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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를 타고 두어 시간쯤 달렸을까.
나는 시무어 백작가로 보이는 한 저택에 도착했다. 연하늘색 박공지붕이 올라간 3층짜리 저택은 에스테 공작가만큼 크고 호화롭진 않았지만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멋이 있었다.
마부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자, 현관 앞에 서 있던 시무어 백작가의 집사가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성녀님이자 에스테 공작부인이신 에반젤린 록산느 에스테 님을 뵙습니다. 저는 이곳 시무어 백작가의 집사장인 바이론 자작이라 합니다.”
“반가워요, 바이론 남작.”
“백작님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집사장은 내 손등에 입맞춤한 후, 나와 제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마부에게 그곳에서 대기할 것을 명하고서 제인과 함께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소박한 내부와 다르게 저택 내부는 아주 호화로웠다.
나는 집사를 따라 걸으며 복도 벽에 붙은 그림들을 흘끔거렸다. 그사이 집사장이 응접실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정중하게 문을 노크하며 말했다.
“백작님, 성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게.”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집사장이 내게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다리를 꼬고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붉은기가 도는 짧은 갈색 머리를 자연스럽게 내리고 금실로 자수를 놓은 남색 예복을 걸친 그의 모습이 꽤 준수했다.
그는 먼저 내게 정중히 한쪽 무릎을 굽혀 보이더니 내 손끝을 붙잡고 그 위에 입맞춤했다.
“성녀 에반젤린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네, 반가워요. 에드먼드 펄프스 시무어 백작님.”
나는 그가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빼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시무어 백작은 서신만큼이나 느끼하다 싶을 만큼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자리를 권했다.
나는 그가 권한 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응접실의 하녀들이 따뜻한 차와 살구 잼이 듬뿍 든 자허토르테 한 조각을 가져왔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한 후, 나를 홀린 듯 바라보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갑자기 백작을 만나고 싶다고 했는지 백작도 궁금하겠죠.”
“실은 그렇습니다.”
“돌려 말하는 건 싫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시무어 백작, 내게 백작이 가진 라클레 성과 그 영지를 팔아 주지 않겠어요? 땅값은 후하게 쳐 드릴 테니까요.”
내 말에 시무어 백작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라클레 성이라면 그 골칫덩어리나 다름없는 델라도 화산이 있는 그 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바로 그 땅이요.”
나는 딱 잘라 대답한 후, 품속에서 수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수표에는 윈디 후작부인에게서 받은 사례금의 반의반 정도 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정도 금액이면 되겠죠?”
“……으음.”
그런데 수표를 내려다보는 시무어 백작의 태도가 어딘가 모르게 좀 이상했다.
그는 묘한 시선으로 나와 테이블 위에 놓인 수표를 번갈아 가며 살폈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테이블 위의 수표를 내 앞으로 밀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아뇨. 돈은 필요 없습니다. 성녀님께서 원하신다면 그 땅을 그냥 드릴 수도 있거든요.”
나는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나는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그에게 말했다.
“조건을 들어 보고 싶은데요.”
시무어 백작은 느끼하게 미소 짓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며 답했다.
“제게 성녀님과 데이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네?”
그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경악하며 소리쳤다.
‘지금…… 나랑 뭘 하자고?’
나는 당장이라도 미쳤다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이 무슨 뜻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설마하니 내가 결혼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시겠죠?”
“아, 절대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여신을 믿는 이가 어찌 결혼한 여성과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그럼요?”
“저는 그저 성녀님과 예쁘고 좋은 곳에서 만나서 맛있는 식사를 몇 번 함께하고 싶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여느 숙녀들처럼 말이지요.”
시무어 백작은 빙글거리며 그렇게 받아쳤다.
나는 여전히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몇 번 만나서 식사나 함께하자는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거라고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 성녀님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성녀님과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
“그러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번만 저에게 시간을 내주십시오. 성녀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그까짓 라클레 땅쯤은 그냥 내어드리지요.”
“……제가 거절한다면요?”
내가 떠보듯 물었다. 그러자 백작이 슬쩍 표정을 굳히며 답했다.
“그럼, 오늘 제안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제게 라클레 성을 팔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성녀님께서 오늘 제게 제시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하셔도 팔지 않을 겁니다.”
나는 딱 잘라 말하는 시무어 백작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느끼하게 실실 웃었다.
‘어떡하지?’
마음 같아선 딱 잘라 거절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자니 라클레 성에 숨겨진 다이아몬드 광산이 너무 탐났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할까?’
대체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던 그때였다. 밖에서 발을 쿵쿵 구르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더니 시무어 백작과 비슷하게 생긴 한 여자가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왜 내 서신을 받고도 답장을 안 보내? 내가 얼마나 목이 빠져라 기다렸는지 알아?”
“레, 레니아!”
“어머, 손님이 와 계셨네?”
그녀를 본 시무어 백작은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 레니아라는 여자와 그녀의 옆에 선 남자아이를 눈으로 살피며 백작에게 물었다.
