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장사로 인생 역전 2권
맥주 장사로 인생 역전 2권
목차
26화 남은 맥주는 어떻게
27화 분수 축제
28화 강행
29화 구청장 양문경
30화 법을 바꿀 명분(1)
31화 법을 바꿀 명분(2)
32화 분수 축제의 여파
33화 약점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34화 보리콜
35화 굳건한 차차맥주
36화 나보고 점장을 맡으라고?
37화 투박하고 예리한 설비팀장
38화 2호점을 열다
39화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40화 하스의 야심작, 슬라우드
41화 배관 조항
42화 맥주 골목(1)
43화 맥주 골목(2)
44화 맥주 골목(3)
45화 좋은 제안(1)
46화 좋은 제안(2)
47화 한유경(1)
48화 한유경(2)
49화 한유경(3)
50화 납품 계약서
맥주 장사로 인생 역전 2권
26화 남은 맥주는 어떻게
“형, 협회장은 뭐래요? 다시 바꿔줄 것 같아요?”
모두를 한 번씩 바라보고는, 윤재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기들이 행정적으로 미숙한 부분이 있었다고는 인정하는데, 규정을 다시 되돌리지는 않을 모양새야.”
“그런··· 법적으로 어떻게 할 방법도 없는 거예요?”
“이름만 협회지 무슨 공공기관이 아니라서 법으로는 어쩔 수 없어.”
“···대회에 출품하려고 잔뜩 만들어 놓은 맥주 케그는 그럼 어떡해요.”
“오빠, 그냥 손님들한테 조금씩 뿌리자. 어쩔 수 없잖아.”
지윤의 말에 민규가 반대하고 나섰다.
“홀팀장, 우리가 대회용으로 만들어 놓은 케그가 10개, 자그마치 200리터야. 큰 잔 기준으로만 따져도 400잔이 넘는다고. 우리 전체 매출에 무슨 영향을 끼칠지 몰라. 기존에 나가던 맥주 주문이 줄어들 수도 있어.”
“생맥주라서 오래 가지고 있지도 못한다면서. 그렇게라도 풀어야지, 아님 메뉴판에 맥주 열 종류를 죄다 새로 집어넣기라도 할 거야? 아니면 그냥 버려?”
은영은 지윤이 아닌 민규의 편을 들고 나섰다.
“지윤아, 무조건 퍼 주는 게 능사는 아니야. 어떻게든 제대로 활용할 방법을 생각해 보자. 한국에 맥주 대회가 그거 하나만 있진 않을 거 아냐? 꼭 대회가 아니라도 행사장? 콘서트에서 판매를 하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기왕 케그까지 채워 놓은 김에 말야.”
남은 맥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열띤 논의가 벌어졌다. 그사이 윤재는 머리를 식히러 나온다는 핑계를 대고 브루어리 밖으로 나왔다.
그의 뇌리에는 그저 이 일의 배후가 누구일까 하는 생각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추측을 뒷받쳐 줄 강력한 증거는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그의 의심을 입밖으로 꺼내 봤자 소모적인 논쟁만 이어질 터. 그래서 그는 밖으로 나와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윤재 사장님.”
뒤를 돌아보니 허동철이 조끼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막 물고 있었다.
“아, 허 팀장님도 머리 식히러 나오셨어요?”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던 허동철. 담배에 불을 붙여 후욱 연기를 길게 한 번 내뿜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윤재에게 말했다.
“지금 저 남은 맥주 처리하는 거 말고 우선순위를 딴 데 두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어떤 거요?”
“제 생각인데, 이 일에는 배후가 있어요.”
마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윤재는 흠칫 놀랐다.
“팀장님도···?”
허동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시다시피 제가 회사 생활 나름 오래 한 사람 아닙니까. 회사가 크든 작든 간에, 규정을 마음대로 바꾸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거기다가 이번처럼 곧바로 피해자가 생길 게 불 보듯 뻔한 경우에는 명분이라는 걸 반드시 준비하거든요. 밖에서 보기에 말이 되든 안 되든 말이죠. 그런데 사장님 말씀을 들어보면, 그 수제맥주협회라는 곳에서는 그저 미안하다고만 할 뿐 규정 변경에 대한 명분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근데 짐작이 가는 배후가 전혀 없어요.”
