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중입니다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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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진 사나운 저녁이라는 경우의 수



유선미, 서른한 살. X저씨들 말로는 달걀 한 판을 넘긴 나이일 것이고, 어디서는 선을 보라며 야단일 것이며, 또 어떤 남자들은 ‘마음이 급해 아무하고나 결혼하려 하겠구나.’ 하는 착각으로 괜히 한번 찔러 보려 들지도 모를 나이. 하지만 선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잘나가는 커리어우먼, 그것이 유선미라는 여자를 이야기하는 ‘진짜’ 간판이었으니까.

선미는 자기 커리어에 정말로 자신이 있었다. 서울 유명 사립 대학교에 다니는 내내 과 톱을 놓치지 않았고, 흔한 연줄 하나 없이 오로지 성적만으로 미국 유명 대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귀국 후에는 한국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회사 지온 엔터테인먼트 공개 채용에 당당히 합격했으며, 지난해부터는 지온 엔터테인먼트의 간판 부서인 콘텐츠 제작1팀의 팀장까지 달게 되었다. 게다가 ‘지온 그룹 전체 역사상 최연소 팀장 승진’이라는 간판까지 덤으로 붙어 있다.

다만 그런 선미에게도, 서울 시내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루프톱 레스토랑에서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그다지 기분 좋은 시간이 아니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완벽한 저녁 식사 자리일지도 모른다. 국내 최고의 셰프가 심혈을 기울여 드라이 에이징한 100g당 20만 원을 넘는 고급스러운 채끝살 스테이크와 한 병에 50만 원을 훌쩍 넘는 와인.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멋진 남자까지. 깔끔하게 포마드로 정리한 머리와 슬림하면서도 탄탄한 체형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완벽한 그레이 슈트는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돋보이게 한다.

그 역시도 ‘지온 그룹 역사상 최연소 임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그 흔한 드라마나 소설처럼 ‘재벌 2세’라거나 하는 뒷배경 덕에 젊은 나이에 대기업 임원 자리를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 우진은 미국 실리콘 밸리에 있던 이름 없는 IT 회사를 세계적 기업으로 멋지게 성장시킨 후, ‘그룹에 젊은 피를 수혈하고 싶다.’라는 온상준 지온 그룹 회장의 파격적인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한국에 들어온 남자였다.

누구라도 완벽한 저녁 식사 자리라고 생각할 이 자리를 선미가 불편해하고 있는 것은, 그를 둘러싼 소문 때문이었다.

선미와 같은 나이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지온 그룹 경영전략이사 부사장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그의 사생활을 둘러싼 소문은 끊임없이 본사와 계열사를 떠돌아다녔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여자 수십 명은 울리고 들어왔다는 소문도 있고, 혼외자만 대여섯 명을 두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모두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은 뜬소문들이었지만, 이렇게 보고 있노라면 질 나쁜 소문이 왜 그렇게까지 거칠게 흘러 다녔는지 알 것도 같다.

그래서 예보에 없던 비가 온 그 저녁, 우진이 이 저녁 자리를 제안했을 때 선미는 무심코 눈썹부터 찌푸렸던 것이다.



“엔터테인먼트 제작1팀의 유선미 팀장님이시죠? 다음 주 저녁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아무리 소문이 나쁜 남자라 해도 계열사 팀장에게까지 경솔한 행동을 할 리 없을 터였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파문이 번지듯 묘한 불편함이 마음 한구석에 스며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 바로 거절해야지.’

선미는 오늘 오후 내내 생각했던 거절의 말을 되뇌며, 최대한 사무적인 눈빛을 유지하고서 눈앞의 스테이크를 잘라냈다.

“식사는 어떠셨습니까?”

식사가 모두 끝나고 디저트인 크렘 브륄레와 아이스크림 한 스쿱이 테이블 위에 올라오자, 우진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저녁 식사 내내 우진은 콘텐츠 제작1팀 분위기라든지, 최근 집중적으로 밀고 있는 뮤지컬 뉴욕 진출 건처럼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들만 간단하게 꺼냈었다.

“괜찮았어요.”

선미가 입가에 비즈니스용 미소를 걸며 대답하자, 우진의 눈빛도 희미한 만족감으로 물들었다.

곧 공기의 흐름이 조금 달라졌다. 감정을 읽기 어려운 표정은 여전히 단단했지만, 눈빛이 한결 진지하다. 혹시라도 이 저녁 식사 자리가 감추고 있던 다른 목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가 싶어, 선미는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그런데 남자의 입에서는, 선미가 예상하지 못했던 전혀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실은 제안할 것이 하나 있어 시간을 부탁드렸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유 팀장님, 저와 손 한번 잡아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게 무슨 소리지?

자기랑 손을 잡는 게 어떻겠느냐고?

갑자기?



* * *



“이런 개XX, 뭐 X같은 XX가 씨X, 개씨X X도 아닌 게 지X이야!”

