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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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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아득해졌던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새카맣기만 했는데 천천히 그림이 그려졌다.
‘여긴 어디지?’
서영은 지끈거리는 머리와 온몸에 느껴지는 고통에 옅은 신음을 뱉으며 눈을 떴다.
“어, 깼다. 깼어.”
“으, 으아악!”
의식을 차린 서영은 뒷목에서 느껴지는 뻐근함보다 코앞에 보이는 얼굴 때문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아우, 목청 한번 엄청 크네. 그렇게 소리 지르면 목 안 아파?”
“아, 어…… 그, 그게…….”
“됐고, 배고프지? 뭐라도 먹을래?”
서영이 그렇다고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서영의 의견을 결정한 건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방 한편에 마련된 작은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서영의 시야에 그녀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확연하게 들어왔다.
매캐한 냄새가 나는 작은 창고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천장엔 쩍쩍 금이 가 있었고 거미줄이 가득했으며, 어디선가 쥐 소리까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 창고는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서영은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봤다. 실습실에 혜진과 함께 있던 중에 갑자기 두 남자가 실습실 안으로 들어왔고, 그들은 느닷없이 서영을 공격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중 한 명은 저기 냉장고를 뒤지고 있는 놈일 것이다.
‘또 납치된 건가.’
서영은 자신의 상황이 너무 우스워서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보통 납치를 당하면 당황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납치를 여러 번 당한 서영은 이제는 납치를 당해도 ‘아, 또 당했구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건 납치를 당할 때마다 무사히 구출되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도 지금 이곳에서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혜진이는 어디 있지?’
정황으로 봐선 실습실에 함께 있었던 혜진도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생각에 서영은 엎드린 채로 고개를 돌려 창고를 둘러봤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볼이 쓸려 따끔거리고 피가 났다. 하지만 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이런 하찮은 상처보다 혜진이 무사한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없는 건가.’
창고를 다 둘러본 것은 아니지만 대충 훑어봤을 때 혜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가지의 가설이 세워진다. 혜진은 납치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같이 납치되긴 했지만 다른 곳에 버려졌을지 모른다는 또 다른 가능성. 부디 전자이길 간절히 바란 서영은 코앞에 인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먹을 게 없네. 승호한테 사오라고 할 테니까, 일단 물이라도 마실래?”
“아니…… 전…….”
“목마르지? 이거라도 마셔.”
그곳엔 방금 전까지 냉장고를 뒤지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손에는 생수병이 들려 있었다. 병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아주 시원한 물인 듯했다.
서영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물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서영의 손과 발은 묶여 있었고, 그녀의 몸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상태였다. ‘그림의 떡’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모양이었다.
“아 참.”
그제야 서영이 손과 발이 묶인 채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남자는 서영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무리 자신이 여자이고 상대는 남자라고는 하지만 서영은 자신의 몸을 너무나도 가뿐히 한 손으로 드는 남자의 행동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자는 서영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낡은 소파에 서영을 사뿐히 내려주었다.
“자, 마셔.”
남자는 생수병의 뚜껑을 돌려 연 뒤 서영에게 내밀었다. 당장이라도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지만 납치범이 주는 것을 덥석 받아먹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양손이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 탓에 물병을 받을 수도 없었다.
“아아.”
서영이 물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번에도 뒤늦게 알았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남자는 서영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었다. 시큰한 고통과 함께 팔목을 옥죄고 있던 밧줄이 남자의 손에 의해 시원스레 끊겼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밧줄을 한번에 푸는 것은 어려울 텐데, 남자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이제 물 마실 수 있지?”
남자는 눈을 하회탈처럼 접으며 씨익 웃었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탓에 남자의 새하얀 치아가 유난히 빛나는 것 같았다. 얼떨결에 남자가 건네준 물병을 받아 든 서영은 손에 차가운 물기가 느껴지자 흠칫 놀라며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왜 풀어주는 거예요?”
“응?”
“풀어주면 도망갈지 모르는데……?”
서영은 자신이 말하고도 바보 같아서 혀를 깨물었다. 남자 역시 서영의 말이 웃겼는지 양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남들이 보기엔 비웃는 것처럼 느껴질 듯한 웃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서영의 눈에는 순수하게 보였다.
“왜? 도망가려고?”
남자는 한쪽 고개를 삐뚤게 기울이며 말했다.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야 굴뚝같았지만 묶여 있어 도망가는 것은 거의 무리였다. 서영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남자의 눈이 가자미처럼 얇아졌다.
“너는 도망 못 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 손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지.”
카이다가 거실로 발을 들이자마자 아칸과 백한은 날카롭게 그를 주시하며 공격 태세를 갖췄다. 일반 요괴와 하프인 그들이 뱀파이어, 그것도 서열 2위라는 타이틀을 가진 카이다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루이를 공격하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물러서라.”
하지만 루이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물러서라고 말했다. 여전히 시선을 카이다에게 고정하고 있는 루이의 얼굴은 무서우리만큼 침착했다.
