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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왕 카르나크 13권
임경배 정통판타지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용의 섬
황혼의 성도들
교단의 성검
사람의 마음
반격의 서막
1
용의 섬
용의 섬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만 해도 카르나크는 전혀 믿지 않았다.
‘남해에 용이 살았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모든 용들은 대륙 극동부, 요정족과 영역을 공유하는 드래곤 랜드 근처를 떠나지 않는다.
인류의 생활 영역과 가장 가까운 곳에 거하는 용의 레어조차 수백 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져 있다.
왜 용들이 저런 서식 습성을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학계에서 여러 가설을 세우긴 했지만 명확한 답을 내려 주는 것은 없었다.
다만, 카르나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야 드래곤 랜드 중앙에 용황제가 잠들어 있으니까 그렇지.’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용, 그라테리아의 존재가 다른 용들의 본능을 자극해 곁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이다.
‘잠깐, 그렇다는 건 이 세계에도 용황제는 존재한다는 건가?’
실제로 이 세계의 지도에 드래곤 랜드란 지명이 있는 걸 보면 별로 다르진 않을 것 같다.
하여튼 그런 이유로 카르나크는 저 용의 섬이 진짜가 아니라고, 보나 마나 시골뜨기들이 주워섬기는 흔해 빠진 민담 같은 것일 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용이 이 근처에서 살았냐고? 그렇진 않았고.”
용이 살았던 섬이라서 용의 섬이 아니었다.
용이 죽고 그 뼈가 남아 있는 섬이라서 용의 섬이라 불리고 있었다.
“이 근처에선 제법 유명한 전설이라네.”
아득한 옛날, 이름 모를 고룡 하나가 남해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정확히 몇 년 전인지, 어떤 연유로 드래곤 랜드를 떠나 남해까지 왔는지, 대체 무슨 일로 죽음을 당했는지 등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이야기가 남아 있으면 전설이 아니라 그냥 역사 아니겠나?”
하여튼 저 오래된 용은 태피얼 군도의 한 섬에서 죽어 시체를 남겼다.
그 드래곤 본이 화근이었다.
워낙 강력한 용이다 보니 그 권능이 죽은 후에도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그 탓에 시체가 위치한 섬 전역에 기이한 현상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온갖 마물이 창궐하고 기후가 헝클어지고 인간을 현혹하는 안개가 사시사철 내내 끼게 되었다.
근처를 항해하는 뱃사람들은 그 일대를 악마의 섬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용의 섬이라 부르진 않았다네.”
저 현상이 드래곤 본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된 건 대략 50여 년 전의 일이었다.
한창 헌터 길드가 모험가 길드로 이름을 바꾸고 다양한 활동을 벌이던 때였다. 모험가의 숫자 역시 대륙 전역에 걸쳐 크게 늘어났다.
대륙 곳곳의 던전과 유적을 탐험하는 여러 모험가들에게 저 ‘악마의 섬’에 대한 이야기는 실로 매력적이었다.
“강력한 전사와 마법사, 성직자가 팀을 꾸려 속속 악마의 섬 탐사에 나섰다고 하지.”
노인의 이야기를 듣던 레번이 이해가 간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리고 모두 죽었나 보군요?”
모두 죽었으니까 세상엔 알려지지 않았겠지.
이런 생각으로 던진 질문이었는데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네.”
“네?”
용의 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분명 기이했지만 용감한 모험가들의 발길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섬 전역을 탐사하고 이 현상이 드래곤 본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돌아가 모험가 길드에 그 사실을 보고했다.
이후 꽤나 많은 모험가들이 용의 섬을 찾아 이곳, 태리스터 항구로 향했다.
다들 배를 빌려 태피얼 군도로 향했고, 용의 섬을 탐사한 뒤 돌아왔다고 한다.
여기까지 들은 세라티와 바로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꽤나 많은 모험가들이…….”
“……탐사한 뒤 돌아왔다고요?”
미심쩍어하는 두 사람의 반응에 노인이 인상을 썼다.
“뭐가 이상한가?”
“그런데 왜 세상엔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비밀의 섬 아니겠나?”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애매해 바로스가 뒷머리를 긁었다.
노인들은 그들대로 비밀의 섬이 비밀인 게 대체 뭐가 문제냐는 표정.
그때 50대 장년인이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용의 섬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모험가분들.”
이곳 술집의 주인이었다.
손님이 슬슬 빠진 후라 한가해진 모양이었다.
바로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주인장도 이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용의 섬 말입니까? 항구 주민들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밀리아의 의문대로였다.
동네 술집 영감들도 아는 비밀이 과연 비밀인가?
그럴 리가 있나!
“저도 어릴 적에 용의 섬을 찾는 모험가를 본 적이 있지요. 그분들이 한탄하는 내용도 들었습니다.”
용의 섬을 무사히 다녀온 그들은, 술집에 모여 앉아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젠장! 건질 거 더럽게 없네!
모험가들이 목숨 걸고 험지를 탐사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다.
돈.
용의 섬은 돈이 될 만한 건수가 전혀 없었다.
남해 오지에 처박혀 있는 곳이다 보니 아무리 기이한 일이 터져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못한다.