손으로는 핸들을 움직여 주차선에 맞게 차를 대면서 입으로는 차진 욕설을 쏟아냈다. 구성진 욕설을 쉬지 않고 뱉어낼 수 있는 것은 선미가 가진 수많은 재능 중 하나였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선미의 이 재능을 잘 모른다. 그 일 이후 다른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굉장히 꺼리게 되었기에. 고등학생 유선미의 별명은 ‘마귀할멈’이었지만, 지온 엔터테인먼트 유선미 팀장의 별명은 ‘얼음 여왕’ 혹은 ‘얼음 쌍X’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선미가 사실은 무척이나 정에 약하고 사람에 약한 여자라는 것을, 때로는 감정을 마구 터뜨리면서 이성이 아닌 감정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기도 할 줄 아는 여자라는 것을.

“씨X, 저녁 먹자고 불러냈으면 회사 이야기나 하면서 얌전히 밥이나 처먹을 것이지, 뭐? 손을 잡아?”

선미는 신경질적으로 운전석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 바람에 조금 타이트하다 싶었던 원피스 자락이 허벅지 위까지 말려 올라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 자리였으나, 그래도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약속이었기에 평소보다 조금 신경을 써서 입고 나온 원피스였다.

머리끝까지 열이 뻗쳤기 때문이었는지, 더 이상 구두를 신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발끝마저 아파 왔다. 신경질 난다고 계속 콘크리트 바닥에다가 발을 쾅쾅 굴러댔기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저녁 자리가 불편했다고 구두까지 불편할 리는 없었으니까. 선미가 오늘 신은 구두의 굽은 고작 5cm 높이. 업무가 업무인지라 예정되지 않은 현장을 뛰어다닐 일이 종종 생기고는 했기 때문에 평소에는 거의 굽이 없다시피 한 플랫 슈즈를 즐겨 신었지만, 오늘은 원피스에 맞춰 로우힐이라도 신고 나온 것이었다.

“씨X 새X…… 사람을 뭐로 보고…….”

선미는 한숨을 쉬면서 발끝을 만지작거렸다. 어찌나 발을 굴러댔는지, 스타킹 끝에 구멍까지 났다. 엄지발톱에 피멍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생각할수록 열받네, 사람을 뭐로 보고.”

선미가 화가 난 것은, 조금 전 우진이 건넨 그 제안 때문이었다. 차라리 혹시나 하고 의심했던 대로 시답잖은 플러팅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을…… 잡자고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선미가 당황스러워하며 되묻자, 우진은 더없이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돌려 말하는 거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유 팀장님도 그룹 본사 지분을 꽤 많이 갖고 계시지요? 그 지분, 제 쪽으로 써 달라는 말입니다.”



공격적인 키워드는 모두 빠져 있었지만, 선미가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우진은 임원으로 온 것에 그치지 않고, 지온 그룹 본사의 경영권 자체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걸 도와달라는 의미였다. 아마도 하반기 중 열릴 정기 주주 총회와 그에 앞서 열릴 이사회에서.

물론 지온 그룹의 경영권이나 소유권 문제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경영권이 누구에게 넘어가든 선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우진이 그 제안을 한 이유. 그것이 선미의 신경을 긁었다.



“제 지분이 어느 정도 된다는 건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선미가 더없이 차갑게 되물었을 때, 우진은 “사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던데요?”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우진의 말이 사실이기는 했다. 온씨 가족과 이만한 친분을 가지고 있는 중간 관리직은 지온 그룹 본사와 계열사 전체를 통틀어 선미밖에 없었고, 그 사실은 지온 그룹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식당 이모들까지 다 알 정도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선미가 가지고 있는 지분이라는 것은 온 씨 가족과의 친분 관계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었다. 온상준 지온 그룹 회장이 능력 있는 회사 중간관리직을 계속 회사에 묶어 두기 위해 나누어 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우진은 그 지분을 전혀 다른 의미로 여긴 듯했고, 우진이 내건 대가라는 것이 그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하나만 묻죠. 그 제안, 받아들이면 저에게 뭐가 좋은 거죠?”

“글쎄요. 아직 유 팀장님께서 확답을 주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만, 일이 잘된다면 유 팀장님께 좋은 자리 하나 정도는 마련해 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쪽’과 친하게 지내시는 지금이라면, ‘그쪽’ 뒤치다꺼리하는 자리 이상으로는 올라가기가 어려우실 텐데.”



마치 스테이크 한 조각이라도 썰어내듯 아주 가벼운 대답이었고, 그것은 선미가 자기 커리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선미는 우진이 미끼로 내건 ‘좋은 자리’ 같은 것을 별로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뒷거래 없이, 오로지 자기 혼자 힘으로 이 분야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여자였으니까.

결국 우진은 선미를 단순히 지온 그룹 오너 일가와의 친분만으로 이 자리에 오른, 누군가의 뒷거래를 하지 않으면 평생 오너 일가 뒤치다꺼리나 하게 될 여자로 본 것이었다.

“능력 있고 잘생기면 다야! 지X 같은 게 사람을 무시하고!”

하지만 언제까지 짜증만 내면서 지하 주차장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선미는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을 회장인 상준에게 확 고자질해 버릴까 하는 충동도 잠시 일었지만, 오늘 저녁 일은 그냥 뜨거운 물로 샤워라도 하면서 흘려보내고 깨끗이 지워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오늘 저녁의 피날레는 우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씨X, 오늘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