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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취향 1권
단꽃비 장편소설
목차
1화
2화
3화
4화
5화
6화
7화
8화
9화
1화
9월의 한낮, 가을에 들어섰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무더운 날씨였다. 목덜미를 끈끈하게 적신 땀을 식히기 위해 긴 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동미가 제 앞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문가의 케어를 받았을 게 분명할 여자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이마 가장자리가 보송보송한 것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양이다.
늦게 왔으면서도.
“저, 누군지 알죠?”
세 시에 만나자고 했던 여자는 세 시 반이 넘어서야 나타났다. 기다리던 동미가 못 참고 일어서려던 순간에 등장한 거다. 그래 놓고 사과는커녕 미안한 기색조차 없었다.
거기다 앉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저거였다. 전 국민이 아는 나를 네가 모를 리 없다는 여자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알죠, 은해서 씨.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잖아요.”
웃으며 장단 맞춰 주니 은해서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긴 머리카락을 귀에 꽂았다. 그러자 잡티 하나 없는 뽀얀 피부가 맑게 빛났다.
피아노 여신, 국민 첫사랑, 청순함의 대명사. 모두 동미의 앞에 앉은 은해서에게 붙은 별명이었다.
“그런데 동……희 씨? 동……, 뭐더라.”
은해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슬쩍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작위적이었다. 미미하게 올라간 입가에는 채 숨기지 못한 비웃음이 역력했다.
“동미요. 고동미입니다.”
동미가 제 이름을 정정해 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고작 이 정도의 도발에 평정심을 깨뜨릴 그녀가 아니었다.
먼저 만나자고 연락해 온 상대가 이름을 까먹었다며 물어 오는 건 둘 중 하나일 테다.
머리가 나쁘거나 혹은 상대를 우습게 여기고 있거나.
“아, 맞다. 요즘은 그런 이름 찾아보기 힘들잖아요. 어머니 친구분이랑 비슷한 이름이어서 헷갈렸네요. 이름 촌스럽다고 놀림 많이 받으셨겠어요.”
동미는 은해서가 둘 다에 해당한다고 결론 내렸다. 심지어 그녀는 유치하기까지 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내뱉은 말이 고작 이름 가지고 놀리는 거라니. 동미의 붉은 입술 새로 실소가 흘렀다.
“오랜만이네요.”
“뭐가요?”
“이름으로 놀림받은 거요. 초등학생 고학년만 되더라도 유치한 짓이 시시해지잖아요.”
“…….”
네 비아냥거림은 초등학교 고학년만도 못한 수준이라고 돌려 말하는 동미의 미소에 은해서의 얼굴이 빨개졌다. 입술을 꾹 깨물고 노려보는 얼굴이 정말이지 어린애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미는 빨대를 집어 들었다. 얼음이 가득 찬 아메리카노를 휘휘 저으며 은해서를 응시했다.
우아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방식으로 질투하는 은해서는 기대했던 것보다 시시했다. 상대를 얕잡아 보는 시선은 오만했고 거리낌 없이 내뱉는 말투는 가벼웠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러고 있는 건 시간만 아까울 뿐이다.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기 싸움은 동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보자고 하신 이유는요?”
“익헌이랑 결혼하신다고 들었어요.”
“아……?”
“아직 대외적으로는 비밀인 거 알지만, 불쾌하게 생각지 마세요. 저랑 익헌이,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였어요. 서로의 집 구조까지 다 아는 사이거든요.”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스듬히 웃는 은해서는 오늘 아침 동미에게 연락해 왔다. 자신이 윤익헌의 친구라고,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니 만나자고 했다.
윤익헌. 동미는 저를 이 자리에 나오게 한 원인 제공자를 잠시 떠올렸다.
익헌은 동미가 일하는 해원 조명에 조명 하도급을 준 MH 건설의 품질관리팀장이었다.
지난 6월 미팅에서 협력사 담당자인 그를 처음 만났다. 알고 지낸 지는 이제 겨우 석 달째였다.
그러나 동미는 그를 만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프러포즈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틈만 나면 프러포즈해 왔다.
처음으로 그가 결혼을 제안했을 때 동미가 정색한 것은 당연했다.
‘윤 팀장님, 혹시 미쳤어요?’