“하지만…….”
“물러서라고 했다.”
루이의 강압적인 명령에 아칸과 백한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뿐 아니라 루이는 그들에게 집에서 나가라는 명을 내렸다. 카이다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카이다가 루이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루이와 카이다 단둘만 두는 것은 뭔가 꺼림칙해 아칸과 백한은 머뭇거렸다. 그러자 루이의 시선이 매섭게 그들에게 꽂혔다. 그 시선에 아칸과 백한은 쫓기듯 집을 나갔다.
루이는 다시 카이다를 쳐다봤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이다를 찾아내는 것이 루이의 목표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도 그 목표는 그대로였지만, 그 의미는 조금 달라졌다. 전에는 그를 찾아내 요괴 전쟁에 가담시키는 것이 목표였지만, 지금은 그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가 서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루이는 여유롭게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카이다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그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키가 비슷한 탓에 둘의 시선은 정면에서 마주쳤다.
“무슨 생각으로 이곳까지 온 거지? 설마 내가 네놈이 저지른 짓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예전 은영의 일로 루이는 카이다가 뭔가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거기다 이번에도 서영이 시나에게 납치되자마자 카이다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는 필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루이의 눈에 카이다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훗.”
자신을 잔뜩 경계하는 루이가 재미있는지 카이다는 입가에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 웃음에 루이의 표정이 여지없이 일그러졌다. 카이다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루이의 손을 떼어내고는 구겨진 소매를 손으로 탁탁 털었다.
“나와 이렇게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던가? 바쁘지 않아, 루베르이?”
“……역시 알고 있군. 어디 있지?”
카이다의 말에서 루이는 그가 서영의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서영을 되찾는 일이었다. 루이는 다급하게 카이다에게 물었다.
“서영은 어디 있지? 이번 일, 시나가 한 짓이 맞는 거지?”
“글쎄? 내가 그걸 왜 말해줘야 하는 거지? 시나가 한 짓인지, 서영이 어디 있는지.”
“그 더러운 입에 서영의 이름을 담지 마라.”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그녀가 네 것도 아니고 말이야.”
“……뭐?”
“내가 저지른 일을 다 알고 있다고 했지? 그럼 그것도 알겠네? 네가 없는 동안, 내가 그녀의 옆에 있었다는 거 말이야.”
카이다의 말은 루이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카이다의 당돌하기 그지없는 발언에 냉정하게 상황을 주시하던 루이가 돌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이다의 몸이 벽 쪽으로 밀쳐지면서 그의 목에 루이의 두 손이 휘감겼다. 숨이 막힐 법도 한데 카이다는 미간을 약간 찌푸릴 뿐 별다른 반응 없이 루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내 앞에서 그딴 소리를 하다니 그간 공백이 크긴 컸나 보군. 지금 당장 내 손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순간 루이의 붉은 눈에 살기가 스쳐 지나가더니 엄청난 압박감이 카이다의 몸 위로 떨어졌다. 온몸을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살기와 기운. 이것이 바로 서열 1위의 위엄이었다. 아무리 카이다가 서열 2위 뱀파이어라고는 하나 카이다와 루이 사이엔 엄청난 힘의 차이가 있었다.
루이의 거친 행동에 저항할 법도 하건만 카이다는 가만히 루이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여유가 넘치는 미소까지 머금으며 말이다. 그 모습에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 루이가 눈살을 찌푸리자 카이다는 입을 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날 죽일 수 있을까?”
“뭐?”
“내가 죽으면……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그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루이 때문에 숨 쉬기도 힘든 상황이었는지 카이다의 말은 어눌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 안에는 루이를 비웃는 듯한 비릿한 음성이 담겨 있었다. 그가 죽으면 서영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 그건 확실하게 루이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젠장!”
루이는 낮게 욕설을 뱉으며 카이다의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쿨럭.”
목을 조이던 손길이 사라지자 카이다는 거침없이 기침을 토해냈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 사실은 엄청 괴로웠던 모양이었다. 그의 창백한 목덜미에는 푸르스름한 멍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뭘 원하는 거지?”
“…….”
“원하는 것이 있으니 나를 찾아왔겠지. 서영이를 되찾으려면 뭘 해야 하는 거지? 그녀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게 하려면 내가 뭘 해야 하는 거냐.”
벌써 이런 일이 몇 번째인 걸까.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그녀가 자신 때문에 몇 번이나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이는 그녀만 안전하게 되찾을 수 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생각이었다.
한참을 바닥에 엎드려 기침하던 카이다는 루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간적으로 기침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그제야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포기한다면.”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이었지만, 루이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입을 틀어막고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게 하고 싶었지만, 그의 손발이 움직이기도 전에 카이다는 하고픈 말을 마저 했다.
“네가 서영을 포기한다면, 서영을 무사히 돌려주겠다.”
“시엘, 시엘, 시엘…….”
