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4. 키스의 의미
5. 서연의 미소
6. 첫날밤
7. 외전
4. 키스의 의미
“미친 ××.”
은철을 향해서 내뱉는 서연의 음성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서연은 더는 그를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의자를 뒤로 밀어냈다. 다이어리와 기획서를 들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탁자를 돌아온 은철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다시 앉혔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지!”
“더는 딴지 걸지 않겠다고 약속한다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남도윤이랑…… 잔 거 맞지?”
“닥쳐,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서연의 표정을 자세히 살핀 은철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뭐야? 왜 자꾸 날 귀찮다는 듯 피하는 건데? 설마…… 김서연 너, 아직도 날 못 잊은 거야?”
“개 같은 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비켜!”
“남도윤이랑 잔 것도 아니고, 그거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잖아. 네가 나한테 예민하게 구는 건, 아직도 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그런 거야. 이제라도 네 마음에 솔직해져.”
서연은 어이가 없는 말을 듣고 있기 힘들어서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착각하지 마! 바보같이 너 같은 놈한테 배신당한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뿐이니까. 기막혀…… 널 아직도 못 잊었냐고? 지금 네 행동, 예리한테 그대로 전해 줄까?”
은철은 상체를 숙이고 의자 팔걸이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꼼짝없이 서연을 가둔 그가 콧등을 씰룩이며 입술을 떼어 냈다.
“묻는 말에 대답 피하는 거 보니까 뻔하네. 아직 자진 않았더라도 너, 남도윤이랑 뭔가 있구나?”
“…….”
“나쁜 년. 혼자서 고상한 척 굴더니, 돈에 환장한 년이었잖아?”
이맛살을 구긴 서연이 은철의 뺨을 때리려 하는 찰나,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노크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건 도윤이었다. 그가 냉큼 서연과 거리를 두는 은철을 바라보며 두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도윤과 시선을 겹쳤다.
“시, 실장님…….”
“김 대리, 회의 끝나는 대로 집무실로 오라고 했는데 왜 아직도 여기에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보고 준비해서 바로 집무실로 가겠습니다.”
대답한 서연이 자기 짐을 들고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을 잠깐 바라본 도윤의 시선이 은철에게로 향했다. 도윤은 멋쩍어하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그를 향해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노려보는 눈동자에 기분이 상한 은철은 일부러 서연과의 과거를 입에 올렸다.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저랑 김서연 대리 사이에 과거가 좀 있어서요.”
“과거?”
“그게 실은…… 김 대리와 오래전에 연인이었습니다.”
“오래전이라…… 지금은 아무 사이 아니라는 뜻이군요.”
은철이 도윤의 말을 듣고서 속으로 코웃음 쳤다.
“아무 사이 아니라기에는 좀 복잡합니다. 제법 뜨거운 사이였거든요.”
“곧 결혼할 거라고 들었는데…… 예비 신랑이 할 말은 아닌 거 같군요.”
비아냥거리는 어투에 은철은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남도윤 실장님께서는 부하 직원의 사적인 일에도 신경 쓰실 만큼 다정한 분이신가 보군요. 아니면…… 우리 서연이를 남다르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김서연 대리.”
“네?”
“여기는 회사입니다. 과장이라면 비즈니스 매너 정도는 잘 알고 있겠죠? 호칭 똑바로 하시죠. 그리고 회사에서 다시 한번 소란 피우면, 참고 넘어가지 않을 테니 똑똑히 기억해 두길 바랍니다. 너그러움에 감사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만 가서 일 봐요.”
서슬 퍼런 경고에 은철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짧은 대화로 도윤과 자신의 거리를 새삼 깨닫자 불현듯 짜증이 솟구쳤다. 고개 숙여 짧게 인사한 그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다음 복도를 중간쯤 걸어가다 말고 뒤돌아 회의실을 바라보았다.
“재수 없는 ××. 듣기에 사사로운 일에는 관심 없는 워커홀릭이라고 했는데, 설마…… 진짜로 서연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겠지?”
중얼거린 은철은 못마땅한 듯 이리저리 입술을 비죽였다.
* * *
회의실을 빠져나온 도윤은 곧장 기획조정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가 복도를 가로질러 기획조정실 문 앞에 섰다. 그런 다음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서연을 바라보며 아랫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다름 아니라 출력한 보고서를 책상에 내려놓고 기운 없이 손을 늘어트리는 그녀 때문이었다.
