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거리 두기 부부
2. 완벽한 세자의 비밀
3. 보여 주기 부부의 탄생
4. 이미지단
5. 감춰두었던 첫사랑
6. 의문의 꽃도령
7. 연애 소설의 비밀
8. 덕후하다
9. 공식적인 합방
10. 연모의 이상증세들
11. 알 수 없는 준비
12. 비밀 나들이
13. 운명적 대면
14. 글로 배운 질투
15. 엇갈리는 시선들
16. 직진 세자
1. 거리 두기 부부
벌써 4년째였다. 세자의 독수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동궁전의 내관들과 궁녀들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궁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쉬쉬하며 모른 척하는 것뿐. 지난 몇 년간은 세자 부부의 나이가 어린 관계로 무마할 수 있었지만, 이제 세손을 기다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의 병환이 깊어지면서는 더욱 모두의 관심이 세자 부부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세자 원도 잘 알고 있었다. 세자를 모시고 있는 민 상궁이 날짜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관상감에서 보내온 날이옵니다. 빈궁전에도 전달이 됐습니다.”
원은 무표정하게 책에 시선을 두었다. 원의 표정을 살핀 민 상궁 역시 아무 말 없었다. 세자가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원이 책을 내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다.”
원은 대전으로 향했다. 오늘도, 혼자였다. 원의 뒤를 따르는 동궁전 궁녀들은 발끈하는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설마 또일까? 빈궁께선 이번에도 거리를 두시겠지?”
“도대체 우리 저하께서 무엇이 부족하여 합방을 거부당하고 있는 거야?”
“그럴 거면 왜 입궁하셨어? 차라리 세자 저하를 나한테 주시든지.”
“세자 저하는 왜 가만히 두시는 거야? 저 정도 미친 짓이면 폐위도 가능할 텐데.”
“우리 저하가 너무 아까워!!”
“우리 세자 저하가 어떤 분이신데…….”
대부분의 궁녀들이 세자빈을 원망하고 있었다. 세자빈에게 설명이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원! 그는 궁을 넘어, 조선 팔도의 아녀자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사내였다.
유일한 적자로 왕위를 당연히 이어받을 세자라는 신분도 대단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영민하여 학문이 깊은 것은 물론이오, 무예도 뛰어나 세자를 호위하는 익위사들과 비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그림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어지간한 예인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성품은 따사로워 백성을 생각하는 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잘못하는 대신들에겐 엄격히 대하는 차가움도 갖추고 있었다.
정점은 외모였다. 맑은 얼굴빛, 짙은 눈썹과 심연만큼 깊은 눈동자,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고 적당히 오뚝한 코, 얇은 인중을 타고 내려오는 장밋빛 입술, 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받쳐 주고 있는 유연한 턱선과 날렵한 목선.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차가운 표정. 단연코 조선 팔도에 세자를 마다할 수 있는 여인네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 세자와의 합방을 거부하고 있으니, 궁 안에 있는 여인네들은 안타까워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차라리 나에게 달라는 소리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대전 앞에 이른 원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부모들의 잔소리를 한 몸에 받을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참지 못한 어머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세자! 아직도 빈궁을 놔두고 계신 겁니까? 이 어미가 나서 준다 하지 않았습니까.”
“송구합니다. 제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중전의 얘기를 들으며 기침을 하고 있던 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기력은 없었지만, 말투는 낮고 중후했다. 눈빛에선 단호하고 날카로운 냉정함이 묻어났다. 원이 쏙 빼닮은 아버지였다.
“세자! 보다시피 내가 몸이 이렇다.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겠구나. 너를 보위에 올리는 건 걱정이 안 되나, 왕실과 종묘사직을 위해 빈궁도 마음을 잡고 하루빨리 세손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 아바마마.”
“그간은 빈궁을 이해해 달라는 네 뜻을 받아들였으나, 더 이상은 무리일 것이야. 큼큼!”
“알고 있습니다, 아바마마.”
원은 걱정스럽게 기침을 하고 있는 아버지의 상태를 살폈다. 어의로부터 듣긴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깊어지고 있었다.
