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Page
12 장
1 장
프롤로그
창백한 피부와 붉은 눈을 가진 밤의 제왕, 뱀파이어. 사람들은 뱀파이어를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무서워하지만, 뱀파이어를 보는 순간 아름다운 그 모습에 매료되어 그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한다.
대부분의 요괴들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요괴의 숲은 인간 세상만큼은 아니지만 푸른 나뭇잎과 희귀한 꽃들이 많은, 요괴들의 지상 낙원이었다.
“사, 살려줘!”
하지만 그것도 모두 옛말이 되고 말았다. 몇백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터지는 요괴 전쟁으로 인해 요괴의 숲은 불바다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참혹한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살육에 미친 요괴들이 아군이든 적군이든 구별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죽이는 탓에 요괴들의 비명이 한시도 끊기지 않았다. 아비규환을 연상시키는 상황이었다. 이성이 있는 자라면 현 상황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을 것이다.
스윽―.
검은빛 머리칼이 피와 땀에 젖어 흘러내렸고, 창백한 피부 위로도 피가 얼룩져 있었다.
은빛의 날을 자랑하던 칼은 이미 피에 절어 무뎌진 지 오래였지만, 루이는 개의치 않고 눈앞의 적들을 하나씩 베어나갔다.
“죽어라, 루베르이!”
피는 요괴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이성이 약한 요괴일수록 피의 유혹에 쉽게 점령당하고 만다.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강한 피 향기에 이성을 잃은 요괴들은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고 하나같이 루이에게 덤벼들었다.
‘가소로운 놈들.’
루이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다고는 하지만 저런 놈들에게 당할 정도로 자신은 약하지 않았다.
크앙―.
거친 짐승 소리와 함께 수백 명의 요괴들이 루이에게 달려들었다. 이성을 잃은 순간에도 단합하고 달려드는 것으로 보아, 본능까지 잡아먹힌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루이를 이길 수 없었다. 루이의 칼이 한 번 휘둘릴 때마다 수십 명의 요괴들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챙―.
평소의 그라면 이런 하찮은 요괴들에게 상처 하나 입지 않았을 텐데, 루이는 어이없게도 한 요괴에게 어깨를 내어주고 말았다. 그만큼 오랜 전쟁에 지쳐 있다는 말이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자 화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런 하찮은 요괴에게 어깨를 내어주었다는 수치심을 느끼기도 전에 더 거친 공격이 그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지.’
루이는 쥐고 있던 검을 땅에 꽂았다. 더 강한 요괴들을 상대할 때를 대비해서 힘을 아껴두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칼을 땅에 꽂는 순간 회색빛의 안개가 그의 주변을 맴돌더니 이내 춤을 추듯 너풀거리며 요괴들 쪽으로 기어갔다.
안개가 위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요괴들은 방어하지 않고 그저 루이만을 노려보며 그의 빈틈을 찾고 있었다.
그러길 몇 초…… 안개가 요괴들의 몸에 닿자 지독한 냄새와 함께 살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크, 크어억!”
“끄아아악!”
온몸을 강타하는 불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요괴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안개는 한 치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요괴들의 몸을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전부 녹여버렸다.
루이는 자신이 부리는 안개에 힘없이 당하는 요괴들을 한 번 흘깃 바라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적들 외에 이 주변에는 더 이상 적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는 이것으로 끝인 걸까? 그는 부디 이것으로 싸움이,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끝나길 바라고 있었다.
‘서영.’
전쟁이 끝나길 바라는 이유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를 들라고 한다면 서영 때문이었다.
그녀를 되찾아야 한다.
2년 넘게 정신없이 전쟁을 치르는 바람에 루이는 서영을 찾는 데 모든 신경을 쏟을 수 없었고, 그 때문인지 서영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이제 약속된 시간은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 이 기간 안에 서영을 온전하게 되찾지 못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는 모든 것을 다 잃고 말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번엔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되찾아야만 한다.