“오래전 연인이라…….”
도윤은 좀 전에 나눈 대화를 되새기며 나직이 혼잣말을 뱉어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뒤틀린 그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문 열리는 소리에 놀란 서연이 의자에서 냉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실장님, 보고서 준비됐습니다. 바로 보고 드릴까요?”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인 도윤은 집무실로 향했다. 뒤따라 집무실 안으로 자리를 옮긴 서연이 그의 안색을 살폈다. 곧이어 불쾌감 서린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을 보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회의실에 남아서 은철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윤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언성을 높이고 싸운 이유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고 안 합니까?”
“네? 아…… 네. 보고 드리겠습니다.”
서연은 보고서를 도윤의 책상 위에 내려놓고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도윤이 메모한 걸 서연에게 건넸다.
“수정이나 재확인이 필요한 항목입니다. 다시 보고할 필요 없으니까 업데이트해서 사업 부서에 공유하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닙니다. 그만 나가서 일 봐요.”
“네, 실장님.”
서연이 집무실을 벗어나자 그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이어서 밀려오는 두통에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과거 은철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서연은 묻는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하지 않을 게 뻔했다.
“흐음…… 김 대리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했는데, 노 비서는 아직인가……?”
도윤이 책상 위 휴대폰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를 걸어서 독촉할까도 싶었다. 하지만 보챈다고 빨리 알아볼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초조한 마음으로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 * *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은철이 베란다 창문 밖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그는 똬리를 틀고 하늘 위로 사라지는 연기를 바라보며 지난 대화를 곱씹었다.
“여기는 회사입니다. 과장이라면 비즈니스 매너 정도는 잘 알고 있겠죠? 호칭 똑바로 하시죠. 그리고 회사에서 다시 한번 소란 피우면, 참고 넘어가지 않을 테니 똑똑히 기억해 두길 바랍니다. 너그러움에 감사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만 가서 일 봐요.”
은철은 재차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눈알을 굴렸다. 어째서인지 회사에서 소란 피우지 말라는 경고가, 마치 서연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다. 머릿속이 온통 서연과 도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는 순간,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또 전화야? 서연이 말대로 의처증도 아니고…….”
은철이 휴대폰 화면 속 예리의 이름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한참 울리던 진동이 멈추자 그는 마뜩잖아하는 어투로 혼잣말했다.
“증거는 없지만, 그냥 확 소문 내버릴까? 아니지, 아직 내 편도 없는데 그러다가 불똥 튀면 곤란해. 하아…… 이걸 어쩌지…….”
고민하던 은철이 눈을 크게 깜빡였다. 담배를 비벼 끈 그는 다시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여보세요?]
“예리야, 오빠야. 화장실에 있느라 전화 못 받았어. 지금 어디야?”
* * *
“오빠, 아무리 일이 바빠도 내 스케줄 좀 기억해 줘. 어제 말했잖아, 오늘 마사지랑 네일 받는다고.”
[아, 미안…… 내가 깜빡했어. 그런데 왜 전화했어?]
“1시간 정도 있으면 끝날 거 같으니까 데리러 와. 지난번에 와 봤으니까 여기가 어딘지는 알지?”
[데리러 오라고……?]
“왜? 싫어?”
[아, 아니야. 옷 갈아입고 바로 출발할게.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하고 와. 참…… 네 말이 맞았어.]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남도윤 실장 말이야…… 서연이랑 사귀는 것 같아.]
예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걸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어?”
[신경은 무슨…… 네가 궁금해하길래 유심히 보고 알려 주는 것뿐이야. 그만 끊어, 옷 갈아입고 출발하게.]
스피커로 통화를 마친 예리는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입을 비죽였다.
“앗!”
“죄,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게 미쳤나?”
손톱을 다듬다 따끔한 그녀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직원 뺨을 때릴 것처럼 굴던 예리는 곧 손을 거두고 빙그레 웃었다.
“아프잖아요. 좀 살살.”
“네, 고객님. 주…… 주의하겠습니다.”
그녀가 다시금 의자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남도윤이랑 김서연이 사귄다고? 남녀 사이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말도 안 돼…… 어쩌지? 진짜 사귀는 건가? 그렇다면 찢어 놔야지, 김서연 잘되는 꼴을 볼 수는 없잖아?”
자신을 망신 줬던 서연의 얼굴을 떠올린 예리가 에스테틱 직원에게 말했다.