“저분들은 누구시죠?”
시무어 백작이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하아…… 죄송합니다. 성녀님. 이쪽은 제 여동생인 레니아 마리 로안 백작부인입니다. 그 곁에 선 남자아이는 제 여동생의 아들인 제이슨 필립 로안 소 백작이고요. ……레니아, 제이슨! 어서 성녀님께 인사부터 드리거라.”
“어머! 레니아 로안 백작부인이 성녀님이자 공작부인이신 에반젤린 록산느 에스테 님을 뵙습니다.”
“……뵙습니다.”
그의 재촉에 로안 백작부인과 소후작이 황급히 태도를 바꿔 내게 정중히 인사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던 중, 나는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로안? 어쩐지 익숙한 이름인데? 뭐지?’
나는 생각에 잠긴 채 두 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다.
그때였다.
‘아, 기억났다! 제이슨 로안! 유시아를 짝사랑하던 졸부 자식의 이름이잖아?’
이름을 기억해 내자 자연스럽게 그와 엮인 사건들이 줄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이슨 필립 로안.
그는 로안 백작의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나 그리 풍족하지만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로안 백작가는 변변치 못한 지방 귀족 가문이었고 그의 아버지 로안 백작이 무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부자가 된 건 바로 그의 외삼촌이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겨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로안은 그 돈을 갖고 곧장 수도의 사교계에 입성했다. 그는 외삼촌이 남긴 돈을 물 쓰듯 펑펑 쓰며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유시아가 그 점을 지적하며 잔소리할 때면 그는 늘 작중에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뭐 어때! 외삼촌이 정직하게 노력해서 번 돈도 아닌데!’
그랬다.
제이슨 필립 로안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긴 그 외삼촌은 사실 부동산 사기꾼이었다.
‘그럼, 저 시무어 백작이 바로 그 부동산 사기꾼이란 말이야?!’
나는 경악하며 시무어 백작을 바라보았다.
원작 소설에서 유시아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로안의 외삼촌은 은퇴한 용병들이나 농노에서 해방된 자유 농민들에게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지를 축복 받은 비옥한 땅이라고 속여 파는 방법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고 했다.
그 때문에 피해자들은 졸지에 전 재산을 잃고 다시 농노로 전락하거나 빈민이 되고 말았다.
‘와, 완전 나쁜 인간이었잖아?’
어쩐지 영 느낌이 좋지 못하더니!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비난을 퍼붓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생각 같아선 당장 저 인간을 고발해서 적절한 처벌을 받게 하고 싶었다.
‘……잠깐, 처벌?’
그 순간, 머릿속에 아주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시무어 백작이 저지른 사기를 고발하고 폐하로부터 포상금을 받는 것이었다. 원작의 여주인공인 유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이거 잘만 하면 다이아몬드 광산은 물론이고 포상금까지 손에 넣을 수 있겠는데?’
나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이건 그야말로 신이 주신 기회였다.
생각을 마친 나는 시무어 백작을 향해 말했다.
“시무어 백작, 그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정말입니까?”
“네. 세 번이면 된다고 했죠?”
“맞습니다, 성녀님! 후후, 제 제안을 승낙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녀님께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시무어 백작이 내 손을 덥석 붙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기대할게요.”
‘당신의 사기가 적발되는 그 순간을.’
나는 활짝 미소 지으며 그의 말에 화답했다.
* * *
제국 수도, 에스테 공작의 타운 하우스.
그 저택의 주인이자 가주인 에스테 공작 나이젤은 윈스턴 경, 이안 경과 함께 집무실에 머물며 밀린 집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의 높이가 절반으로 줄었을 때쯤 멍한 눈으로 몇 시간째 서류 한 장을 노려보고 있던 이안 경이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으, 으으!”
“시끄럽다, 이안 경.”
그러자 에스테 영지를 지키는 기사단으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를 읽고 있던 윈스턴 경이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안 경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투덜거렸다.
“기지개를 켜는 것도 뭐라고 하십니까, 윈스턴 경.”
“뭐라고 한 적 없다. 시끄럽다고 했지.”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으으, 지루해! 더는 못 참겠습니다! 정말이지 서류 업무는 왜 해야 하는 겁니까! 이런 건 제가 아니라 행정관들이 해야 할 일 아닙니까?”
“바보 같은 소리. 기사단 내부 기밀이 담긴 문서를 어떻게 행정관들에게 처리하라고 하겠나. 그런 말 할 시간이 있으면 빨리 자네 앞에 쌓인 서류나 한 장 더 살펴보게.”
“아, 싫습니다! 저, 더는 못해요! 남은 건 그냥 내일 하면 안 됩니까? 하기 싫어 죽겠는데 억지로 붙잡고 있어 봐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시간만 낭비하는 거잖습니까!”
“……이안 경, 영영 그 내일이 오지 않게 해 줄까?”
서류를 내려놓은 윈스턴 경이 음산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이안 경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