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페이지
회귀한 포수가 160km를 던짐 6권
-연습경기 사건 
“파울!”
바깥쪽 슬라이더를 겨우 커트해냈다.
[놔두면 볼이었거든요. 백건우가 볼카운트에 부담을 갖는 모양입니다.]
커쇼는 신인선수처럼 절실해 보였다.
다시 빅리그 마운드에 올라가서 영광의 시대를 재현하고 싶겠지….
공교롭게도 커쇼가 부상으로 이탈한 후부터 다저스는 준우승 징크스를 깨고 왕조를 이룩했다.
커쇼가 빠진 자리는 이미 젊고 비싸고 강력한 투수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커쇼는 오늘 경기에서 본인의 건재함을 증명해야 했다.
따악- !
나는 타석에서 그의 초조함을 읽었다. 
[백건우가 가볍게 밀어 친 타구가 우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안타! 백건우가 로키스의 첫 안타를 터트립니다.]
다음 타자는 마이클 토글리아.
1루수로 수비는 뛰어났지만 끔찍한 삼진율을 자랑하는 선풍기류 타자였다.
나는 1루 베이스에 발을 붙이고 서서 커쇼를 감상했다.
‘내가 다저스의 포수를 맡았다면 커쇼를 부활시킬 수 있었을까?’
오늘 배터리를 이룬 포수 페두시아는 커쇼의 잠재력을 끌어낼 능력이 없었다.
또 도루 저지 능력도 별로였다.
[백건우가 2루로 뜁니다! 포수 페두시아가 잡아서 송구! 아! 공이 뒤로 빠졌어요! 백건우는 그사이에 3루까지 갑니다!]
내가 순식간에 3루까지 진출하자 조용했던 로키스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게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야구를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글리아 삼진 아웃! 3루 주자를 불러들이지 못합니다.]
로키스는 여전했다.
나는 더그아웃으로 돌아와서 유니폼에 묻은 흙을 털고 서둘러 포수 장비를 착용했다.
서울 원더스였다면 동료들이 나서서 내가 숨 돌릴 시간을 확보해 줬을 텐데 아직 로키스에는 그런 문화가 없었다.
동료가 뭘 하든 각자 자기 자신에게만 신경 쓰고 있었다.
이런 팀이 잘 될 리가 없지.
 
[오늘 돌랜더가 다저스 타선을 상대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4회까지 무실점!]
[베테랑 커쇼와 의외의 투수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다저스 0 대 0 로키스]
1회에 나는 오늘 다저스 타자들의 마음을 읽었다.
대부분 40인 로스터 진입이 절실한 2진급 선수들이라 오늘 뭔가 보여주겠다는 의욕이 앞섰다.
나는 즉시 유인구 위주로 볼 배합을 바꾸었다.
범타를 유도해서 로키스의 유일한 강점인 탄탄한 수비로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돌랜더도 나의 리드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
한국이건 미국이건 투수라는 생물은 같았다.
본인에게 이익이 된다고 느끼면 믿고 따른다.
[4회말. 무사 1루에서 백건우가 2번째 타석에 들어섭니다.]
커쇼는 4회에 들어서자 첫 타자 라이언을 볼넷으로 내보내며 흔들렸다.
그가 마운드에서 더그아웃을 슬쩍 돌아보았다.
전성기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다.
여기서 맞으면 바로 교체라는 걸 의식했다.
그렇다면 초구는.
따아악- !
[백건우의 배트가 시원하게 돌아갑니다! 이건 볼 것도 없어요! 좌측 담장~~~ 넘어가는 장외홈런! 백건우가 다저스의 전설을 상대로 빅리그 첫 홈런을 뽑아냅니다! 2점 앞서는 로키스!]
[다저스 0 대 2 로키스]
나는 카운터를 잡으러 들어오는 밋밋한 속구를 잡아당겼다.
장외홈런이 터지자 응원석이 후끈 달아올랐다.
나는 일부러 KBO식으로 배트를 내던지며 요란을 떨었다.
다저스 선수들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라운드를 돌아 홈으로 들어오자 블랙 감독이 놀라운 지시를 내렸다.
“건우. 멋진 홈런이었어. 이제는 편히 쉬거라.”
“예?”
“어제 팀에 합류했잖아. 첫 경기부터 무리할 필요 없어. 이건 연습경기니까. 천천히 컨디션을 올리도록 해.”
“싫은데요.”
나의 대답에 훈훈하던 더그아웃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우리가 지구우승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다저스를 눌러야 합니다. 우리는 어제 대패했잖아요. 오늘 승기를 잡았을 때 확실하게 짓밟아서 우리를 우습게 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건 단순한 연습경기가 아닙니다. 감독님. 저는 오늘 끝까지 뛰겠습니다.”
“….”
블랙 감독이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선수들이 보는 앞에서 엄연한 항명이었다.
그때 마이크 수석 코치가 나를 통로로 끌고 갔다. 
불독처럼 콧바람을 씩씩거렸다.
“건우. 감독님은 지금 너를 지켜주려는 거야. 아까 네가 홈런치고 배트 플립 했을 때 다저스 선수들 표정 봤어? 다음 타석에 나오면 반드시 보복해 올 거야. 네가 빅리그의 불문율을 어겼으니까.”
“저도 느꼈습니다. 제가 빈볼을 맞으면 동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되는데요? 제가 맞아서 동료들이 하나가 된다면 맞아볼 만하잖아요?”
“….”
마이크 수석 코치는 나를 미친놈 보듯 했다.
결국 나는 교체되지 않았다.
[5회 마운드를 이어받은 투수는 제이크 버드입니다.]
로키스의 투수진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선발진은 지난 시즌 10승 투수가 한 명도 없었고 불펜은 방화범들로 가득했다.
그 와중에 그나마 준수한 활약을 한 투수가 버드였다.
불펜의 마당쇠로 많은 이닝을 소화했고 가끔 땜빵 선발도 뛰었다.
따아악- !
그런 버드가 오늘은 컨디션이 나빴다.
첫 타자부터 안타를 얻어맞더니 다음 타자는 볼넷으로 내보냈다.
[무사 1, 2루 위기입니다. 선취점을 내고 바로 역전을 허용하는 전형적인 로키스의 패배 패턴이네요.]
 
