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가져, 황제! 1권
날 가져, 황제! 1권
날 가져, 황제!
1권
날 가져, 황제! 1권
차 례
1장
2장
3장
날 가져, 황제! 1권
1장
대륙은 지금까지 역사에 없었던 대전쟁 중이었다. 작은 왕국과 큰 제국 할 것 없이 국가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왕족과 황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대지 위엔 죽고 죽이고, 그저 살기 위해 싸우는 황량함만이 가득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마음 또한 그처럼 각박해져 갔다.
그것은 열세 살의 소녀, 델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델의 머릿속에는 처음부터 고아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세상에 지킬 것이라곤 오직 자신의 몸 하나뿐인 소녀는 오늘도 오로지 생존을 위하여, 쓰레기가 가득한 시체 더미들을 뒤졌다.
꽃과 인형을 안아야 할 아이의 손에는 피와 오물들이 가득 묻어 있었다.
델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 썩지 않은 시체들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이렇다 할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아이씨.”
오늘도 허탕이야? 담배라도 발견되면 좋으련만. 비싸게 팔 수 있을 건데.
며칠째 허탕이었다. 하도 굶어 배 속에서는 먹을 것을 들이라 소리쳐대는데, 고작 열세 살의 소녀가 전쟁 통에 할 수 있을 만한 일이라고는 쓰레기나 시체를 뒤지는 일밖에 없었다.
오늘은 무언가 식량으로 바꿔 먹을 수 있을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했던 델은 짜증을 내며 뒤돌아섰다.
그때, 시체 더미 사이로 무언가 작은 움직임이 보였다.
“응?”
살아있는 건가. 델은 움직이는 무언가를 유심히 보았다. 역시 시체 더미 사이에서 무언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의 마음속에는 누군가를 구해줄 만한 여유는 없었다.
‘나 살기도 바쁜데, 무슨.’
델은 귀를 후비적대며 발걸음을 돌렸다.
“……려줘.”
무어라 말하는 목소리에, 소녀의 귀가 쫑긋거렸다.
“……살려줘.”
‘나 참. 질기기도 하시군.’
그 순간 델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쳤다. 죽기 직전의 인간이라면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을 만한 가능성이 충분했다.
델은 작은 손으로 빠르게 시체들 사이를 헤쳤다.
소녀답지 않은 괴력으로 몇 구의 시체를 치워내자, 웬 중년의 사내가 드러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홍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그는 표정을 찡그린 채, 제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발목으로 시선이 향했다. 뭐에 당한 것인지 피로 칠갑이었다.
“어이쿠, 실례.”
델은 혓바닥을 살짝 내밀곤 노골적으로 그의 주머니를 뒤졌다.
‘럭키!’
무언가 찰랑거리는 것이 델의 손에 집혔다. 소녀는 그대로 그것을 꺼냈다.
여기저기 금이 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황금으로 된 시계였다.
“오, 영감탱이. 좋은 거 가지고 다니네?”
“……갖고 싶다면 네게 주겠다.”
“내 손안에 들어왔는데 뭘 주겠다는 거야? 이건 이미 내 거야. 이 순진한 아저씨야.”
델은 쿡쿡거리며 금시계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이 정도면 일주일은 굶지 않으리라. 아니, 한 달은 족히!
소녀의 진한 금빛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사내는 자신에게서 멀어지려는 델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힘없이, 그러나 위엄이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그보다 더한 것도 네게 줄 수 있다.”
“뭐?”
그냥 가려던 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초록색 눈동자는 꼭 에메랄드같이 영롱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 보석 같은 고귀한 눈동자에 델은 절로 시선을 빼앗겼다. 사내는 뒤이어 말했다.
“그 금시계보다 더한 걸 주마. 날 도와준다면.”
“내 한 몸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 도와달라고?”
델은 어린아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염세적인 표정을 지었다.
예쁜 건 예쁜 거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야 왜 없겠는가.