루이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다짐했다.
풀썩―.
눈앞에서 마지막까지 발악하고 있던 요괴가 죽자 루이는 검을 다시 쥐었다. 오랜 전쟁 때문에 지친 것은 루이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검 역시 오랜 전쟁에 지쳐 그 날이 다 상하고 말았고, 이건 제아무리 손재주가 뛰어난 드워프들이라도 다시 살리지 못할 것 같았다.
무뎌져 더 이상 쓸 수 없는 검이지만 자신과 2년 넘게 함께 싸워온 칼을 버릴 수 없어 루이는 검을 챙겼다.
채앵―.
그때, 갑자기 뒤에서 날카로운 칼이 날아왔다. 루이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는지 칼은 그가 피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옆에 있던 나무에 내리꽂혔다.
또 적인 건가? 오늘은 좀 전에 만난 적이 끝인 줄 알았는데, 끝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루이는 칼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무작정 돌진하지 않고 숨어서 지능적으로 공격한 것을 보면 방금 전 자신을 공격했던 놈들보다는 이성이 있는 놈이라는 소리였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이성을 가지고 있는 놈이라. 예사 놈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누굴까? 루이는 서서히 다가오는 요기를 감지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적이 누군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는 결코 자신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부스럭―.
풀숲이 흔들리더니 그 너머로 검붉은 드레스가 보였다.
심플하면서도 고혹적인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
미의 일족이라고 불리는 뱀파이어 일족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남자만 존재하는 뱀파이어 일족과 다르게 여자만 존재하는 마녀 일족.
“오랜만이군요.”
“시나.”
루이의 눈앞에 나타난 여자는 마녀 일족의 수장인 시나였다. 마녀 일족은 요괴 서열 2위로 불릴 만큼 강한 일족인 데다가 일족의 수장이라면 결코 얕볼 상대가 아니었기에 루이는 느슨해진 긴장의 끈을 꽉 부여잡았다.
“왜 그렇게 긴장하시나요, 루베르이.”
루이가 긴장한 것이 꽤나 신기했는지 시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분명 아름다운 미소인데 루이의 눈엔 그 미소가 가식적으로 보였다.
“네가 왜 이곳에 직접 나타난 거지? 무슨 속셈이냐.”
“어머? 제가 마녀 일족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모르시나요? 전 수장으로서 전쟁의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나온 것일 뿐, 특별히 무슨 목적이 있어서 온 건 아니랍니다.”
시나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루이 쪽으로 눈을 흘기며 말했다.
현재 요괴 전쟁은 뱀파이어 일족을 따르는 요괴들과 마녀 일족을 따르는 요괴들의 싸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마녀 일족과 뱀파이어 일족은 오랜 세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날 만큼 앙숙 관계였는데 단지 이 아슬아슬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모두 뱀파이어 로드였던 렌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렌의 힘은 마녀 일족이 감히 견주지 못할 만큼 강했고, 그 덕분에 마녀 일족은 감히 뱀파이어 일족을 넘보지 못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리려나 보네요. 렌이 죽다니. 이제 지긋지긋한 뱀파이어 일족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겠네요.”
시나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매우 산뜻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즐겁다는 의미였고, 그들에게 상황이 많이 유리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현재 뱀파이어 사회는 로드를 잃고 많은 수의 일족을 잃은 탓에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요괴 전쟁까지 치르고 있으니 다른 이들이 보기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림도 없지.’
뱀파이어 일족은 로드가 없다고 해서 무너지는 나약한 존재가 아님을 이번 기회를 통해 확실하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루이는 냉혹한 표정으로 시나를 쳐다봤다.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호? 당신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당연하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뱀파이어 일족은 건재해.”
루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나는 가당치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시나의 시선에 루이는 순간 울컥했지만, 괜히 도발해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아 참기로 했다.
“루이!”