버드의 공이 한가운데로 몰렸다.
심판 놈이 바깥쪽 스트라이크 2개를 잡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수는 예민한 존재라서 그런 판정이 나오면 제구력이 급격히 흔들렸다. 
‘뭔가… 분위기를 바꿀 방법이….’
[버드가 초구를 던집니다! 백건우가 잡아서 아! 1루로 쏩니다!]
뻐어어엉- !
“태그 아웃!”
나는 1루를 기습 견제했다.
1, 2루 상황이라 방심하고 있던 1루 주자 고티어가 아웃 되었다.
미안하지만 이 친구는 이번 시즌 다저스 1군에서 못 보게 될 거다.
따아악- !
[땅볼 타구! 3루수 라이언이 잡아서 2루 주자를 묶어놓고 1루로 송구합니다! 2아웃!]
1루 주자가 횡사하자 다저스의 추격 의지가 꺾였다.
버드도 안정을 되찾아서 무실점으로 이닝을 끝냈다.
[6회말. 1사 1루에서 백건우가 3번째 타석에 들어섭니다.]
투수는 바비 밀러로 바뀌었다.
100마일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지는 우완투수였다.
그를 지금 마운드에 올렸다는 건 의도가 확실했다.
나에게 빅리그의 매운맛을 알려주겠다는 거다.
[밀러가 초구를 던집니다! 몸쪽에! 위험해요!]
퍼억- !
나는 100마일 강속구를 팔꿈치 보호대로 막아냈다.
어찌나 공이 강한지 보호대를 뚫고 통증이 밀려왔다.
“이 새끼야! 뒈지고 싶어!?”
 
나는 한국어로 걸쭉한 욕을 한 사발 뱉어냈다. 
배트를 마운드로 집어 던지고 투수 밀러를 향해 돌진했다.
대졸 백인 범생이 밀러는 나의 반응에 흠칫 놀랐다.
동양인 녀석이 공을 맞고 쓰러지기는커녕 분노하며 덤벼들자 당황했다.
휙- 퍼억- !
 
밀러가 먼저 휘두른 어설픈 주먹을 피하며 놈의 하얀 얼굴에 라이트 펀치를 꽂았다.
연타를 날리려는데 사방에서 다저스 선수들이 몰려들어서 나를 덮쳤다.
그러자 격분한 로키스 선수들이 쏟아져나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에서 사상 초유의 집단 난투극이 벌어집니다!]
경기가 중단되고 양 팀 감독들까지 나와서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다.
실랑이 끝에 주심은 나에게만 퇴장을 명령했다.
투수 밀러를 때렸기 때문이란다.
“이런 엿 같은 판정이 어디 있어!?” 
“심판! 너 죽고 싶냐!? 다저스한테 뭐 얻어먹었어!?”
그러자 로키스 선수들과 팬들이 폭발했다.
오늘 경기 내내 다저스에게 유리한 판정을 해서 가뜩이나 빈정이 상해 있었는데 휘발유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
“블랙 감독 퇴장! 마이크 코치! 당신도 퇴장이야!”
“뭐!? 이 다저스의 개 같은 놈아! 내가 사무국에 정식으로 고소할 거야!”
사태가 도저히 수습이 되질 않자 매부리코 스콧 주심은 감독과 코치까지 퇴장을 선언했다.
블랙 감독은 가만히 있었지만 다혈질 마이크 코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스콧 주심을 배로 밀치며 쌍욕을 퍼부었다.
결국.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상 초유의 연습게임 몰수패가 선언됩니다.] 
여기서 경기가 끝나버렸다.
스콧 주심은 로키스의 몰수패를 선언하고 도망치듯 야구장을 떴다.
로키스 선수들은 분노하며 야구장을 떠나지 못했다.
“망할 주심 새끼! 감히 우리를 무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