원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선대에 일어난 전란 후, 무너진 조선을 재건하는 데 온 힘을 쏟으셨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남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자기들 밥그릇 싸움만 하며, 왕과 세자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의 병세가 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세자 부부의 거리 두기 문제로 꼬투리가 잡힌다면……. 원도 이제 세자빈에 대해 결정을 해야 했다.
대전에서 나온 원이 빈궁전으로 향하며 한 내관에게 물었다.
“이번엔 빈궁이 무슨 핑계를 댈지 궁금하지 않느냐?”
한 내관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원은 그간 세자빈이 댔던 핑계들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엔 아주 간단하게 몸이 좋지 않아 합방할 수 없다 하였고, 그다음엔 이상한 꿈을 꾸어 불길하다 하였었다. 그러더니 새벽녘에 궁궐 담벼락 어딘가의 개구멍에 낀 채 발견이 되었고, 그다음엔 궁녀 복장을 하고 나가다 세자익위사들에게 발각되었다. 그다음도, 그다음도……. 그렇게 4년이나 지날 줄은 몰랐다.
빈궁전 후원에 들어서자 멀리서 세자빈이 보였다. 포근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털옷을 걸치고, 꺄르르 웃으며 꽃을 흔들고 있었다. 머리엔 이미 꽃 몇 송이가 우왕좌왕 꽂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원이 한 내관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꽃을 머리에 꽂고 웃는 여인의 상태는 두 가지가 있지. 이번 핑계는 저것이로군.”
머리에 꽃을 꽂은 세자빈이 폴짝폴짝 뛰며 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하하하하! 세자 저하! 눈이 옵니다!”
“눈이 아니라 꽃이 날립니다. 지금도 들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하하하하!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덥습니다?”
“그 옷을 입고 계시니 당연히 더우시겠죠. 날이 얼마나 따뜻한데요.”
“아~!”
얼마 전부터 세자빈이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건, 이미 궁궐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것도 모두의 비슷한 생각이었다. 세자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전혀 개의치 않고 일관성 있게 광짓을 하고 있었다.
세자빈이 갑자기 털옷을 벗어 던지더니 몇 바퀴를 빙글빙글 돌았다. 빈궁전의 지 상궁을 비롯한 모든 내관들과 궁녀들이 당황하는 기색으로 세자빈을 바라보았다.
“저런! 어지러우시겠습니다.”
무표정한 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세자빈이 들고 있던 꽃을 세자의 귀에 꽂아 주며 손뼉을 치고 깔깔 웃어 댔다.
“예쁘십니다! 저하!”
원이 자신의 귀에 꽂힌 꽃을 까칠하게 빼내며 말했다.
“관상감에서 연락받으셨겠지요? 이번에는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습니다. 내명부 상궁들이 합방을 보필한다 하더군요. 밤! 새! 도! 록!”
“아하하하하! 그럼 밤새도록 윷놀이를 하는 것입니까? 투호를 하는 것입니까?”
어처구니없는 말에 원이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아! 저쪽에 더 예쁜 꽃이 있습니다! 아하하하하!”
세자빈은 꽃밭으로 폴짝폴짝 뛰어가며 과장된 행동으로 향기를 맡았다. 향기를 얼마나 세게 들이 맡았는지, 꽃잎이 콧속으로 빨려 들어갈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원이 세자빈에게 다가가더니, 꽃을 잔뜩 꺾어 세자빈의 머리 빈 곳에 꽂아 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날을 기대하겠습니다, 빈궁.”
세자빈 석류가 잠시 멈칫하며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곧 원이 꽂아 준 꽃을 만지며 웃기만 했다.
“아하하하하! 더 많이 주십시오! 기분이 좋아집니다!”
석류의 기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원은 꽃밭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석류는 꽃 속에서 춤까지 추고 있었다. 지 상궁과 내관들, 궁녀들은 여전히 원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원은 입꼬리만 올린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석류는 꽃을 꽂고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도 원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봐 온 표정이었다. 어디 맘대로 해 보라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맘대로 해 보지!’
석류는 머리 곳곳에 꽂힌 꽃잎이 얼마나 웃길까를 생각하며, 갑자기 연못을 바라보았다. 연못엔 팔뚝만 한 잉어들이 노닐고 있었다.
