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1. 가터벨트
2. 입술
3. 먼저 씻어요
1. 가터벨트
강남 고급 호텔. 화영은 마주 앉은 도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세 번째 만남이니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녀는 새삼스레 도윤의 외모에 감탄했다.
가지런히 뒤로 넘긴 머리, 매끈한 이마와 또렷하고 검은 눈동자. 무엇보다 높은 콧대와 날렵한 턱선이 한데 어우러진 그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달그락.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화영이 우아한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잠시 뜸을 들이고서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난 어렸을 때부터 하와이에서 결혼하고 싶었어요.”
“하와이라…… 무척 아름다운 결혼식이 되겠군요.”
“정말요? 와― 다행이다.”
화영은 그의 대답을 듣고서 반색했다. 역시나 짐작대로 도윤 또한 자기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분명했다. 하기야, 애초에 관심이 없다면 바쁜 그가 세 번이나 시간을 낼 리가 없었다.
부모님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나온 선 자리에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게 될 줄이야. 도윤한테 반한 그녀에겐 무심해 보이는 그 태도마저도 매력 있게 다가왔다.
더는 상기된 감정을 숨기지 못한 화영의 말이 빨라졌다.
“신혼여행은 어디가 좋을까요? 몰디브나 칸쿤은 여러 번 가 봐서 지루할 거 같고…… 아! 세이셸 어때요? 윌리엄 왕세손 부부의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곳이에요. 언젠간 꼭 한번 가 보고 싶었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비치가 있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럼…… 부모님들은 당연히 환영하실 테고, 우리 결혼은 언제가 좋을까요? 아무래도 바쁜 도윤 씨 일정에 맞추는 게 좋겠죠?”
화영의 물음에 도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아리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결혼 날짜야 이화영 씨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지만…… 우리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죠?”
“네? 지금 우리 두 사람 결혼식 이야기 중이잖아요.”
“결혼? 우리가? 하, 이거 참…… 뭔가 오해했나 보군요.”
오해라니……? 화영의 얼굴이 금세 붉게 변했다. 그녀가 여유롭게 홍차를 마시는 도윤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하와이에서 결혼하고 싶다니까 무척 아름다운 결혼식이 될 거라고 했잖아요.”
“그랬죠.”
“세이셸로 신혼여행 가고 싶다니까 눈부신 비치가 있는 곳이라고 들었다면서요?”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화영은 기계적인 대답을 듣고서 더욱 미간을 구겼다.
“남도윤 씨! 지금 사람 놀려요?”
“난 어차피 남이니까 화영 씨가 그러고 싶다기에 그러라고 한 것뿐인데 왜 짜증을 내죠? 그리고 처음 만난 날 억지로 나온 선 자리라고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왜 갑자기 나랑 결혼하겠다는 겁니까?”
“처, 처음엔 억지로 나온 거 맞아요. 하지만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잖아요.”
“세 번 만나고 결혼이라…….”
도윤은 고개를 살짝 가로젓고서 말을 계속했다.
“보기보다 순진하군요. 그거 사랑 아닙니다.”
“네?”
“지금 이화영 씨 감정은 사랑이 아니란 말입니다. 뭐, 나한테 호감 갖는 건 워낙 익숙한 일이라서 이해합니다. 하지만 결혼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지, 잠깐 반했다고 하는 거 아닙니다.”
어금니를 꽉 깨문 화영이 무릎 위에 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놀리는 것도 모자라서, 지금 나 가르쳐요?”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더 이상 오해 살 순 없으니 정확하게 말하죠. 난 이화영 씨랑 결혼 생각 없습니다.”
“혹시 만나는 여자라도 있어요?”
“없습니다. 하찮은 사랑놀이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럼 살면서 지금껏 연애 한번 한 적 없다는 거예요?”
“맞습니다.”
화영은 도윤의 대답에 코웃음 쳤다. 단정한 태도를 내던진 그녀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남도윤 씨는 외아들인 데다가 늦둥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듣기에 남 회장님이 아들 결혼에 목메고 계시다던데, 지금 보니까 결혼하기 쉽지 않겠어요.”
“애초에 결혼할 생각 없으니까 상관없습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일이랑 결혼해서 평생 함께하고 싶군요.”
“기…… 기막혀. 사람이 아니라 일이랑 결혼하고 싶다고요?”
당황한 화영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그때,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비서, 진구가 테이블 가까이 다가왔다.
“실장님.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접힌 우산을 손에 쥔 진구와 눈을 마주친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회사로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계산은 제가 하도록 하죠. 부디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하와이에서 결혼식도 하고, 세이셸로 신혼여행도 가길 바랍니다.”
