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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왕 카르나크 8권
임경배 정통판타지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사령왕 테스라낙
혼돈의 역습
총독 보관소
우리 동네 아크 리치
제스트라드 탈환전
1
사령왕 테스라낙
레번은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웬 악령이 자기 몸을 차지하려 드는데, 그게 실은 자기 자신이라고?
그런데 옆 나라 킹스 오더인 줄만 알았던 동료가 알고 보니 사령술사라서 어둠의 힘으로 그를 구했다고?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은 사령술사의 권속이 되었다고?
여기까지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인데, 이어진 상황이 지나치게 상식을 초월한다.
뎀피스에게 밀리던 세라티 경의 말투가 남성처럼 변하더니 대뜸 퍼플 나이트가 된 것이다!
‘적색급이 하루아침에 청색을 넘어 자색급이 됐어?’
알려진 역대 무왕의 모든 사례를 통틀어도 저런 경우는 없었다.
에밀은 고사하고 아버지, 당대의 무왕 갤러드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정체가 뭐지?’
9서클의 마스터인 아크 리치를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는 사령술을 구사하는 킹스 오더의 마법사, 카르나크.
하루아침에 오러 각성 단계를 두 단계나 뛰어넘은 하늘이 내린 천재, 세라티.
레번이 가장 높이 평가한 바로스 경이 오히려 제일 평범해 보일 지경이 아닌가?
심지어 이걸로 끝도 아니다.
자색급이던 세라티가 갑자기 온몸에서 어둠을 뿜어내며 한 번 더 변했다. 그러더니 저 아크 리치, 전설 속의 괴물을 일격에 쓰러뜨려 버렸다!
‘맙소사…….’
쓰러지는 뎀피스를 바라보며 레번은 신음을 흘렸다.
눈앞의 모든 광경에 현실성이 없었다. 그저 한없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 * *
바로스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간다.
육체를 되찾은 세라티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크윽! 윽!”
예전에 몸 빼앗겼을 때도 비슷했다.
그토록 무리를 했으니 당연히 전신이 미칠 듯이 아프다.
그래도 그때보다 나아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오러를 이용해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
‘으, 오러 돌려야지, 오러.’
바로스에게 배운 대로 열심히 오러를 운용해 응급처치를 하니 겨우 고통이 가라앉았다.
비틀대며 일어나는 그녀를 향해 바로스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몸은 괜찮아요? 많이 아프려나?”
사전 동의도 없이 대뜸 몸부터 빼앗았으니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눈치를 안 볼 수 없다.
한숨을 쉬며 세라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틸 만해요.”
“죄송합니다. 워낙 상황이 다급했는지라…….”
“살았으니 됐죠, 뭐.”
물론 세상엔 그 정도의 양심조차 없는 놈도 분명 존재한다.
“잠깐, 세라티.”
카르나크가 인상을 쓰며 따져 댔다.
“너 아까 감히 나한테 욕했지?”
아까 그녀가 던진 막말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짓은 싹 잊은 주제에 말이지.
그런데 세라티의 반응이 의외였다.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그를 돌아본다.
“아까는 잘하셨어요, 카르나크 님.”
갑자기 칭찬을 들은 카르나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나?”
일단 본인도 자신이 칭찬 들을 짓을 하지 않았다는 자각은 있는 듯했다.
“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죽었을 테니까요.”
“어, 뭐, 그렇긴 하지.”
어색해하며 카르나크가 뒷머리를 긁을 때였다. 세라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죠?”
“뭐가?”
“빙의 말이에요. 이번이 마지막인 거죠?”
빙의를 자주 당하면 숙주의 영혼은 미쳐 버린다.
이미 바로스는 두 번이나 세라티의 몸을 빼앗았다. 또 저지르면 정말 그녀의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힐 가능성이 너무 크다.
“그래, 더 이상 빙의를 시도하면 위험하다.”
“그렇다고 다시는 하지 말란 말 같은 건 안 해요. 모두가 죽게 생겼는데 다른 방법이 없다면, 뭐라도 해야 한다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죠. 그건 저도 인정해요.”
하지만 확실하게 인식할 필요는 있다.
이는 세라티를 희생해서 카르나크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행위라는 것을.