“저는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게 누굽니까?”
허동철은 창문 넘어 브루어리 안을 휙 한 번 돌아보고는 목소리 톤을 낮추었다.
“공정팀장이요.”
생각지도 못한 용의자에 윤재의 광대가 순간 크게 위로 올라갔다.
“하하. 아, 죄송합니다. 근데 민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설마··· 제가 팀장님을 두고 민규를 먼저 뽑았던 일을 아직 마음에 담고 계신 건 아니시죠?”
반쯤 농담으로 넘어가려는 윤재와 달리 허동철은 사뭇 진지했다.
“공정팀장 독일에서 대학 나왔다면서요.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이, 대기업도 아니고 이런 작은 맥주 공장을 왜 들어왔는지, 아니 애초에 사람을 뽑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난 그게 궁금해요. 원래 사장님 지인이었던 것도 아니고, 이 근처에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희 독일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같이 일하면 어떻겠냐고 민규한테 스카웃 제의를 했었고요.”
“그래서 그때 그 스카웃 제의를 권 팀장이 바로 수락한 건가요?”
“아니요. 그때는 민규가 거절했었고요. 한참 있다가 제가 채용 공고를 올렸을 때 그걸 보고 여기를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먼저 거절을 해놓고선, 갑자기 그사이에 마음이 바뀌어서 자기가 또 찾아왔다는 거잖아요.”
“음···.”
“사장님이 스스로 말씀하시면서도 이 흐름이 좀 이상하다 느껴지지 않으세요?”
“무슨 말씀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근데 팀장님 말씀대로라면, 민규가 어떠한 나쁜 계획을 품고 이 차차맥주에 들어왔다는 건데 그것도 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저희가 무슨 대단한 라이벌을 가지고 있는 회사도 아니고, 아니 라이벌은커녕 심지어 그때는 차차맥주 브루어리에서 맥주 한 방울 제대로 만들어내기도 전이었습니다.”
허동철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건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무슨 증거를 찾은 건 아니고 제 감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렇죠? 어쨌든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일에 배후가 있다는 말씀에는 저도 동의해요. 근데 단서가 없으니··· 지금은 저희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맥주를 풀 장소를 먼저 찾아보는 게 순서인 것 같습니다.”
8월 중순, 맥주의 성수기라고 불리는 여름이지만 시기상 여름을 대표하는 많은 행사들은 이미 끝났거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대학교는 여전히 방학 중이었고, 지역의 특산물 축제도 대부분 여름이 지나고 날씨가 선선해질 가을이나 되어야 오픈을 한다고 한다.
그렇게 다섯 명이 한 시간이 넘게 한마디 말도 없이 인상을 잔뜩 쓴 채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적막을 깬 건 지윤이었다.
“이거 어때? 강동구청에서 주최하는 여름 분수 축제.”
“강동구청? 요 옆 내성동에 강동구청?”
“구청 행사에 수제맥주라. 신선하긴 한데···.”
“거기도 그런 축제를 해···?”
지윤은 대답 대신 핸드폰 화면에 축제 사진을 띄워보였다.
구청 앞 광장 바닥에서 수십 줄기의 물이 솟아오르고 젖은 몸으로 그 사이를 즐겁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리고 어른들은 그 옆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그런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거나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구청 주차장에 서 있는 푸드트럭 십여 대가량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보다 보니 또 괜찮은 게, 생맥주를 취급하는 푸드트럭은 없었던 거 같아.”
“자리 남아 있을까?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사진 상으로 빈자리가 몇 개 보여. 아마 작년하고 올해가 크게 다르진 않을 거 같은데··· 내가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
“내가 할게.”
윤재는 이미 강동구청 행사담당 부서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 * *
자신을 찾는 손님이 왔다는 얘기에 윤재가 직접 주문을 받으러 갔다.
“아, 최 사장님 오셨어요.”
메뉴판을 보고 있던 최학수가 한 손을 들어 윤재의 인사에 답했다.
“어어, 근데 슬슬 2차들 갈 시간인데 사람이 꽉 차진 않네?”