“얘들아! 너희들도 꽃 좋아하니? 아하하하하!”
석류가 연못 앞에 쪼그려 앉아 잉어들을 향해 머리에 있는 꽃잎을 빼서 던져 주었다. 누가 봐도 광인이었다.
“얘들아! 이거 먹어! 아하하하하!”
내관과 궁녀들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석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원은 일어나 뒷짐을 지고 천천히 다가갔다. 세상 느긋한 표정이었다.
석류가 그런 원을 보고 무언가 결심을 한 듯 벌떡 일어났다.
“히야!”
괴상한 환호와 함께 석류가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마마!!”
내관 한 명이 석류를 구하려 뛰어들려고 할 때였다. 옆에서 누군가가 먼저 뛰어들었다.
“저하!!”
원이 허우적거리는 석류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석류의 목을 감아 잡아끌었다. 원과 석류의 얼굴이, 서로의 눈과 코와 입이, 가까이에 닿았다. 서로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까지 닿고 있었다. 혼례를 한 이후, 가장 가까운 거리였다.
“어서 빨리!”
한 내관의 외침에 홀딱 젖은 석류와 원이 내관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 빈궁마마를 모시거라.”
“아하하하!”
이 와중에도 웃음을 멈추지 않은 석류는 지 상궁과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빈궁전으로 들어 옷을 갈아입었다. 지 상궁은 어찌 연못까지 뛰어드실 수 있느냐 잔소리를 해댔지만 석류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머릿속을 정리 중이었다.
“아니 왜 거기서 자기가 끼어들어? 헤엄도 못 치면서?”
석류는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원의 모습을 떠올렸다. 워낙 고운 자태이니, 뛰어드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긴 했다. 원의 몸을 끌어안았을 땐 그 탄탄함에 조금 놀라기도 했다. 젖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입김에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린 것도 사실이었다. 조선 최고의 사내라는 사실은 석류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궁녀들처럼 원에게 마음을 뺏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사실이 그렇다는 것뿐이었다.
솔직히 연못에서 원을 구한 건 석류였다. 원은 헤엄을 치지 못했다. 석류가 원을 재빨리 잡지 않았다면, 원이 위험했을 것이었다. 아마도 궁궐, 아니 온 조선이 난리가 날 대사건이 됐을지도 몰랐다. 석류는 헤엄도 치지 못하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에 뛰어든 원에게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함께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무작정 뛰어드냐고! 내가 알아서 나올 수 있는데!”
석류의 마음은 더 급해지고 있었다. 합방일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고, 원이 말한 대로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다.
‘합방이 성사되기 전에 탈출에 성공해야 돼! 진짜 회임이라도 되면 다 끝나는 거야! 이번에 실패하면 죽을 때까지 궁궐에 갇혀 사는 거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수 있었다. 다행히 요 근래 기이한 행동을 했더니, 조정 대신들이 세자빈 폐위를 언급했다고 한다. 아마 세손 문제도 함께 있을 것이었다. 이제는 쐐기를 박아야 했다.
석류는 의지를 다지며 방으로 들어가 서신을 쓸 준비를 했다. 화선지 밑에는 직접 그린 궁궐 지도가 몇 장 있었다. 미로 같은 궁궐을 돌고 돌면서 조금씩 그려 온 지도였다. 어릴 땐 궁궐을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가족들부터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원초적인 방법을 포기했다. 대신 다른 방법들을 고안하며 차근차근 실행하고 있었다. 실행한 방법만 일지로 남겼어도 책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전부 실패였다. 그래도 이런 기이한 행동을 하면 광증이라 취급받고 궁에서 나가라 명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게 다 저하 때문이야!”