그때 저 멀리서 에리샤가 루이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 긴박함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를 찾는 것을 보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 저 목소리가 뱀파이어 꽃의 목소리죠? 이번에 새로 개화한.”
시나가 뱀파이어 꽃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 루이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뱀파이어 꽃에 관한 것은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일족 내에서 쉬쉬하는 사실이었는데, 그녀가 알고 있다니. 거기다 새로 개화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안타까워요. 뱀파이어 꽃이 새로 개화하지 않았다면, 전대 뱀파이어 꽃이 렌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당신들이 이렇게 무너질 일은 없었을 텐데.”
루이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 꽃에 관한 것이야 어떻게든 알았다고 해도 뱀파이어 일족 내에서도 잘 모르는 렌의 죽음과 관련된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다니. 혹시 내부에 스파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루이는 한층 더 차가워진 목소리로 시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글쎄요. 어떻게 아는 걸까요?”
시나는 루이의 질문에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한 이치였다. 어떤 바보가 남의 약점을 선뜻 알려준단 말인가. 그녀가 대답해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루이는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루이! 어디 있어!”
에리샤의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루이는 발걸음을 돌렸다.
에리샤와 시나를 만나게 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둘을 만나게 해준다는 건 시나에게 좋은 먹잇감을 보여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시나는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루이는 시나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에리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루이!”
커다란 나무를 몇십 개 지나 뱀파이어의 요새 근처에 도착하자 배회하고 있는 에리샤가 보였다. 에리샤 역시 루이를 발견하고는 쪼르르 그에게 다가왔다.
“왜 나와 있는 거지? 호위는.”
뱀파이어 꽃인 그녀를 노리는 자가 많은데 위험천만하게 혼자 돌아다니다니. 이건 나 잡아달라고 광고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루이가 엄한 눈으로 꾸짖듯 말하자 에리샤가 입을 삐죽이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그냥 네가 너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아 걱정돼서 나왔는데 너무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에리샤, 늘 말하지만 네 신분을 잊지 말도록 해. 네가 없어지면 뱀파이어 사회가 무너진다.”
“그건 알지만 그래도…….”
“알면 됐다. 얼른 돌아가자.”
루이는 날개로 에리샤를 가리며 말했다. 이런 곳에 더 있다가 다른 이들의 표적이라도 되면 큰일이었다.
루이는 서둘러 에리샤를 들어 안은 뒤 날개를 펄럭여 뱀파이어 요새로 날아갔다. 뱀파이어들은 하급, 상급 할 것 없이 모두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에리샤는 특수한 사정 때문에 날갯짓을 할 수 없어 루이가 직접 그녀를 옮겨줘야만 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요새에서는 갑작스럽게 사라진 에리샤를 찾느라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아마 말도 하지 않고 무작정 빠져나온 것일 테지.’
루이는 한숨을 쉬며 에리샤를 찾느라 난동을 피우고 있는 시종들과 뱀파이어들에게 에리샤를 넘겨주었다. 그러자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통곡하며 에리샤의 이름을 불렀다.
“에리샤 님!”
“걱정했습니다. 엉엉.”
“어, 어, 울지 마.”
자신의 치맛자락을 잡고 울어젖히는 이들 때문에 당황한 에리샤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그들을 달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고, 에리샤는 그들에게 한참이나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피곤하군.’
요새를 눈물바다로 만드는 이들을 잠시 바라보던 루이는 피곤한 듯 눈두덩을 누르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벌써 며칠째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칼을 휘둘렀기 때문에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만.’
루이는 피에 얼룩진 제복 재킷을 아무 데나 벗어 던지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지금 상태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조금만 쉰 다음에 인간 세상으로 넘어가 서영을 찾자. 그렇게 생각하며 루이는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닫았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루이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소망이 무너진다면 어떨까?