‘일곱 살 때부터 작년까지, 총 네 번에 걸쳐 검사해 봤는데 정상 범주에 속한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공감 능력이 떨어져 사회성이 부족할 뿐입니다. 고동미 씨를 해칠 일은 없습니다. 안심해요.’
그 후로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맡은 업무가 있기에 그와 연락은 해야 했다. 우스운 건 그는 결혼에 관한 제안을 할 때 빼고는 너무나 괜찮은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거였다.
멀쩡한 얼굴로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설명한 그는 계속해서 동미를 설득했다. 때로는 은근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결혼을 종용했다.
그러다가 한 달 전, 그의 끈질긴 프러포즈에 질렸을 때쯤, 그가 제안서를 내밀었다. 결혼 제안서였다.
동미는 얼떨떨한 상황에 저도 모르게 그 결혼 제안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며칠을 고민하다가 특정 부분에 대해 수정을 요구했다.
‘종신 계약이라니, 말도 안 돼요. 일 년 단기 계약으로 해요.’
‘…….’
‘일 년, 단기. 아니면 안 해요.’
당당히 종신 계약을 요구하는 남자에게 정색한 뒤 계약 기간을 일 년으로 후려쳤다.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던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동미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렇게 완성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게 2주 전이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악수까지 하였다. 적당히 예의 차린 미소와 정중한 태도가 동반된, 별다른 것 없는 계약 체결이었다.
다만 그 계약이 두 사람의 결혼을 위한 거라는 게 특별하다면 특별하달까. 아니, 특별할 것도 없지. 소설이며 드라마에 널린 게 계약 결혼인데.
‘어차피 연장하게 될 겁니다.’
‘그럴 일 없을걸요.’
‘왜 장담하지?’
‘내가 안 할 거니까?’
은근한 반말에 확실한 반말로 응수하며 동미는 계약 연장은 없을 거라고 못 박았다.
사실, 동미에게 결혼은 남의 얘기였다. 혼자여도 재미난 세상, 타인과 쪼개어 쓸 시간이 없었다. 누군가는 못 해서 안달이라는 연애도 귀찮은 마당에 결혼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동미는 돈이 제일 좋았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통장 계좌에 든 돈만 생각해도 못 견디게 행복한데 남자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분명히 그랬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데 만날 때마다 프러포즈를 해 오는 남자로 인해 언제부터인가 ‘결혼’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결국,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남자에게 어영부영 휩쓸려 버렸다. 그 결과 제 손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만 거다.
지난 몇 달을 돌이켜보면 도장을 찍은 당사자인 동미도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남들이 알게 되면 오죽할까. 그래서 계약 내용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그런데 계약 당사자 두 사람 외에는 누구도 몰라야 할 것을 은해서가 알고 있었다.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 동미가 쓰게 웃었다.
“네. 그렇게 됐네요.”
“결혼 앞두고 괜한 오해가 없도록 아실 건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만나자고 했어요.”
“말씀하세요.”
“저, 익헌이랑 결혼 준비하고 있었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처연하게 눈을 내리깐 은해서를 보며 동미가 실소를 삼켰다. 갑자기 상황이 재미있게 느껴진 거다.
“익헌이 할머님이신 허 회장님께서 저를 아기 때부터 예뻐해 주셨거든요. 저희 결혼, 꽤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었어요.”
“아아, 그러셨구나.”
“네. 양가 분위기도 좋았고요.”
“네에.”
“올해 하반기에 잡힌 유럽 투어만 마치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결혼을 준비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너무 바쁘니까 익헌이가 심술이 났나 봐요. 계약 결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걸 보면……. 우리 익헌이는 그럴 애가 아닌데.”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내뱉은 말에 윤익헌을 향한 애정이 그득했다. 말끝마다 익헌이, 익헌이라며 친분을 과시하는 빤한 수작질에 동미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의를 끈 말은 따로 있었다. 은해서가 익헌과 동미가 계약을 기반으로 한 사이임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밀이라더니. 그 남자, 은해서에게는 다 말한 모양이다. 계약 사항 하나 위반할 때마다 위약금이 얼마더라?
아픈 입술에 가만히 얼음 조각을 대고 있던 동미의 입술이 비스듬히 휘었다. 통장에 꽂힐 돈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난 것이다.
“고동미 씨, 왜 웃어요?”
“아, 제가 웃었나요?”