“거기 통화목록에 보면 아빠라고 된 거 있을 거예요. 스피커폰으로 전화 좀 걸어 줘요.”
“네, 고객님.”
긴 신호음 끝에 ‘여보세요’라는 말이 들려오자, 그녀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술을 떼어 냈다.
* * *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도윤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꼭대기 층에 도착한 그는 긴 복도를 가로질렀다. 곧이어 집 앞에 도착한 도윤은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잡아당겼다.
집 안으로 들어간 그가 구두를 벗고 복도에 올라섰다. 거실을 향해서 묵직한 걸음을 내딛자, 낮은 위치의 센서 등이 차례로 불을 밝혔다.
“흐음…….”
왠지 모르게 갈증을 느낀 도윤은 서재를 지나쳐 주방으로 이동했다. 머그잔 가득 물을 따른 그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마셨다. 컵을 내려놓은 도윤이 외투 안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오늘 저녁 함께하겠습니까? 괜찮다면 술을 한 잔 마셔도 좋고요.]
[죄송합니다, 실장님.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퇴근하고 곧장 집으로 가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도윤은 퇴근 전 서연과 나눈 메시지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서연은 애써 속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퇴근할 때 보았던 미소 너머의 피곤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서연을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에 자신이 없는 터라, 도윤은 끝내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휴대폰 화면 속 메시지를 재차 살핀 도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물을 한 잔 마셨는데도 어째서인지 계속 목이 말랐다.
“물보다는 술이 낫겠군…….”
혼잣말을 뱉어낸 도윤이 주방을 벗어나 서재로 향했다. 그는 서재 수납장의 문을 열고, 크리스털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액체를 물끄러미 바라본 도윤이 술잔을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후우…….”
목구멍으로 술을 한 모금 넘긴 그가 무겁게 한숨 쉬었다. 묵직한 오크 향이 도윤의 코끝을 맴돌았다. 다시 술로 입술을 축인 그가 창문 너머의 풍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마다 키가 다른 빌딩, 길게 빛을 그리며 달리는 수많은 자동차.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 서울의 저녁 풍경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묘한 운치가 있었다.
“실은…… 아까 회사 복도에서 김 대리랑 차 과장을 봤습니다. 비상구에 같이 있던 거 맞죠? 본사 지하에서 김 대리가 나온 카페에도 차 과장이 있었잖습니까. 내가 보기엔 우연이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 실장님께서 관심 둘 만한 일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실장님이 왜요? 무슨 자격으로요?”
“김 대리…….”
서연과의 지난 대화를 되새긴 도윤이 미간을 좁혔다.
자격을 따지자면 서연의 말이 맞는데…… 어째서 자꾸만 그녀의 사정이 궁금한 걸까? 더불어 은철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이유는 무얼까? 그는 평소와 달리 이성적이지 못한 제 모습에 혼란을 느꼈다.
“가만히 두고 보기에는 찜찜해서 그런 거겠지…….”
도윤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합의된 계약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서연은 현재 사귀는 여자였다. 그러니 그녀의 신상과 관련한 일에 마음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쉽게 답을 내렸지만 마음 한구석이 복잡한 터라, 그가 이번에는 은철을 핑계 댔다.
“찜찜한 건 김 대리가 아니라 차은철 때문일지도……. 만약 그놈이 이상한 놈이라면, 계속 태풍그룹 직원으로 남겨 둘 순 없는 거잖아.”
도윤은 혼잣말을 뱉어 내며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서연을 신경 쓰는 답을 찾는 사이, 도어 록 열리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창가를 벗어난 도윤이 테이블 위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복도로 향했다.
복도에 선 그는 신발을 벗으며 구수하게 노래 부르는 진구를 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질투야― 질투야. 나는 빠져 버렸어. 너를 사랑한 질투 속에 빠져 버렸어.”
“노진구!”
“앗! 실장님? 언제 들어오셨어요?”
진구가 쪼르르 달려와서 도윤을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도윤은 잔뜩 흥이 오른 그와 시선을 맞추며 눈살을 좀 더 찌푸렸다.
“노래 가사가 왜 그래?”
“가사가 어때서요? 질투하는 남자라는 제목의 노래입니다. 요즘 차트를 휩쓸고 있는 트로트인데 모르세요?”
“됐고,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방을 가지 내 집에는 어쩐 일이야? 시킨 일은 똑바로 하고 다니는 거 맞…….”
“김서연 대리 조사 끝났습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