“잠깐만요!”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 화영이 그를 멈춰 세웠다. 그녀는 가늘어진 눈으로 도윤을 노려보며 이야기했다.
“우리 아빠가 누군지는 기억해요?”
“당연하죠. 이원그룹 이충현 회장님입니다.”
“그걸 잘 알면서도 나랑 결혼 생각이 없다고요? 대체 내가 남도윤 씨한테 뭐가 부족한 거죠? 재계 서열은 태풍그룹보다 우리 이원이 더 높다고요!”
문득 피곤이 몰려온 도윤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화영 씨는 옥스퍼드 출신인 데다 배우 못지않게 예쁩니다. 이 회장님이 애지중지하는 막내딸이니 배경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우리가 인연을 맺지 못한 건, 그쪽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결혼에 관심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에 관심 없다는 건 둘째 치고, 나 같은 여자한테 전혀 끌리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차라리 내가 부족한 게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요!”
“아, 부족한 거라…….”
“저기, 실장님.”
깜짝 놀란 진구가 도윤의 옷자락을 붙잡아 말렸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젓는 비서를 가볍게 무시했다.
“이화영 씨는 이원패션 상무죠?”
“그런데요? 일하는 여자 별로예요? 그렇지 않아도 결혼하면 그만둘…….”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났다고 쓸데없이 한 자리 차지한 거. 난 일에 진심을 담기는커녕 월급만 축내는 사람들을 증오합니다.”
“이, 이봐요! 남도윤 씨!”
“답변이 됐길 바랍니다. 참, 자존심 때문에 자꾸 날 붙잡는 거라면…… 어른들께 차인 건 그쪽이 아니라 나라고 말씀드려도 좋습니다.”
“뭐 이런 자식이……!”
말끝을 흐린 화영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화를 참지 못한 그녀가 잔을 움켜쥐고 도윤을 향해 물을 끼얹는 찰나, 진구가 기다렸다는 듯 우산을 펼쳐서 자기 상사를 보호했다. 그 바람에 짜증이 더욱 솟구친 화영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려 왔다.
“넌 뭐야!”
“인사가 늦었습니다. 남도윤 실장님 비서 노진구입니다. 겪어 보셨다시피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요. 이쯤에서 포기하시죠.”
“이런 쌍으로 미친놈들이……! 아우― 재수 없어!”
두 남자를 번갈아 노려본 화영은 가방을 챙겨서 자리를 벗어났다. 진구가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혼잣말했다.
“와― 곱상하게 생겨갖고 성질 장난 아니다.”
“왜 앉아? 회사에 급한 일 생겼다면서.”
“급한 일은 무슨…… 실장님 봉변당할까 봐 선수 친 거죠.”
“그 우산은 뭐야?”
진구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매번 옷 버릴 수는 없잖아요. 저 잘했죠? 그나저나 30분 넘게 서 있었더니 다리 아파요. 실장님도 앉으세요, 밥이나 먹고 가게. 여기 브런치가 완전 죽인대요.”
채근하는 진구를 내려다본 도윤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카페 직원이 젖은 테이블 정리를 마치자, 진구가 궁금해 죽겠다는 듯 입술을 떼어 냈다.
“대체 뭐라고 하면 하나같이 실장님께 죽일 듯 달려듭니까? 그것도 재주야.”
“결혼에 관심 없다는데도 다들 안 믿잖아. 부족한 걸 묻기에 솔직히 대답한 것뿐이야.”
“아이고― 두 번 솔직했다가는 진짜로 두들겨 맞겠네. 잘난 우리 실장님 단점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솔직한 거라고요. 솔직해도 너―무 솔직해.”
도윤이 못마땅한 듯 왼쪽 눈썹을 찡그렸다.
“솔직한 건 미덕이야.”
“무슨 미더덕 같은 말씀이세요. 내가 솔직한 실장님 때문에 직원들 눈물 훔치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오버하지 마. 애 같은 직원이나 한둘 그랬겠지.”
“한둘이요? 우리 기획조정실만 봐도 남직원 여직원 할 거 없이 다 울었다니까요? 가만, 김서연 대리는 아니구나. 그러고 보면 진짜 대단해…… 실장님 곁을 3년 넘게 버틴 건 김 대리가 유일하잖아요.”
서연이 화제에 오르자 도윤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노 비서도 있잖아.”
