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prologue
1
2
3
4
prologue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맑게 개자 처음 눈에 보인 것은 화려한 프레스코화였다.
‘와, 무슨 병원 천장이 이렇게 화려하담. 모르긴 몰라도 병원비 엄청 나오겠다. 나 돈도 없는데.’
여전히 멍한 머릿속에선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때, 날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내 앞에 불쑥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어머, 정신이 드셨군요!”
나는 깜짝 놀라 그 사람을 올려다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모습이 전혀 한국인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자의 짙은 갈색 눈과 높은 코,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의 하녀들이나 입을 법한 의상을 느리게 눈으로 훑었다.
‘이 병원의 간호사 선생님들은 되게 특이한 유니폼을 입고 일하시네. 신기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시고요?”
“……어. 네. 뒤통수 부근이 조금 욱신거리는 걸 빼면요…….”
그런데 내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 여자가 먼저 내 상태에 관해 물어 왔다.
나는 순순히 내 상태에 대해 답했다.
여자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미간을 거칠게 찌푸리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어휴, 그 영악한 꼬맹이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람.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하셨지 뭐예요.”
“……네? 영악한 꼬맹이라뇨?”
“올리비아 에스테, 그 맹랑한 것이 일부러 성녀님께서 늘 지나다니시는 계단에 비단 공을 놓아둔 게 분명해요! 분명 성녀님께서 그걸 밟고 계단에서 넘어져서 크게 다치길 바랐을 테죠!”
“……네?”
“영악한 마녀 같으니라고! ……아니, 그런데 성녀님께선 왜 그걸 밟고 계단에서 구르신 거예요? 평소처럼 피하실 줄 알았는데. 아! 알겠다. 그 꼬맹이에게 벌을 주시려고 그러신 거죠? 호호.”
여자는 혼자 안도하고, 혼자 화를 내더니 갑자기 사악한 미소를 터트렸다.
나는 뭐라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런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올리비아 에스테? 어쩐지 이름이 익숙한데.’
대체 그 이름을 어디서 들어 봤더라.
내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그때, 모략을 꾸미는 것처럼 낮게 킬킬거리던 여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우리 성녀님께선 다 생각이 있으셨어! 당장 톰 영감에게 소식을 전하고 그 영악한 꼬맹이를 데려올게요!”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잽싸게 방을 나가 버렸다.
덕분에 나는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올리비아 에스테? 영악한 꼬맹이? 마녀는 또 뭐고, 계단은 또 무슨 말인지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
‘나는 분명 최종 면접을 보려고 다급히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였을 뿐인데.’
아무래도 저 간호사인 것 같은 외국인이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여자가 돌아오면 이번에는 꼭 제대로 상황을 설명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조금 전에 날 누고 밖으로 나간 여자와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와.”
그 순간, 나는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자와 함께 들어온 여자아이가 아주 예뻤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치 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금발에 에메랄드 같은 녹색 눈을 가진 여자아이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때, 조용히 방문을 닫은 여자가 싸늘한 시선으로 아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대체 왜 비단 공을 계단에 놓아두신 거예요, 비아 님?”
“…….”
“마님께서 넘어져서 크게 다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거죠?”
“…….”
여자아이는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여자의 표정에 서늘한 분노가 깃들었다. 여자는 못마땅하다는 듯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내리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한 아이는 혼이 나야겠네요, 그렇죠?”
“…….”
“아무래도 우리 공녀님께서 또 쥐가 들끓는 다락방에 끌려가고 싶으신 모양이에요.”
제게 다가오는 여자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 두려움과 증오가 깃들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런 더러운 곳에 이 어린애를 가두겠다고요?”
“당연하죠, 마님. 올리비아 님께서 잘못을 저질렀으니 벌을 받아야 합니다. 뭐, 반성한다면 꺼내 주지 못할 것도 없죠.”
“미친 거 아니에요?!”
그 모습에 기겁한 나는 벌떡 일어나 아이와 여자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애가 그럴 수도 있지, 겨우 계단에서 놀다가 공 좀 놔둔 것 가지고 이 조그만 아이를 그런 방에 가둔다고요? 미친 거 아니에요?”
“……어, 그게…… 마님?”
“마님이고 나발이고 당장 나가요!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예?”
“당장 안 꺼져요?!”
나는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여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런 내 모습에 여자는 당황한 한편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 몸을 움츠렸다. 그러더니 도망치듯 방을 뛰쳐나갔다.
여자가 사라진 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이를 향해 말했다.
“저기…… 너, 괜찮아?”
그런데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이 매서웠다.
마치 자신을 방어하듯 두 팔로 제 몸을 끌어안은 아이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날 거칠게 떠밀어 버렸다.
“윽!”
아이답지 않은 강한 힘이었다. 나는 뒤로 쓰러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이는 그런 나를 노려보며 빽 소리쳤다.
“하나도 안 고마워!”
“……응?”
“나, 다 알아! 삼촌이 돌아올 때가 되니까 나한테 잘해 주는 척하는 거!”
