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가져, 황제! 3권
날 가져, 황제! 3권
날 가져, 황제!
3권
날 가져, 황제! 3권
차 례
7장
8장
9장
날 가져, 황제! 3권
7장
지금껏 세레나는 아델하이트와 안젤리카가 대치할 때마다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바로 자신이 개입할 순간이었다.
아델하이트의 이야기는 자신이 목격한 것과도 일맥상통했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요.”
그러나 안젤리카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녀를 스쳐 지났다. 그러나 그녀의 앞을 세자르가 막아섰다.
“폐하……!”
그녀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구겨졌다. 황제마저 이 기가 막히는 상황에 동참할 모양이었다.
그는 안젤리카의 구두를 살짝 내려다보다 이내 딱딱하게 말했다.
“세레나의 말대로 하십시오.”
“지금 마물이 제 발을 가리켰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으시겠다는 거예요?”
그녀는 경악이 담긴 눈으로 세자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세자르는 한 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오늘의 사냥제에서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거대하고 높은 위험도를 가진 마물의 등장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인 데다, 아델하이트의 말대로 그 마물은 보통의 마물처럼 아무나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만약 보통의 마물이었다면 아델하이트 한 사람과 그렇게 오랫동안 대치하지 않았을 터였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마물은 그러지 않았다. 처음부터 안젤리카를 노리는 것처럼 그의 앞을 막아선 자신과 아르한을 치워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마물의 눈동자는 마치 아델하이트를 천천히 관찰하는 듯했다. 꼭 아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결정적으로, 그 마물은 포효 한 번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에게 별다른 공격도 하지 않았다.
아델하이트조차 긴장할 정도의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떳떳하다면 그까짓 구두 한 번 보여주는 것이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세자르가 계속해서 말을 잇자 안젤리카는 당황스러워하며 제 입가를 부채로 가렸다. 그러곤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식히며 간신히 대꾸했다.
“레이디의 구두를 그렇게 마음대로 볼 수는…….”
“황제 폐하께서 후비의 구두를 보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답니까?”
세레나의 차가운 눈빛이 그녀에게로 닿았다.
더 이상 안젤리카가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아델하이트는 성큼성큼 걸어서 안젤리카의 발에서 구두를 빼내었다.
그리고 구두를 확인한 순간, 아델하이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그녀의 손이 구두 끝자락 장식에 숨겨진 작은 가죽 주머니를 빼내었다.
안젤리카는 아델하이트의 손에서 구두를 빼앗으려 버둥거렸다.
“주, 주세요!”
“이건 뭐지, 플로린?”
“마물에게서 절 지키는 마법의 가루일 뿐이에요!”
아델하이트는 가루를 든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보통 여인들의 평균 키보다도 작은 안젤리카는 그녀의 손에 결코 닿을 수 없었다.
“내놓으라고요……!”
안젤리카는 아델하이트에 손에 쥐어진 주머니를 빼앗는 데에 아주 필사적이었다.
아델하이트에게 빼앗긴 저 가죽 주머니 속에는 가루가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간단한 설명과 함께 보내준 가루였다. 이 가루의 정체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가루가 든 주머니를 구두에 매달고 산책하면 분명히 아델하이트를 창피를 줄 만한 일이 생길 거라고.
그러나 아니었다. 웬 거대 마물이 나타났고 믿기 힘들지만 그 마물은 정말 지능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루를 지닌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이후 상황은 더욱 처참했다.
안젤리카를 포함한 사냥제의 다른 이들이 겪은 것은 단순히 ‘창피’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사실 그래서 황궁으로 돌아온 안젤리카는 자신이 한 짓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그 가루의 정체에 대해 자세히 알았다면 결코 이런 짓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다쳤고 자신 또한 위험할 뻔했다.
꼭 그 마물과 교감하는 것처럼 보였던 아델하이트가 아니었다면 거기에 있는 모두가 죽었을지도 몰랐다.
안젤리카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솔직히 퉁명스럽게 말하기는 했지만 아델하이트에게 고마웠다. 그렇게 그녀를 미워하고 괴롭혔다.
심지어 이번에는 의도치 않게 마물까지 꼬여냈는데, 그것도 모른 채 자신을 구하려 몸을 던졌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따스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꼭 아주 든든한 언니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젤리카는 상처를 치료받으며 고민했다. 아델하이트와, 그리고 유리아와 관계를 회복할 방법을.
그러느라 주머니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던 그녀였다. 화려한 구두 장식 뒤에 숨겨놓았기에 결코 들킬 일이 없다고 자신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들켜버리다니. 이제 모든 것이 끝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미워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방해하던 안젤리카는 결국 포기한 듯 허무한 얼굴로 아델하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루를 손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무슨 가루인지 파악하기 위해 코를 가까이 가져가 향을 맡았다.
그 순간, 아델하이트가 콜록거리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누님?”
세자르가 황급히 다가왔다. 아델하이트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그녀는 제 가슴을 부여잡은 채 바닥에 엎드렸다.
“뭐, 뭐야?”
처음에는 약한 기침이었다. 그러나 그 기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당황해 잠시 멈칫했던 세레나가 아델하이트의 등을 두드려주는 세자르를 보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누님!”
“마마!”
그러나 아델하이트의 기침은 멎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자르는 엎드린 채 제 가슴을 부여잡은 아델하이트를 똑바로 눕혔다.
그녀의 눈동자가 왜인지 이상했다. 늘 말간 보석처럼 빛나던 금안이 마치 아까의 마물처럼 탁하게 변해 있었다.