“저야 생명의 은인이니까 군말 없이 뒷바라지하는 거구요. 메뉴판 왔다. 브런치 말고도 맛있는 게 뭐가 있으려나……. 스파게티도 맛있겠네요. 풋― 나 봉골레 스파게티에 환장하는데, 실장님은 뭐 드실래요?”
먹고 싶은 걸 묻는데도 도윤은 대답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진구는 왠지 고민이 가득한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제부터 넋 나간 사람처럼 굴고 이상하시네. 열 번째 선까지 망쳐서 회장님께 맞아 죽을까 봐 겁나세요? 실장님! 제 말 듣고 계세요?”
“……김 대리가 왜 그럴까?”
“응? 웬 남자 주인공 같은 대사람? 취미 없다더니 요새 저 몰래 웹소설 보세요? 궁금하면 이따 읽으시고 빨리 메뉴부터 고르세요. 빨리 안 고르면 제 것만 시킵니다.”
도윤은 메뉴를 뒤적이는 진구를 잠시 바라보곤 창밖 풍경으로 재차 눈을 돌렸다.
왜 그랬을까……? 엊그제 서연이 벌인 깜찍한 짓은, 도저히 그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 * *
같은 시각, 잠실 근처 호프집.
“크으―! 맥주 맛 죽인다. 역시 생맥주는 얼음 잔에 마시는 게 최고야.”
반달눈을 한 서연은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입가에 묻은 거품을 손등으로 대충 훔친 그녀가 맞은편 친구와 눈을 맞췄다.
“보람아, 오늘 공연 어땠어?”
“내 취향은 아니더라. 좀 민망하기도 했고.”
“민망했다고?”
“낼모레 서른인데, 바쁜 시간 쪼개서 아이돌 콘서트까지 온 건 우리밖에 없을걸?”
“삼촌 팬이랑 이모 팬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얘는 자세히 보지도 않고서. 아, 귀가 또 이상하네…….”
보람이 맥주잔으로 손을 뻗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왜 자꾸 귀를 긁어?”
“간지러워서. 아침에 머리 감을 때 귀에 물이 들어갔나?”
“누가 너 욕하나 보지.”
“욕먹을 짓 한 적 없거든?”
“없기는……. 엊그제 너 때문에 신입 사원이 위염으로 쓰러졌다며? 그러게 작작 좀 하지, 아무리 프로젝트 마감 기간이라도 일주일 연속 새벽 퇴근이 뭐니?”
서연은 눈을 흘기며 항변했다.
“나 때문 아니거든? 원래도 위염을 달고 산다고 했어.”
“아니긴…… 사수 눈치 보여서 어쩔 수 없이 야근했으니까 네 탓이지. 아우― 징글징글한 워커홀릭. 일 좀 적당히 해. 그러다가 몸 상해.”
“실장님 쫓아가려면 어쩔 수 없어. 내가 여러 번 말했잖아. 그 인간 머릿속에 적당히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친구의 푸념을 듣고서 보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곧이어 턱을 비틀어 올리며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서연아. 혹시…… 너, 남도윤 실장님 좋아하니?”
“풉!”
“악― 더러워! 뭐 하는 거야?”
당황해서 그만 술을 내뿜은 서연이 휴지를 찾았다. 보람이 건넨 휴지로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아 낸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야말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내가 돌았니?”
“일이라면 환장하는 네 모습이 남도윤 실장님을 닮아가는 거 같아서 해 본 말이야. 왜, 그런 말 있잖아. 좋아하면 닮는다는 말.”
“다, 닮기는 누가 닮았다고 그래? 술맛 떨어지니까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
고개를 끄덕인 보람이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알았어, 관심 없다는 말 믿을게. 그래서 말인데…… 그 남자 진짜 모솔이야?”
“그게 왜 궁금한데?”
“실은…… 지난주에 너 기다리다가 회사 로비에서 마주쳤거든. 진짜 배우처럼 생겨서 너희 실장님인 걸 바로 알아보겠더라고.”
도윤의 얼굴을 떠올리는 보람의 눈동자가 금세 촉촉해졌다. 피식 웃은 서연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관심 넣어 두세요. 내가 알기로 남도윤 실장님, 여자한테 흥미 없어.”
“서, 설마. 남자 좋아하니?”
“넌 매번 극단적이더라. 그게 아니라 연애 같은 거에는 관심 없대.”
“외아들이라며? 결혼 안 할 거래?”
“자긴 할 수만 있다면 일이랑 결혼하고 싶대. 나도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진짜로 종일 일만 해.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고 늦게까지 야근하는 걸 보면…… 아마 꿈속에서도 일할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