“예전처럼 살기 싫으시다면,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알아주셨으면 하거든요. 카르나크 님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니었다. 카르나크도 안색을 굳혔다.
“알았다. 명심하도록 하지.”
엄숙하던 세라티의 표정이 풀렸다.
“그럼 됐어요. 어쨌든 카르나크 님 덕분에 우리 모두 살았잖아요?”
“고마워, 이해해 줘서.”
“천만에요. 상황이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저도 권속이 되고 얻은 게 적지 않은걸요. 감사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방긋 웃으며 그녀가 장난스러운 윙크를 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만큼 최선을 다해 조언을 드려야죠.”
“그렇군.”
카르나크도 마주 웃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동시에 살짝 찜찜한 느낌도 들었지만.
‘가만, 뭔가 잊어버린 기분이 드는데?’
등을 돌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세라티였다.
‘휴우, 이걸로 쌍욕 박은 건 무사히 넘어갔네.’
그래도 나중에 다시 떠올릴지 모르니 잽싸게 화제를 돌리자.
세라티가 쓰러진 뎀피스를 가리켰다. 슬슬 연신 뿜어내던 어둠과 악령은 거의 다 사라진 후였다.
“이제 저 아크 리치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안 그래도 어둠 다 빠지길 기다리던 차였다.
“고민 중이야.”
대꾸하며 카르나크가 발걸음을 옮겼다.
“예전의 나였다면 앞뒤 안 가리고 지배의 낙인부터 찍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곤란하다.
“딱히 예전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니고…….”
단순히 그럴 능력이 없었다.
“지금의 내가 아크 리치에게 지배력을 행세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 적당히 정보만 빼내고 영혼을 소멸시키는 게 제일 무난한데, 사실 이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크 리치는 권능과 영체가 융합되어 있다. 영혼 상태로도 만만찮은 존재라, 강령술 쓴다고 쉽게 지배되지도 않는다.
“일단 살펴보고 상황 봐서 결정해야지.”
바닥의 해골에 손을 뻗으며 카르나크가 안색을 굳혔다.
“위험하다 싶으면 정보고 뭐고 포기하고 빠른 소멸 가는 거고.”
그렇게 잠시 어둠을 흘려 뎀피스의 상태를 파악할 때였다.
‘어?’
뭔가 이상한 것이 존재했다.
‘계약의 낙인?’
누군가가 뎀피스의 영혼에 강렬한 낙인을 새겨 놓았다.
‘내 건 아닌데 뭔가 있다는 게 이거였나?’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그 낙인이 과거 카르나크가 뎀피스에게 새겼던 것과 지나치게 똑같다는 것이었다.
똑같은 술법, 똑같은 위치, 똑같은 대상.
심지어 낙인에 들어간 사령력의 속성과 술식마저도 똑같다.
다른 점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낙인을 새긴 자, 언령의 주인 된 자의 이름.
‘테스라낙…….’
비유하자면, 동일한 계약서에 사인만 다른 사람 것이 쓰여 있는 수준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똑같을 수가 있지?’
어쨌든 이 경우라면 선택지가 하나 더 늘어난다.
‘이거, 이름만 바꾸면 내게 종속시킬 수 있겠는데?’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현재 그의 사령력으로도 가능한 수준이었다.
충분히 시험해 볼 가치가 있다.
‘잘 풀리면 쓸 만한 노예 하나 얻는 거고, 검은 신의 교단이며 테스라낙에 대한 쓸모 있는 정보도 얻을 수 있겠지.’
실패하면?
‘이대로 박살 내 버리면 그만이고.’
양팔을 걷어붙인 뒤 카르나크는 낙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좋아, 해 보자!”
사령력을 침투시키며 정신을 집중한다.
“어둠의 주인, 카르나크 제스트라드의 이름으로 명한다…….”
그렇게 테스라낙의 낙인을 막 건드릴 때였다.
‘어?’
지나치게 쉬웠다.
마치 처음부터 그의 낙인이었던 것처럼 계약의 모든 권리가 자연스럽게 넘어오고 있었다.
“으으음…….”
희미한 신음과 함께 흩어진 뎀피스의 뼈가 도로 붙는다.
인간의 해골이 허공에서 재조립되며 그 위로 아크 리치의 영기가 덧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