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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왕 카르나크 12권
임경배 정통판타지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제국의 대마법사
여명의 탑
또다시 제국행
빛의 권속
대마법사를 찾아서
1
제국의 대마법사
죽음의 신 테스라낙을 섬기는 검은 신의 교단에는 교도들을 다스리는 3명의 성인이 존재했다.
어둠의 법왕, 드렐타인 텔릭스.
파괴의 성녀, 엘레자르 데 리플라시온.
죽음의 교황, 제덱스 티엘란드.
이들은 테스라낙의 계획에 따라 이 시대로 회귀해 검은 신의 교단을 세웠다. 그리고 각자 오러와 마나, 신성력을 담당해 교도들에게 사령력과 기존의 권능을 융합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제덱스가 카르나크에 의해 피안으로 돌아가 버렸다.
신성력을 담당하는 축 하나가 비어 버린 것이다.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러니 발레리아, 그대가 왜 여기 있는지는 알겠네만…….”
드렐타인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눈앞의 주근깨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당신이 먼저 회귀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말이지.”
테스라낙이 우선적으로 엘레자르를 회귀시킨 이유는 정말 별게 아니다. 그냥 그녀가 제일 앞줄에 섰다는 이유뿐이다.
반면 드렐타인과 제덱스가 선택된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엘레자르를 회귀시킨 시점에서 비로소 문제를 발견하고, 아슬아슬하게나마 허용 범위 내에서 둘을 더 보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래서 현시점에서 유일한 무왕인 드렐타인과, 가장 나이가 많은, 그래서 현시대의 타락한 교황들 중에선 신성력이 가장 높은 제덱스를 고른 것이다.
반면 발레리아는 일곱 교황들 중에서 가장 어렸다.
물론 미래에야 바다의 교황에 어울리는 강력한 신성력을 얻겠지만 현시점에선 그저 평범한 17세 소녀 견습 신관일 뿐이었다.
“딱히 발레리아 당신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이왕이면 게오르그나 에반더처럼 현시대에도 자리를 잡은 이를 부르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드렐타인의 의문에 엘레자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게 말이죠…….”
발레리아를 선택한 것은 엘레자르였다.
일부러 발레리아의 현 육신을 찾아 납치한 뒤, 역시공 초월체를 통해 특별한 의식을 거쳐 미래의 그녀를 강림시켰다.
“다른 교황들은 현세의 육신을 납치하기가 영 까다롭더라고요.”
“음?”
드렐타인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다른 교황들도 현시점에선 대부분 지위 낮은 일반 신관들일 뿐이지 않나?”
엘레자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역사에서는 그랬죠.”
원래 역사에서 이 시대는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사령왕 테스라낙이 아직 두각을 드러내기 전, 3인의 대마법사와 4대 무왕으로 대표되는 탄탄한 체계가 확립되어 대륙 간에 힘의 균형이 맞춰져 있었다.
세상이 평화로우면 두각을 드러낼 기회도 그만큼 적은 법이다.
미래의 타락한 교황들 또한 이 시점에선 틀에 박힌 조직 생활을 하며 평범한 신관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세상이 변한 이유가 바로 사령왕 테스라낙의 등장.
테스라낙이 세상을 어지럽히기 시작하자, 그제야 저들 또한 본인의 재능을 드러내고 여신교 내에서 입지를 다져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종국엔 교황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잖아요? 우리 탓이지만.”
현시대는 기존의 역사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종말의 어둠이 창궐하며 대륙 전역이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강력한 성직자가 두각을 드러낼 기회도 많아졌다.
미래의 교황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려 교황이 될 정도로 재능이 출중한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과연 조용히 지내고 있을까?
테스라낙에게 무릎 꿇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지키고 악을 처단하려는 정의감과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었는데?
엘레자르가 실소하며 말을 이었다.
“현세의 다른 교황들은 전원 교단의 적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전원 파사의 여단, 혹은 7왕국의 킹스 오더에 소속되어 심문관으로 활동 중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납치하기가 영 까다롭더군요.”
이는 세상에 알려진 엘레자르나 드렐타인이 직접 나설 수는 없는 사안의 일이다.
“그렇다고 드러난 세력을 쓸 수도 없으니 검은 신의 교도들에게 납치를 명령해야 하는데…….”
원래 역사와 달리 현시대의 교황들은 1급, 혹은 특급 심문관으로 성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충분히 뛰어난 재능과 사명감을 지닌 이들이 환란을 맞이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자고로 강력한 성직자는 흑마술의 좋은 제물인 법.
그리고 사교도들이 제일 증오하는 이가 바로 여신교의 심문관이다.