“하하, 저희 아직 꽉 찬 적은 한 번도 없어요.”
“KIBA에서 받은 상 문 앞에라도 좀 세워놓고 그래. 그래야 사람들이 지나다가다 여기 좀 급이 있는 브루어리인가 보다, 하고 한 팀이라도 더 들어오지.”
“네, 뭐···.”
윤재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을 피하자 최학수가 짐짓 모르는 척하며 재차 물었다.
“몇 등 했어? 설마··· 장려상도 못 받은 건 아니겠지···?”
“사실 KIBA에 아예 참가를 못했어요.”
“왜 못 나가? 어쩌다가?”
“갑자기 참가 규정이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최학수는 온 감정을 쥐어짜서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과 목소리를 간신히 만들어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연락이라도 좀 주지 그랬어? 내가 그 협회에 건너 건너 아는 연줄이 있거든. 내가 알았으면 한 번 부탁이라도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제가 최 사장님께 그런 부탁을 드릴 처지는 아닌 것 같아서 미처 생각을 못했네요.”
“이런 처지 저런 처지 다 따지면 장사를 어떻게 해. 윤재 너 사장이라면서. 사장은 월급쟁이처럼 그렇게 적당 적당히 넘어가면 안 되는 거야.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야지.”
“조언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최학수는 됐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 도움도 못 줬는데 감사는 무슨. 근데··· 대회용으로 만들어 놓은 맥주 좀 있지 않아? 그건 다 어쩐다냐. 스페셜 몰트도 제법 들어갔을 텐데 그냥 버리기는 너무 아깝고.”
자신의 일처럼 진심으로 차차맥주를 걱정하는 듯한 최학수. 오히려 윤재는 별문제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운 좋게 다른 쓸 데를 찾았거든요.”
“···다른 쓸 데? 어디?”
“강동구청 분수 축제요.”
“강동구청···?”
“네, 호천동뿐만 아니라 내성동이나 사암동 주민들한테도 차차맥주를 홍보할 수 있는 나름 괜찮은 기회인 것 같아요.”
“난 그런 게 있었는 줄 전혀 몰랐네··· 하하···.”
“혹시라도 저희 견제하시겠다고 겔트상사에서 들어오시지는 않을 거라 믿어요. 송사리들 노는 곳이라 겔트 같은 잉어는 와도 먹을 것도 없을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어차피 신청 마감했겠네, 지금쯤이면.”
윤재의 은근한 압박에 최학수는 어금니를 물고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무섭다 무서워. 걱정 붙들어 매셔. 우리는 그런 행사에 나갈 인력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참, 맥주는 뭘로 드시겠어요?”
“그냥 아무거나. 잘 나가는 걸로 한 잔.”
윤재가 맥주를 가지러 간 사이 최학수는 수첩을 꺼내 슬쩍 뭔가를 적었다.
* * *
최학수가 정상호프 1호점의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자, 최학수는 곧바로 핸드폰을 열었다.
“정 사장, 나 최학수야. 1호점 앞인데 안에 있으면 문 좀 열어줘.”
정상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넘어왔다.
“저 집에 있습니다. 어제 잠을 너무 못 자서요.”
“그놈의 공사 밤낮으로 신경 쓸 게 그렇게나 많은가?”
“이제 끝입니다. 어제부로 지반 공사가 다 끝났거든요. 이제는 저도 그냥 공사업체에 맡길 겁니다.”
“뭐? 그럼 이제 건물 올라갈 텐데··· 오히려 지금부터 제대로 신경을 쓰셔야 하는 거 아냐?”
새벽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오픈하고 싶지 않은 정상대. 수 초간 짧은 침묵 후 다시 그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넘어왔다.
“···그냥 제가 너무 공사현장을 들쑤시고 다닌다고 업체에서 불편해하는 거 같아서 자리를 좀 피해주려고요. 근데 무슨 일입니까?”
“차차맥주 브루어리의 서은영 모자. 이제 정 사장이 나서 주실 차례야.”
“그게 무슨···?”
“강동구청에 줄 좀 있지? 상인회장씩이나 되시니.”
“인사하고 지내는 과장 두어 명 은 있습니다만, 그건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