즉, 저길 토벌해 달라고 현상금이 걸리거나 할 일은 없다.
무슨 고대 유적이나 폐허 같은 곳도 아니다. 집채만 한 용 뼈가 떡하니 떨어져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냥 평범한 무인도다.
즉, 유물 같은 걸 출토해 내다 팔 수도 없다.
그나마 모험가들이 기대한 건 용의 섬에 출몰하는 기이한 마물들의 존재였다.
마물들 중에는 그 자체로 돈이 되는 것들이 제법 많다.
주로 마법사들이 마법 촉매로 구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모험가 중엔 아예 작정하고 마물 헌터가 되어 저런 재료만 구하러 다니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용의 섬에 출몰하는 마물은 그런 경우도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용의 섬 마물들은 죽는 순간 변이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죽어라 싸워서 간신히 이겼더니 그냥 죽은 토끼 한 마리, 죽은 사슴 한 마리가 전부인 격이었다.
저들을 마물로 만들었던 권능은 정말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뭐라도 남겨야 들고 가서 팔 텐데,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니?
그 순간 모험가들이 얼마나 허탈했을지 익히 짐작이 가리라.
납득이 간다며 카르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겠군. 용마력으로 일어난 현상일 테니.”
용의 힘은 인간이 쓰는 권능과는 조금 다르다.
오러도 마나도 사령력도 신성력도 아닌, 뒤섞인 기운.
정확히는 저 네 가지 힘으로 나뉘기 전의 혼연의 권능이었다.
“그래서 용들은 저 힘을 모두 쓸 수 있으며, 동시에 아무것도 쓸 수 없지.”
분명 드래곤들은 마법사처럼 불을 쏘고 오러 유저처럼 파괴의 기운을 발하며 성직자처럼 상처를 치유하고 사령술사처럼 유령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마법이나 오러, 신성술이나 사령술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용마력으로 비슷한 현상을 따로 구현하는 것뿐.
“엄밀히 말하면 용마력이 안 남는 건 아니야. 잔여 용마력을 인간이 인식할 수가 없는 거지.”
인식할 수 없으니 써먹을 수 없고, 써먹을 수 없으니 돈도 안 된다.
게다가 용의 섬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다른 던전이나 유적에 비해 심각하게 돈이 안 되는 주제에…….”
술집 주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찾아가는 데는 또 엄청나게 돈이 드니까 말입니다.”
내륙이라면 어떻게든 찾아갈 수 있다. 두 발로 걷건 말을 타건 간에, 모험가들의 역량으로 어떻게든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용의 섬은 바다 한복판이다. 무조건 배 타고 가야 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저 배라는 물건은 선원이 있어야 움직이지.
모험가들의 역량과 아무 상관 없이, 따로 배를 빌리고 선원을 고용해야 거기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비용은 엄청난데 건질 건 전무한 용의 섬에 가려는 모험가가 많을 리 없었다. 초반에만 반짝 인기를 끌고 삽시간에 발길이 끊겼다.
“그나마 용마력을 연구하는 마법사분들이 간혹 찾아오긴 했습니다만…….”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발길을 끊긴 마찬가지였다.
물론 용의 섬이 연구 자료로 제법 쓸모가 있긴 하다. 드래곤 랜드까지 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데 비해 용의 섬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니까.
그러나, 마법사들은 차라리 목숨 걸고 드래곤 랜드까지 가는 걸 선택했다.
용의 섬은 비용이 막대하게 들어가는 반면 건질 거라곤 전혀 없지만, 드래곤 랜드라면 가는 길에 마물 사냥이라도 해서 경비를 벌 수 있거든.
아무리 마법사라도 경제 논리에서 자유로울 순 없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레번이 실소를 흘렸다.
‘맙소사, 이래서 목숨보다 중한 것이 돈이란 소리가 나오나?’
이런 이유로 용의 섬을 찾는 사람들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어느새 아무도 찾지 않는 잊힌 장소가 되었다.
당시 모험가들의 활기를 기억하는 항구 주민들만이 간혹 용의 섬을 떠올릴 뿐이었다.
“그렇군, 용의 무덤이라.”
카르나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서식지라면 말도 안 되지만 용의 무덤이라면 충분히 이곳 남해에도 있을 수 있다.
“용들이라고 죽고 싶을 때 죽는 것도 아니고, 사고당해서 죽었다면 시체가 어디 있건 이상할 게 없지.”
그때 세라티가 비밀 전언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몰랐어요?]
[뭘 몰라?]
[여기가 용의 무덤이라는 거요.]
[모를 수도 있지, 그걸 왜?]
[그게 아니라, 카르나크 님은 사령술사잖아요. 사령술은 원래 뼈다귀랑 친하지 않나?]
표현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카르나크는 바로 알아들었다.
용의 뼈라면 사령술사인 그에겐 꽤나 큰 가치를 지닌 물건이 아니냐는 말.
[혹시 드래곤 본이 사령술로 써먹기에는 안 좋은 물건인가요?]
그렇다면 좀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어릴 때 본 모험담 중엔 많은 사악한 사령술사들이 드래곤의 뼈를 일으켜 세워 언데드 드래곤을 부리곤 했으니까.
과연 카르나크는 세라티를 실망시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