럼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지혁과 그 문제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상준과의 관계도 있고 어쨌든 직장 상사라 먼저 화해를 청하는 톡을 보내 보았지만, 지혁은 답 톡을 보내지 않았다. 아마도 선미와 다시는 이야기를 하기 싫다는 뜻. 큰마음을 먹고 두 번이나 보낸 톡이 모두 다 씹히자, 선미도 꼬인 관계를 푸는 것을 포기했다.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겹게 오리 새끼처럼 졸졸 쫓아다니던 놈이 이제 다시는 따라다니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선미는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일본 진출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개인적인 상황이야 이래저래 꼬였어도, 일까지 손에서 놓을 수는 없었다.



* * *



경기도 외곽에 있는 어느 연수원 세미나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지난 몇 달 동안 준비해 온 일본 진출 프로젝트의 마무리 설계도를 완성하기 위한 워크숍입니다. 큰 방향은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는 ‘누가, 언제, 어떻게’까지 구체적으로 딱 맞춰야 합니다. 이틀 동안 캐스팅, 무대, 마케팅, 계약까지 모든 부분을 하나씩 빠짐없이 손을 봐서, 내일 바로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게 목표예요. 여러분께 부탁드릴 건 하나입니다. 이번 워크숍에서는 ‘안 된다’나 ‘어렵다’보다 ‘된다면 어떻게’를 먼저 얘기해 주세요. 그게 우리가 일본 무대에 서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선미의 간단한 오프닝 멘트와 함께 1박 2일 일정의 워크숍이 시작되었다.

워크숍이 진행되자마자 선미는 곧장 인정사정없이 팀원들을 굴려댔다. 파트별 현황 보고, 관객 타깃 세분화와 마케팅 채널 전략 논의, 일정 및 예산 세부 조정 등 첫날로 예정된 워크숍 세션이 아주 숨 가쁘게 지나갔다.

하지만 팀원들은 엄청나게 굴려지면서도 큰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팀원들을 굴리는 만큼 팀장인 선미가 더욱 바쁘게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팀원들이 내놓은 아이디어나 정리된 계획은 선미가 모두 직접 취합하고 정리했고, 세션이 끝날 때마다 자리를 정리하는 것도 모두 선미가 도맡아 했다. 덕분에, 처음에는 표정이 살짝 어두운 것 같았던 팀원들도 이내 진지하게 일정을 소화해 내기 시작했다.



“마케팅 쪽은 일본 현지 팬카페랑 연계하면 반응이 더 빨리 올 것 같습니다.”

“어, 그거 우리 쪽 배우분들 현지 팬카페 말하는 거죠? 그쪽이랑 컨택을 해봐야겠는데.”



“이 일정이면 세트 운송은 항공보단 선박 쪽이 낫겠습니다. 비용이 절반이에요.”

“비용보다는 안전하게 운송하는 게 중요한데, 선박 쪽으로 보내면 물품 무사하게 보낼 수 있을까요? 보험 들어 놓으면 배상이야 받겠지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세트 물품도 꽤 있잖아요.”



“일본 현지 업체에서 요청한 건 이 정도까지 반영 가능하죠? 안 되는 부분들 정리해서 워크숍 끝나면 그쪽으로 보내주세요.”



사실 선미가 팀장으로 오기 전까지는 ‘지온 엔터테인먼트 간판 부서’라는 이름만 달고 있었지, 이렇게까지 일을 잘하거나 열심히 하려는 팀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미가 팀장이 되고도 2년이 지난 지금은 달랐다. 팀원들 구성이야 크게 바뀐 것은 없었지만,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십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는 것이 문제였지, 다들 업무 모드에만 들어가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일을 한다.

또, 일을 못 해도 너무 못해서 걱정이었던 채영 역시도 어느 정도 제 몫을 해내는 것이 선미는 흡족했다. 지난 몇 주간 굴린 보람이 있었다.

“좋아요, 오늘 공식적인 회의는 여기까지. 이제는 ‘틀려도 된다’, ‘황당해도 된다’ 모드로 갑니다. 일본 관객들이 ‘이건 꼭 봐야 돼!’라고 느낄 만한 아이디어, 뭐든 던져 주세요.”

첫날 마지막 세션은 온종일 바삐 논의를 하고 계획을 짜느라 거의 한계까지 머리를 굴린 팀원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마련한 브레인스토밍 자리였다. 선미가 운을 떼자, 팀원들의 아이디어가 우르르 쏟아졌다.

“굿즈를 그냥 파는 게 아니라, 관객이 직접 만들어서 가져가는 DIY 키트로!”

“아, 그러면 종이 소품에 배우 친필 사인해 주는 이벤트랑 묶어도 되겠네요.”

“좋아요, 연결 가능. 다음!”

“일본 전통 요소를 살짝 섞은 스페셜 커튼콜? 예를 들어 가부키 스타일 동작이나 일본어로 한 소절.”