그러나 제겐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괴력이 있다고 한들 전투에는 이골이 난 흉악한 기사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을 피해 숨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일만 해도 피곤했다.
다리까지 다친 저런 영감탱이를 보살필 여력 따윈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다 낫게 되면…….”
사내는 먼지 한 톨 끼지 않은 것만 같은 깨끗한 눈빛으로 델을 응시했다.
“뭐든지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델의 금빛 눈동자와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왜일까. 그는 정말로 제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꼭 예전에 주운 동화책에서 보았던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처럼.
델의 시선이 그를 샅샅이 훑었다. 흙과 피에 칠갑이 된 더러운 몰골임에도, 사내의 몸에서는 묘한 고귀함이 흐르고 있었다.
“영감탱이, 이름이 뭐야?”
“……클레멘.”
“좋아. 내 어깨를 붙잡아.”
델은 웬 변덕인지 그를 구해주기로 했다. 소녀는 클레멘의 단단한 팔을 들어 제 어깨에 둘렀다.
“억…….”
고작 이런 어린 소녀가 중년의 사내를 부축하기에는 버거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델은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엄청난 힘에 놀란 클레멘의 입에서 저절로 억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힘 하나는 좀 좋아서 말이야.”
델은 놀라는 클레멘을 보며 피식 비웃었다.
클레멘은 소녀가 범상치 않은 힘의 소유자임을 느꼈다. 그리고 이 소녀가 자신이 빼앗긴 것들을 다시 찾아줄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들의 위로 황금빛 새가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것이, 델과 클레멘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 * *
“그게 아니지, 이렇게!”
클레멘과 델이 만난 지도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죽어가던 그는 델의 도움으로 다리의 상처를 모두 치료할 수 있었다. 아직 조금 절뚝이기는 했지만.
자신을 도와준 그녀에게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클레멘은 엄청난 괴력을 가진 델에게 온갖 훈련을 시켰다.
검술, 궁술, 창술, 승마, 기초 마법은 물론 순식간에 상대의 멱을 따버릴 수 있는 암살 기술들까지.
델의 몸은 전사의 기질을 타고나 모든 훈련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것은 궁술이었다. 그것도 마력을 이용한 궁술.
클레멘은 그녀에게 마력을 방출해 마력의 화살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델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제 손바닥 위에서 넘실거리는 마력 덩어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노려본다고 해서, 화살의 형태가 잡힐 리 없었다.
“악, 힘들어!”
결국, 델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마력 덩어리가 뿔뿔이 흩어졌다. 델은 헉헉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엄살 피우지 말거라. 다들 하는 게 뭐가 힘들다고.”
본디 마력을 방출하는 것은 마탑의 승인을 받은 하급 마법사 이상이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클레멘은 델의 엄청난 성장에 놀라면서도, 표정에는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델은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아이였다. 전사로서 키워낸다면 분명 전장에서 가히 명성을 떨칠 만한.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재능은 분명 델의 부모와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생각에 잠긴 클레멘의 눈이 옆으로 길어졌다. 델은 활을 바닥으로 내던지며 소리쳤다.
“힘들다고, 이 영감탱이야!”
“네가 훈련시켜 달라고 하지 않았더냐.”
머쓱해진 델은 장시간 훈련으로 인해 흙으로 범벅이 된 제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런 전쟁 통에서 쓸 만한 기술이라곤 싸움 기술밖에는 없었다.
클레멘이 기사 출신이라고 하길래 슬쩍 물어봤던 것인데, 1년이나 이렇게 지독한 훈련을 받을 줄은 몰랐다.
뭐 그래도,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힘들긴 하지만.
델은 흙이 묻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저녁 준비나 하러 갈 테니까 영감탱이는 기다리기나 해. 오늘은 산양고기 수프야.”