딱히 미래의 교황이 아니더라도, 사교도들은 심문관을 납치해 이런저런 의식을 치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덕분에 평소에도 우리 교단이 무슨 짓 할까 봐 굉장히 경계하고 있다 보니 함부로 건드리기가 어렵더군요.”
물론 작정하고 납치하려 하면 못할 것이야 없겠지만, 예상치 못한 사태가 터질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
그럴 바엔 안전하게 가는 게 나았다.
발레리아는 현시점에서 아직 견습 신관에 불과했으니, 심문관들과 달리 딱히 신변 보호를 신경 쓰는 처지가 아니었다.
“……우리가 저지른 짓이 우리 발목을 잡은 건가? 일을 진행시키려니 이런 문제가 다 생기는군.”
상황을 이해한 드렐타인이 혀를 찼다.
엘레자르가 말을 이었다.
“아까부터 사령력이 모자라다고 한 이유도 이것이구요.”
아직 어린 발레리아를 빠르게 제덱스의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그래야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래서 비축해 놓았던 상당량의 어둠을 그녀에게 지원해 신성력으로 바꾼 것이다.
“덕분에 이 정도까진 회복이 되었지요.”
방실방실 웃으며 발레리아가 양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선명한 여신의 빛이 그녀를 중심으로 퍼져 나왔다.
파아아앗!
만약 다른 성직자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기겁했을 것이다.
고작 17세 소녀에게서 추기경에 필적할 방대한 신성력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물론 무왕과 대마법사에겐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교황급이라 할 정도는 아니군.”
“아직 완성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제덱스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수준까진 되었으니…….”
빛을 거두며 발레리아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제가 죽음의 교황입니다.”
“그렇군.”
드렐타인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발레리아의 자격을 트집 잡은 것은 딱히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능력이 충분하다면 아무 문제 없다.
“그렇다면 아까의 질문을 다시 해야겠군.”
발레리아를 똑바로 보며 드렐타인이 물었다.
“정말 이것이 테스라낙 님의 뜻인가?”
“예, 확실해요.”
주근깨 소녀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려 오기 전, 그분을 직접 배알하고 말씀을 들었으니까요.”
* * *
아득한 공허 속 어둠.
한 그루 나무 아래 한 소녀가 신의 목소리를 접한다.
“저흰 어찌하오리까?”
“계획대로 행하라.”
“이것이 계획대로인지 두렵나이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저 명한 대로 행하라.”
“물론 그리할 것입니다. 하나 당신의 뜻을 곡해할까 두렵나이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저 원하는 대로 하라.”
“그렇다면 그를 죽여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난 그를 살려야 한다고 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금하지 않으셨습니까?”
“죽음을 금하는 것이 생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하기 어렵나이다.”
“이해할 필요 없다. 저들에게도 이리 전하라.”
죽음의 신이 신탁을 내렸다.
“제국을 벗어나지 않는 한, 만사가 형통하리로다.”
* * *
드렐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대체 그 카르나크란 자를 어찌하란 말씀인 거요?”
엘레자르가 동감이란 표정을 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녀 역시 발레리아에게 테스라낙의 신탁을 전해 들었을 때 비슷한 심정이었다.
카르나크가 역시공 초월체를 지니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니 그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하다.
하지만 그녀와 드렐타인은 제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7왕국으로 사람을 보내 처리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말로카와 레번 스트라우스가 패했다. 현재 검은 신의 교단엔 저들보다 더 강력한 패가 존재치 않는다.
반면 카르나크는 어느새 8서클의 마법사가 되었고, 주위에 강력한 오러 유저들이 대거 포진해 있으며, 이제는 무려 스트라우스의 보호까지 받고 있다.
‘게다가 정황상, 황혼교와도 뭔가 밀약이 있는 것 같고.’
개인의 능력도 세력의 강함도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테스라낙은 저자를 대체 어찌해야 할지 그 무엇도 확언을 하지 않는다.
답답하다.
왜 저렇게 애매한 말씀만 해 주시는 걸까?
‘아니, 이상할 건 없지. 원래 그런 분이었으니까.’
오직 자신의 심복에게만 마음을 열 뿐, 그 외엔 전부 담을 쌓고 살았으니까.
그러다 엘레자르는 문득 의아해했다.
‘……심복?’
테스라낙에겐 심복이 없다.
오직 스스로 유일한 존재일 뿐.
‘그런데 왜 이런 이미지가 떠오른 것이지?’
하지만 의문은 금방 사라졌다.
마치 떠올린 적 없는 것처럼 뇌리에서 지워지며 흐릿한 기억 너머로 녹아내린다.
남은 것은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각오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