“근데 너무 현지화하면 우리 색깔이 약해질 수 있으니까, 비율 조절은 필수죠.”

“좋아요, 리스크까지 같이 적어 둡니다.”

팀원들의 아이디어 폭발이 이어지자, 가만히 듣고 있던 채영도 조심스레 손을 들어 꽤 괜찮은 아이디어를 냈다.

“저기…… 그러면… 공연 전 로비에서 배우들이 직접 한 줄 노래 불러 주는 ‘인사 타임’은 어떨까요…….”

“오, 되게…… 상큼하네요. 우리 배우들 하루에 몇 회 공연하는지 알고 하는 말이죠?”

“팬 미팅이랑 헷갈린 거 아냐?”

하지만 팀원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고, 좋지 않은 반응이 이어지자 채영은 금방 다시 어깨를 움츠리며 입을 다물었다.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

“좋아요, 다음.”

선미는 태블릿 PC에 채영의 아이디어도 메모하며 말했고, 팀장의 오케이 사인을 받은 채영의 얼굴이 아주 살짝 밝아졌다.



* * *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무리 일을 하기 위한 워크숍이라고는 해도, 온종일 일만 하면서 사람을 쪼다 보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하루 세션이 모두 끝난 후에는 아주 간단한 뒤풀이 자리가 있었다. 다만, ‘놀자판’이 아니라는 원칙만은 확고했기에, 팀원들의 앞에 놓인 것은 500ml짜리 맥주 캔 하나가 전부. 술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들 무척 즐거워 보였다. 아마 빡센 하루 일정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는 뿌듯함 덕분일 것이다.

“팀장님, 진짜 체력 괜찮으세요? 저는 오후부터 완전 뇌가 데워져서 엉망이 됐잖아요.”

지영이 선미의 맥주 캔에 자기 맥주 캔을 부딪쳐 오며 웃었다. 선미도 지영을 따라 빙긋 웃었다.

“아니, 나는 괜찮았어. 다들 워낙 준비를 잘해 와서 오히려 편했는데요?”

“아아, 팀장님은 편하셨구나. 저희는 팀장님이 아침에 하셨던 ‘누가, 언제, 어떻게’ 그 한마디 때문에 다들 엄청 각 잡혀서 힘들었는데.”

“그래? 다들 고생했네.”

“에이, 이 주임은 말을 해도 꼭. 그래도 팀장님 덕분에 저희도 오늘 버틴 거죠. 아까 브레인스토밍 때 아이디어 엄청 나왔던 건, 팀장님이 다 받아 주셔서 그랬던 거예요.”

“그거야 다들 현장에서 먹히는 감각이 있으니까 그렇지. 다들 쓸 만한 아이디어였어. 최 대리도 그랬고.”

준호의 입꼬리가 금방 귀에 가서 걸린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근데 진짜 다른 부서에서 저희 부러워하더라고요. 분위기도 좋고, 실적도 잘 낸다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너무 놀자판으로 풀어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업무 이야기만 하지도 않는 이 분위기가 선미 역시 딱 좋았다. 매일 이런 정도로만 일을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로 긴장과 풀림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관리자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선미는 저녁 무렵에야 이 정도 분위기로 넘어온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모처럼 마음 놓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선미는 팀에 잘 섞이지 못하고 있던 팀원의 존재를 그만 잠시 잊고 말았다. 그 팀원이 뒤풀이에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구석에 쭈그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선미가 겨우 깨달은 것은, 다들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자리를 정리할 즈음이었다. 아니, 선미만 그 팀원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 아니었다. 혼자 구석에 쭈그러져 있던 팀원이 느닷없이 아주 성대하게 존재감을 과시한 덕분에, 팀원들 모두가 이 자리에 팀원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아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저기요, 이 주임님. 진짜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적당히 비닐봉지에 빈 캔을 담아 넣는 등 뒤로 높은 목소리가 빽 하고 들려왔다.

“헐…….”

선미와 함께 빈 캔을 정리하고 있던 준호의 입에서 황당해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를 지른 사람이,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채영이었기 때문이다. 선미 역시 당황스러워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채영 씨?”

뒤풀이 내내 워낙 조용하게 아무 말이 없어 자리에 있는 줄조차 몰랐던 것인데, 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혼자 마신 걸까. 채영은 얼굴이 술기운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주변에 굴러다니고 있는 빈 맥주 캔이 보이는 것만 어림잡아 네다섯 개. 그 짧은 시간 동안 혼자서 저걸 다 퍼마셨다면, 제정신일 수가 없는 건 당연했다.

팀원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히건 말건, 채영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할 말을 마구 쏟아냈다.

“다들 진짜 너무하세요. 제가 무슨 말만 하면 뭐라고 하시는데, 너무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이 주임님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 팬 미팅이랑 헷갈린 거 아니냐고요? 저, 다른 일본 진출 뮤지컬 무대 밤새도록 다 확인하면서 공부하고 생각했던 거라고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