“……으응?”
“에반젤린 아줌마는 나쁜 사람이야! 진짜 싫어!”
그러더니 거칠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덕분에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한 눈으로 아이가 나간 문만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탓에 상황 파악이 안 됐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나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저, 저기, 꼬마야! 너 어디 가! 그리고, 에반젤린 아줌마? 그건 누군데? 삼촌은 또 무슨 소리……! 윽!”
서둘러 아이를 쫓아가려던 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두통에 몸을 비틀거렸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마침 옆에 놓인 화장대에 손을 짚었다. 통증에 흐릿해지는 시야를 바로잡고자 살짝 고개를 흔들던 그때였다.
“……!”
나는 거울에 비친 한 여자의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길게 늘어뜨린 은발, 맑은 호수를 담아 놓은 것 같은 파란 눈. 그리고 하늘하늘한 재질의 흰 드레스를 걸친 거울 속 낯선 여자가 날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거울 속 여자도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번에는 손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거울 속 여자 또한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다급히 숨을 들이켜며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붙잡아 눈앞으로 가져왔다.
내 손에 잡힌 머리카락은 흑발이 아닌, 눈부시게 반짝이는 은발이었다.
나는 멍한 표정을 한 채 중얼거렸다.
“이,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건데?”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생각을 거듭했다.
올리비아 에스테. 성녀님. 에반젤린. 은발에 청안. 화려한 프레스코화 천장. 드레스. 하녀.
그 단어들을 곱씹던 그때였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거…… ‘2대째 성녀님은 세계관 최강자’ 아냐?”
그것은 내가 면접 전날인데도 밤을 꼬박 새워 가며 읽었던 인기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의 제목이었다.
“으악!”
나는 거울에 비치는 은발 미인을 마주 보며 짧게 비명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1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나는 다시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내 머리맡에는 조금 전 여자아이를 다락방으로 끌고 가려던 여자 대신 의사로 보이는 한 노인과 다른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여자는 멍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괜찮으세요, 마님?”
정신을 차린 나는 곧장 여자를 향해 물었다.
“오, 오늘이 며칠이에요?”
“……네? 아…… 3월 4일입니다.”
“그러면, 그 여자아이는 올해 몇 살이죠?”
“네? 올리비아 님이요? 그야, 올해로 일곱 살이십니다만…….”
여자는 의아해하며 답했다.
그녀의 답을 들은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잠깐 나가 줘…… 요. 혼자 있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공작부인.”
나는 허망한 표정을 지은 채 그들을 침실 밖으로 내쫓았다.
그 후, 홀로 남게 된 나는 상체만 일으킨 채 양 무릎에 머리를 괴었다. 뺨으로 흘러내리는 반짝이는 은발과 몸을 감싼 흰 드레스의 감촉이 매끄러웠다.
그 지극히 현실감 있는 감촉에 둘러싸인 채, 나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망했다.”
나는 결 좋은 은발 머리를 쥐어뜯으며 머릿속으로 소설의 줄거리를 떠올렸다.
소설, ‘2대째 성녀님은 세계관 최강자’는 미라지아 제국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마법과 기사, 공작과 황녀님이 공존하는 그 소설은 잘생기고 멋진 남자 주인공 ‘아서 에어릭 팬들턴’ 3황자와 예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여자 주인공 ‘유시아 릴리안 밀로우’ 백작 영애의 성장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 속 두 주인공을 결말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힌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악녀이자 최종 흑막인 마녀 ‘올리비아 로즈 에스테’ 공작 영애였다.
올리비아는 선대 공작 영애인 어머니와 제국 최고의 흑마법사인 아버지가 신분의 차이를 넘은 사랑 끝에 얻은 딸이었다.
그녀는 고작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부모가 모두 죽자, 외삼촌인 ‘나이젤 클라이드 에스테’ 공작에게 맡겨졌다. 공작은 가문 회의 끝에 올리비아를 양녀로 입양했다.
그러나, 그것은 올리비아에게 있어 큰 불행의 시작이었다.
에스테 공작은 올리비아를 방임했다. 마치 사생아였던 아이를 정식으로 입양해 공녀로 만들어 준 것으로 제 의무를 다했다는 듯이.
그러다 보니 아이는 자연스레 공작과 정략결혼 한 아내 ‘에반젤린 에스테’에게 맡겨졌다.
성녀인 에반젤린에게 있어 강한 마력을 지닌 올리비아는 어린아이여도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존재였다. 에반젤린은 올리비아와 마주할 때마다 그 아이의 힘이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공포는 자연스레 분노와 증오를 불러왔고, 그 감정은 곧 에반젤린을 집어삼켰다. 결국, 아이를 진심으로 증오하다 못해 살의를 품게 된 에반젤린은 올리비아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의 잘못을 날카롭게 꼬집는 것에서 시작한 폭언은 점점 수위가 높아졌다. 공작의 눈을 피해 자행하던 은밀한 학대는 에스테 공작이 성을 비울 때마다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