에리샤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시엘의 단서를 찾아다녔다. 잭의 방에 틀어박혀 몇날 며칠을 책만 들여다봤지만 시엘에 대한 단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고, 그녀의 눈은 점점 피로해져만 갔다.
“분명 뭔가가 있는데…….”
서영과 닮은 여자. 어머니의 자매. 그리고 요새가 애지중지하는 마녀의 성에 있다는 초상화. 이 사이에는 분명 연결 고리가 있을 것이다. 의심은 갔지만 뚜렷하게 잡히는 것이 없어 에리샤는 답답하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요새의 멱살을 잡고 아는 것을 다 털어놓으라고 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어 그녀는 한숨만 연거푸 푹푹 내쉬었다.
“에라이, 망할 놈의 요새. 쫌생이같이 숨기기만 하고…….”
“뭐라고?”
“히익?”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란 에리샤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쿵―.
물러서다가 책장에 부딪힌 에리샤의 머리 위로 책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졸지에 책 더미에 파묻히게 된 에리샤는 팔을 휙휙 내저으며 머리 위에 쌓인 책들을 치우려고 했다.
“덜렁거리는 건 미엘과 똑같군. 누가 그 어미에 그 딸 아니랄까 봐.”
혀를 ‘쯧쯧’ 내차는 소리와 함께 에리샤의 머리 위에 무더기로 쌓여 있던 책들이 한번에 사라졌다.
“어…….”
“뭘 그리 멍하게 있어?”
“당신이 왜……?”
에리샤는 눈앞에 요새가 있자 멍하게 그를 쳐다봤다. 그것도 잠시, 자신이 신랄하게 그를 씹었다는 것과 그 말을 요새가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한 에리샤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에요!”
“뭐?”
“그, 그냥 속으로, 그러니까, 저기…….”
“큭.”
에리샤가 말을 더듬으며 손까지 휙휙 내젓자 요새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됐어. 나 씹는 놈이 한둘이어야지. 그나저나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다.”
“네, 그럼요! 부탁이죠! 부…… 네? 부탁이요?”
“파리 들어가겠다.”
뜬금없는 요새의 말에 에리샤가 또 입을 헤 벌린 채 멍하니 있자 요새는 에리샤의 입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가 빼며 장난스레 말했다. 이에 에리샤는 입을 닫고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미엘이 어디 뿌려져 있지?”
“미엘……? 어머니요?”
“그래.”
요새가 에리샤를 느닷없이 찾아온 이유는 미엘 때문인 것 같았다. 에리샤는 요새가 갑자기 미엘이 뿌려진 곳에 왜 관심을 가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야, 이건 좋은 기회일지도 몰라.’
뭐든지 기회가 엿보이면 잡아야 한다.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요새가 갑자기 나타나서 미엘이 뿌려진 곳을 묻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걸 기회로 잡으면 뭔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에리샤는 생각했다.
“알려드릴게요. 대신 제 부탁도 한 가지 들어주세요.”
“부탁? 뭐지?”
“들어준다고 약속하지 않는 이상 말 안 할 거예요.”
“……뭐, 좋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에리샤가 부탁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요새는 조금 언짢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리샤는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무슨 부탁을 해야 하는 걸까. 지금 가장 궁금한 시엘에 대한 걸 물어볼까? 아니면…….
“……루이.”
한참을 고민하던 에리샤는 뜬금없이 루이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러고는 멀뚱히 서 있는 요새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루이가 렌과의 내기에서 이길 수 있도록,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주세요.”
카이다의 말에 루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영을 포기하라니. 그건 루이에게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지만 서영을 구하기 위해선 그녀를 포기해만 했다. 루이는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빨리 결정해야 할 거야.”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카이다는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에 선명하게 새겨진 시퍼런 멍이 우스꽝스러웠지만 카이다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네가 이렇게 망설이는 동안에도 서영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고.”
“……!”
“빨리 결정하는 게 어때?”
당장이라도 카이다의 입을 틀어막고 닥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카이다였다. 뱀파이어의 천적인 마녀 일족과 손을 잡고 서영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 매우 괘씸하고 화가 났지만 루이는 지금 당장 카이다에게 아무 짓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까.’
카이다의 말이 사실이라면, 서영을 무사히 구해내기 위해선 그의 말을 따라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기에 루이는 어떻게 하면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서영을 구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 루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바로 카이다 역시 서영에게 손을 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만약 그가 서영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이 있었다면 2년 전, 서영이 그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때 했어야만 했다. 그리고 마녀 일족의 행동도 이상했다.
마녀 일족은 왜 서영을 2년 동안 가만히 내버려두었을까. 마음만 먹는다면 인간의 모습인 서영을 없애는 건 일도 아닐 텐데. 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서영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그동안 서영이 무사하다는 사실에만 안도하며 곰곰이 생각지 않았었는데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그들이 서영을 가만히 내버려둘 이유는 전혀 없었기에 의문은 점점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