세자르는 문을 열고 서둘러 황궁의를 불렀다. 그리고 안젤리카의 두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대체 저 가루가 뭐길래 누님이……. 설마 이렇게 될 것을 알고 독이라도 준비한 겁니까!”
“도, 독이라니요! 아니에요……!”
안젤리카의 눈동자 안으로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델하이트를 골리고 싶다는 나쁜 마음을 가진 것은 다 제 잘못이었다. 그러나 정말 살짝 창피를 주고 싶었을 뿐이지, 저렇게 괴롭게 만들거나 죽이려고 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 그저 아이아나 비에게 창피를 줄 만한 가루라 했는데……. 헉!”
안젤리카는 제 입을 황급히 막았다. 아델하이트가 쓰러져 당황한 나머지 가루의 정체를 스스로 밝히고 만 것이다.
세자르의 선한 눈매가 순식간에 아주 매섭게 변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그게……. 폐하……! 제 말 좀……!”
“아이아나 비를 창피 주려고 했다니요!”
“폐하!”
세자르가 안젤리카를 다그치고 있던 찰나, 황궁의가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어서 비를 봐주시오!”
세자르는 안젤리카에게서 시선을 떼곤 황궁의와 함께 아델하이트에게로 향했다.
안젤리카는 허무한 얼굴로 아델하이트를 감싸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곁을 떠났던 그 순간부터.
그녀는 쓸쓸함을 느끼면서도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아델하이트는 거의 발작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젤리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황궁의는 최대한 차분하게 아델하이트의 맥을 짚었다. 그녀의 맥은 야수처럼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맥 말고도 무언가가 이상했다. 아무리 오라나 마력을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마법사나 다른 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몸 주위로 흐르는 기의 모양새가 전혀 달랐다.
오히려 굳이 비슷한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마물이었다.
그는 의아한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황궁의는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약을 드신 겁니까……!”
“약이 아니라 가루를 들이마셨소. 이 가루를…….”
“이건…… 금지된 물품인 에스메타린 가루가 아닙니까! 상급 마물을 홀리는 가루입니다!”
황궁의의 물음에 세자르는 안젤리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차갑게 경악했다.
“상급 마물을 홀리는 가루라니!”
“……저, 저는 정말 그런 가루인 줄은 몰랐…….”
놀란 안젤리카는 시무룩하게 말끝을 흐렸다. 아무도 제 말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공손하게 모은 두 손은 제발 아델하이트에게 별일이 없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흐음……. 그런데 이상하군요. 그 가루는 사람에게 전혀 해로운 가루가 아닌데…….”
“그렇다면 아이아나 비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인단 말이오!”
“우선 진정제를 먹여보겠습니다.”
황궁의는 가져온 가방을 펼쳤다. 그의 가방에는 작은 장난감처럼 보이는 각종 약초와 물약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것들은 거의 엄지손톱만큼 작았다. 그러나 황궁의가 그중 하나를 집어 후, 하고 불자 물약은 원래의 크기를 되찾았다.
그는 같은 방법으로 물약 여러 개를 바텐더처럼 능숙하게 섞었다.
“폐하께서 이것을 마마께 먹여주시겠습니까.”
“……어떻게……?”
“의식이 없는 데다 발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요.”
황궁의의 말에 세레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의미를 깨달은 세자르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답은 하나였다. 입에서 입으로 넘겨주는 것.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델하이트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렇게 주저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알겠소.”
세자르는 황궁의의 손에 들린 약을 빠르게 제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발작으로 인한 움직임 때문에 약을 흘리지 않도록 그녀의 두 손을 강하게 붙잡곤 조심스럽게 아델하이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마침내 두 입술이 마주했다. 세자르는 귀까지 빨개져선 제 입의 약을 모조리 그녀의 입 안으로 조심스레 흘려 넣었다.
약이 들어가자 강하게 힘을 주고 있던 아델하이트의 온몸이 축 늘어졌다.
“……안색이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
아델하이트에게서 입술을 뗀 세자르가 빠르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새파랗게 질려있던 얼굴이 점점 제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황궁의는 황급히 다시 그녀의 맥을 짚었다. 날뛰던 맥 또한 다행히도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진정제만으로 안정을 찾은 것을 보아하니 일시적인 발작 증세였던 것 같습니다.”
“휴…….”
세자르는 땀에 젖은 아델하이트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은 푹 쉬게끔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폐하.”
“수고하셨소.”
황궁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가자, 세자르가 세레나를 향해 말했다.
“우리도 나갑시다.”
세자르는 어쩐지 조금 씁쓸해 보이는 표정의 세레나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람이 가시질 않았는지 붉은 기가 가득했다.
“……예, 폐하.”
세레나의 목소리는 풀이 잔뜩 죽어 있었다. 세자르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의아해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문 쪽으로 향했다.
문 앞에는 안젤리카가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서 있었다. 여전히 아델하이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녀는 아델하이트의 숨이 편안해지자 안심한 듯 울먹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다고 해서 안젤리카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문을 연 세자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안젤리카의 손목을 잡고 내쫓듯 방 밖으로 끌었다.
“앗……!”
그러고는 아델하이트가 잠에서 깨지 않게 문을 꽉 닫았다.
문을 닫은 세자르의 눈빛이 얼음보다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주위로 날카로운 살기가 흘렀다. 세레나는 그런 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렇게 화난 모습의 세자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안젤리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델하이트가 안정을 찾은 것은 다행이긴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들통난 데다 웬일인지 제가 준비한 가루로 인해 아델하이트까지 쓰러졌다. 그러니 제 처지가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