석류가 투덜거렸다. 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폐위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것 같았다. 그건 전하와 중전, 그러니까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시부모들은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들이었고, 유일한 아들을 엄하게 키우는 것 같았으나, 그만큼 아들의 뜻을 존중하는 분들이었다. 정략으로 세자빈이 된 어린 석류의 행동도 존중해 주었다. 아마 석류가 세자빈을 하고 싶었다면, 좋은 시댁을 만났다고 좋아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왜들 잘해 주는 걸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겠지? 생각해 본 적은 있었지만, 정확한 답은 내리지 못했다. 아니, 답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모르고 있는 게 지금의 석류에게는 속 편한 일이었다. 절대 마음을 열 수 없었다. 그저 약간 미안하다는 생각만 갖기로 했다. 석류는 광증이 통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신을 다 쓴 석류는 색장나인 유지를 불렀다. 궁에서의 서신을 궁 밖으로 전달하고, 답장을 가져오는 일을 하는 궁녀였다.
“부르셨습니까, 빈궁마마.”
궁녀 유지는 대놓고 까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요한 서신이니라. 꼭 대감마님께 직접 전해 드리고, 회신은 내게 직접 가져와야 하느니라.”
“예, 마마.”
석류는 유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마도 궁궐 안에서 세자를 제일 연모하는 궁녀일지도 몰랐다. 색장나인임에도 틈만 나면 동궁전을 들락거리며,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좇고 있었다. 세자를 연모하는 궁녀들과 어울려 다니며,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물론 석류는 유지의 그런 행동들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매번 저따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 거슬렸다.
* * *
동궁전에선 원이 흠뻑 젖은 옷을 벗고 있었다. 무예로 다져진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밖에 있는 궁녀들 사이에선 서로 세자의 새 옷을 가지고 들어가려 난리가 났다.
원은 조금 전, 그 짧은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생각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의도적으로 기이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연못에까지 뛰어들 줄은 몰랐다. 정말 놀랐고, 그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정말 죽으려고 한 걸까? 아냐. 헤엄을 잘 친 걸 보면, 광짓을 하고 싶었던 거야.’
원은 석류의 행동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합방을 피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이 궁궐이 싫은 걸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싫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민망한 장면이 떠올랐다. 원이 석류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을 때 상황 때문이었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이 마주했을 때, 원은 무척이나 두렵고 당황스러웠다.
-어! 어!
물에 뜨질 못해 허우적거렸던 것이었다. 원은 이럴 때 어찌해야 할지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런 원을 안전하게 물 밖으로 끌고 나온 것은 석류였다. 모든 동작과 힘이 능숙했다. 치맛자락이 물에 젖어 불편할 텐데, 어떻게 그렇게 날렵할 수 있는지 놀랍기까지 했다.
‘빈궁은 언제 헤엄치는 법을 배웠을까?’
사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배웠을 것이 틀림없었다. 원은 세자빈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공유한다면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 가지고는 거리 두기 부부의 오명을 벗을 방법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어의가 들었다.
“나는 괜찮다. 빈궁을 봐 드리거라.”
“빈궁마마께서는 강건하시어, 이미 후원을 돌아다니고 계십니다.”
“아…… 그래도 날씨가 추운데…….”
원은 어의를 앞세워 곧바로 빈궁전으로 향했다. 마침 유지가 서신을 들고 막 나오려고 하던 참이었다.
“세자 저하 드셨습니까.”
유지가 나가지 않고, 그대로 서서 원을 맞이했다. 유지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입꼬리가 승천하고 있었다. 세자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었지만, 봐도 봐도 웃음이 나왔다. 절대 질리지 않았다. 유지는 물러가야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 상궁의 눈짓을 못 본 것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원은 그런 유지는 보지도 못한 듯, 석류에게만 직진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원의 방문에 당황한 석류는 지금 뭘 하고 있어야 맞는 건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아까 마지막 행동이 뭐였더라?’
석류는 몸이 좋지 않은 척 연기하며,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원을 맞이했다. 원이 앞에 서더니 석류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석류가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섰다.
“다행입니다. 물에 빠지고 났더니, 광증은 가라앉은 모양입니다.”
석류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원의 방문에 광증 연기를 빼 먹고 있었다. 원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가며, 어의에게 세자빈을 살펴 드리라 손짓을 했다.
“어디 한번 살펴보십시다. 헤엄을 아무리 잘 치신다 해도, 물속은 아직 추우니까요. 사가에 가야 하는데, 아프시면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