“내가 우스워요?”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치뜬 은해서는 동미의 웃음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동미는 저를 향한 적의를 선명히 드러내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미모와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전 세계에 팬을 둔 은해서는 재벌가의 막내딸이기도 했다.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을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윤익헌, 그 남자가 뭐라고.
“그러고 보니 조금 우습네요.”
“…….”
“더 우스워지기 전에 하고 싶은 말씀, 하시죠. 모르시겠지만 오늘 저는 황금 같은 연차를 쓰고 나온 참이어서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분함을 참는 은해서를 보며 동미는 다시금 익헌에 대해 생각했다. 은해서가 안달해 마지않는 그의 매력에 대해서.
잘생긴 것, 몸 좋은 것은 인정했다. 윤익헌은 외모만 놓고 봤을 때는 찬양받아 마땅한 남자였다. 그 좋은 대학을 수석으로 조기 졸업했을 정도이니 머리가 좋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거기다 금수저답게 돈도 많고 업무 능력도 좋다. 성격이 더럽게 까칠하다는 것 빼고는 흠잡을 데 없는 남자기는 했다.
하지만 은해서 정도면 주변에 그런 남자들이 윤익헌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 거다. 그런데 왜. 은해서는 윤익헌한테 꽂혔을까.
동미는 윤익헌의 매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가뭄에 콩 나듯 보여 주는 멍한 얼굴이 귀엽기는 했다. 슬며시 눈썹을 찡그릴 땐 섹시한 면도 있다.
일할 때는 온기라고는 없는 로봇같이 굴면서 꽤 뜨거운 체온을 가진 남자라는 게 의외이기는 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저를 안은 그의 품이 아늑했다는 걸 동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그랬지. 그날 윤 팀장 꽤 괜찮았어.
어느 날의 기억을 곱씹는 동미를 노려보던 은해서가 참지 못하고 다리를 꼬았다. 팔짱을 낀 채 호승심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동미 씨. 같은 여자로서 충고해도 될까요?”
“하세요.”
“동미 씨, 되게 예뻐요. 알아요? 이렇게나 예쁜데 왜 사랑 없는 결혼을 하려고 해요? 우리 익헌이랑 뭘 두고 계약했는지는 몰라도 결혼은 그렇게 하는 거 아니잖아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은해서 씨.”
동미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으며 은해서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은해서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아니, 내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요!”
“들을 가치가 있어야 듣죠.”
“뭐, 뭐……?”
“일단, 저도 제가 넘치게 예쁜 건 알고요.”
동미가 화려한 이목구비가 돋보이도록 턱을 들어 미소 지었다. 은해서가 내세우는 청순미를 기죽일 목적이었다.
같잖은 충고는 잘라먹어야 마땅했다.
“하나만 물을게요. 윤 팀장이 은해서 씨 사랑한대요?”
“…….”
“사랑, 한대요?”
몸을 기울여 가며 묻는 동미에게 다른 뜻은 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다고 소문난 남자가 사람을 대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어 본 적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자기 입으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인정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사랑 고백을 한 적이 있기는 할까. 동미는 그게 궁금했다.
“……그게, 우리 익헌이 성격이 좀 차갑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게 꼭 말로 한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한 건 아니네요?”
“…….”
“국민 첫사랑이라고 불리는 은해서 씨도 윤 팀장의 첫사랑은 아니었나 봐요. 하긴, 윤 팀장에게는 뭐든 내가 다 처음이라던데.”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절로 피어나는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반 이상 비어 버린 컵을 들어 올리던 동미는 문득 어젯밤 익헌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흐, 숨, 숨 좀!’
‘하아…….’
어젯밤, 지난 두 달 내내 그랬듯 제 입술에 달라붙어 있던 남자는 숨 막힌다고 한껏 밀치고 때리고 나서야 겨우 떨어졌다.
진득하게 늘어지는 타액이 조명 아래 반짝였고 늘 무미건조하던 눈빛은 욕망으로 들끓었다. 덜컥 겁이 나서 한 발 물러나려다 또다시 붙들렸다. 그런 뒤에는…….
“후…….”
그때를 생각하니 더워지는 것만 같다.
은해서는 익헌을 가리켜 차갑다고 했다. 처음 익헌을 봤을 땐 동미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틈에 변한 걸까. 그 차갑던 남자가 키스는 왜 그렇게 뜨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