맨날 툭툭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참 심성이 고운 아이였다. 클레멘은 그녀를 훈련시키며 전사의 기질을 타고난 것에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전쟁만 아니었으면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배울 것이 아니라 명예를 좇으며 다른 사람을 지키는 기술을 배울 수도 있었다.
저 어린 소녀의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고된 훈련으로 인해 흙으로 덮여있지 않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장미 정원을 쏘다닐 수도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야, 이 떨거지들아. 밥 먹어!”
델은 제 몸만 한 가마솥을 가뿐히 들어 올려 커다란 나무 그루터기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말에 어디선가 어린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들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이었다.
클레멘에게 훈련을 받은 이후, 델은 적어도 먹을 것 걱정 정도는 하지 않게 되었다. 그에게 전수받은 기술들로 산에 사는 들짐승들을 사냥할 수 있었기에.
그러던 중, 고기 냄새에 홀린 어린아이들이 점점 델의 본거지에 모였다.
델은 그들을 매몰차게 쫓아낼 수 없었다. 아무런 능력이 없었던 이전과는 달랐다. 결국, 그녀는 아이들이 자신의 본거지에서 사는 것을 허락했다.
이전보다 몇 배의 사냥을 해야 하면서도, 한 번을 툴툴대지 않았다. 물론, 구박은 좀 했지만.
“힝, 우리 떨거지 아닌데.”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이 뭔 말이 많아. 자, 그릇이나 받아.”
말은 험악했지만, 델은 항상 클레멘과 아이들에게 식량을 다 나눠주고 나서야 남은 음식을 먹었다.
그런 델이 기특해, 클레멘은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저씨, 여기요!”
“고맙다.”
꼬맹이 중 한 명이 다가와서 클레멘에게 수프가 든 그릇을 건넸다.
그렇게 가마솥을 빡빡 긁어 모두에게 나눠주고 나서야, 델은 남은 찌꺼기들을 그릇에 담아 자리에 앉았다. 클레멘은 제 그릇에 있는 수프를 그녀의 그릇에 쏟았다.
“악, 뭐야!”
“양이 모자랄 듯해서.”
“난 원래 건더기를 좋아한단 말이야. 영감탱이 때문에 다 망했어!”
제 그릇에 가득 차버린 수프를 바라보며 델은 꽥 소리를 쳤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퍽퍽 소리를 내며 맛있게도 퍼먹어댔다.
싹싹 긁어 그릇을 모두 비운 델은 꼬맹이들에게 나눠줬던 그릇들을 차곡차곡 가마솥에 넣으며 외쳤다.
“식충이들, 오늘도 설거지는 내가 한다!”
“아니야, 누나. 우리가 할게!”
“이것들이 어디서 내 설거지를 넘보려고. 설거지가 얼마나 재밌는 건지 알기나 해? 어디서 급도 안 되는 것들이 말이야!”
델은 ‘으랏차’ 하는 소리를 내며 가마솥을 들어 올렸다. 솥이 크고 무거워 아이들이 설거지하기엔 영 무리였다. 그것을 아는 그녀는 늘 자신이 힘든 일을 도맡았다.
그 이유를 모르는 아이들은 설거지가 정말 재미있는 일인 줄 알고 옆에서 눈을 반짝일 뿐이었다.
“나도 오늘은 해보고 싶었는데…….”
“수프 600그릇은 더 먹고 와라, 꼬맹이.”
저녁 설거지까지 모두 마치고 나자, 델의 천막에도 밤이 내려왔다.
그녀는 꼬맹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짐승 가죽을 덮어준 후 제 자리에 누웠다. 바람이 거센 모양인지 간이 천막의 지붕이 세게 흔들렸다.
그때, 델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녀의 귀에 들린 것은 모르는 사내의 목소리였다.
“……뭐지?”
델은 클레멘이 가르쳐준 대로 제 걸음 소리를 숨기고는, 천막 밖으로 기어 나가 큰 바위 뒤로 몸을 감췄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클레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무려 1년입니다!”
“아르한…….”
“클레멘타인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