그의 이름은 렌. 전대 뱀파이어 로드였던 그는 전대 뱀파이어 꽃인 미엘에게 버림을 받고 소멸했었다. 아니, 모두들 그가 소멸한 줄 알고 있었지만, 렌은 소멸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육체를 잃었을 뿐, 그의 영혼은 루이의 친구인 슈란의 몸에 기생하며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 사실을 안 루이 일행이 슈란을 죽이자 머물 몸을 잃은 렌은 루이의 신부인 서영의 몸에 들어가 루이를 협박했다.
―루베르이, 우리 재미있는 내기 하나 할까?
루이는 그때 렌과 내기를 한 것을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아무리 자신의 신부를 인질로 삼아 협박을 한 것이라지만 렌과 내기 따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부터 이 아이를 다른 곳으로 보낼 테니 너는 3년 안에 이 아이를 찾으면 돼. 그동안 난 이 아이의 몸에 잠들어만 있을 뿐, 이 아이에겐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
얼핏 보면 렌의 내기는 매우 쉬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내기엔 치명적인 함정이 있었다.
―참, 내가 찾으라는 건 단순하게 이 아이가 아니야. 나도 미엘과 같은 짓을 해보려고 하거든.
전대 뱀파이어 꽃이었던 미엘은 2천 년 동안 렌에게 감금당해 있었다. 후에 아이를 임신한 미엘은 스스로 렌의 손아귀에서 탈출했지만 결국 렌이 만든 협회에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협회에서 몸을 풀었고, 서영과 에리샤라는 두 명의 뱀파이어 꽃을 낳았다.
미엘은 아이들이 자신처럼 뱀파이어 꽃이라는 저주받은 운명의 속박에 얽매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식 중 단 한 명이라도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생각한 미엘은 결국 모든 힘을 쏟아부어 서영의 몸속에 있는 뱀파이어의 힘을 봉인시켰다.
하지만 운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리였던 것일까? 약 16년 동안 인간으로 살았던 서영은 루이에 의해 다시 뱀파이어 꽃이라는 운명의 굴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네가 인간 세상 어딘가에 있는 이 아이를 찾았을 땐, 이 아이의 기억이 모두 봉인되어 있을 거야. 너는 그 기억을 푸는 봉인의 열쇠를 찾으면 돼. 3년 안에 찾지 못하면, 너는 네 몸을 나에게 줘야 할 것이고 만약 네가 찾는다면 난 그대로 소멸하겠어.
뱀파이어 꽃은 스스로가 자각하지 않으면 그 힘이 표출되지 않는다. 서영의 기억을 봉인한다는 것은 뱀파이어 꽃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말과 같았다. 이는 뱀파이어 로드를 결정할 수도,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킬 수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서영이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루이의 심장을 파고드는 아픔은 그녀가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서영이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잊는다는 것…….
그는 그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심장을 아리게 만들었다.
‘반드시 되찾을 거다.’
루이는 이를 악문 채 다짐했다. 그녀는 그의 것이다. 제아무리 렌이 그녀를 저 멀리 보낸다고 해도 어떻게든 다시 되찾아올 것이다.  
루이는 발을 세게 구르며 자신을 감싸고 있는 어둠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그의 발이 땅에 찍힐 때마다 어둠에 균열이 생겼고, 곧 균열은 어둠을 산산조각 내며 환한 빛을 불러왔다.
“젠장.”
악몽에서 깨어난 루이는 낮게 욕설을 뱉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렌과 내기한 시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그날의 꿈을 자주 꾼다. 원래 뱀파이어들은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꿈을 꾸지 않는 종족이다. 그런데 그 꿈을 꾼다는 이야기는 무의식적으로 렌을 계속 신경 쓰고 있다는 소리였다. 숨긴다고 숨겼지만 내면에서까지 초조함을 숨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요새에는 시계가 없으니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흘렀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피곤한 몸이 조금 더 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루이는 무시했다. 그에게 쉴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는 요새의 시종이 미리 가져다둔 깨끗한 제복으로 갈아입은 뒤 거울을 보며 옷을 잘 갈무리했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