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찾으러 왔단다 1권
꽃 찾으러 왔단다 1권
꽃 찾으러 왔단다
1권
꽃 찾으러 왔단다 1권
차 례
1. 우리 집에 왜 왔니?
2. 잔망스러운 남자
3. 미혹의 봄
4.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
꽃 찾으러 왔단다 1권
1. 우리 집에 왜 왔니?
서울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마을이 있었다. 미세먼지 가득하고 삭막하기만 한 도시와는 달리 이 마을에선 맑은 하늘을 보며 맑은 공기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그 사람들이 저마다 아기자기한 전원주택을 짓기 시작했고 그렇게 이 마을이 꾸려졌다.
저마다 독특함과 아름다움을 뽐내는 전원주택들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곳은 단연 언덕 위에 위치한 새하얀 집이었다.
그 집은 이 마을이 꾸려지기 전부터 허허벌판에 홀로 지어져 있던 곳이었다.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독보적인 아름다움과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집을 부러워하는 건 그 집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마을 끝자락엔 강이 흐르고 있는데, 해 질 녘이 되면 건너편 산마루에 노을이 지며 강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었다. 아는 사람만 알기에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경치였다.
그런 경치를 윤슬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윤슬이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그 집은 그 윤슬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윤슬이 아름다운 그곳에, 공교롭게도 ‘윤슬’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그녀가 살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 집은 어떤 부잣집의 별장이고 거의 비어있는 곳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실제로 몇 년 전까지는 별장에 불과한 집이었으니.
그런데 근래에 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그 집에 사람이 드나드는 모습이 목격되기 시작했다. 이 마을 주민이 아닌 아주머니가 매일같이 드나드는 듯했고, 택배기사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그 집의 번지수를 대며 위치를 물어오는 걸로 보아 그곳에 누군가가 살기 시작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호기심 많은 마을 주민들은 그 집을 지나갈 때마다 힐끗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나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음침한 넓은 정원이 시야를 방해했다. 그러니 그 집이 마을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 얼마 전, 그곳을 기웃거리던 이 마을 부녀회장은 드디어 그 집에서 나오는 한 중년 여자와 마주칠 수 있었다.
“비… 빈집이에요. 저는 종종 들러서 청소 해주는 관리인일 뿐이라고요.”
부녀회장이 이 집의 주인 되느냐고 묻자 여자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뭔가 숨기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부녀회장이 다른 것을 더 물을 새도 없이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의문만 늘어나 버린 것이었다.
“아무래도 범죄자 같은 게 숨어있는 거 아녀?”
“그렇지. 돈 많은 범죄자가 경찰 피해 숨어있는 거 같어.”
그러다 보니 마을에는 이런 흉흉한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문이 그 집에서 나왔던 중년 여자에게 닿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윤슬이 아름다운 이곳엔 윤슬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자가 살고 있을 뿐이었다.
* * *
“그런가요?”
슬은 그 소문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이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미옥은 답답한 듯 더욱 호들갑스럽게 굴었다.
“아이구, 슬이 아가씨.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다 의심이 커져서 진짜로 누가 신고라도 하면 어째요? 경찰 들이닥치는 건 순식간이라고요!”
“돌려보내면 되죠. 전 범죄자가 아니니까.”
“말이 쉽죠. 멀쩡한 사람 범죄자 취급하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데요? 괜히 경찰서 들락날락해서 좋을 게 뭐가 있어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아가씨. 그러지 말고 마을 사람들한테라도 언지를 주시는 게…….”
“싫어요.”
슬의 단호한 대답에 미옥은 한숨을 푹 내쉬는 것 말고는 딱히 대꾸할 수가 없었다. 고용주가 싫다고 말하는데 고용인이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어휴… 계세요. 식사 준비 금방 해드릴게요.”
“네. 늘 감사드려요.”
미옥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슬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다가가 힘껏 커튼을 젖혔다. 열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캄캄했던 집 안 가득 햇빛이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왔다.
갑자기 햇빛이 들이닥치면 으레 인상을 찌푸리기 마련인데, 슬은 오히려 반갑다는 듯 햇볕을 만끽한 채 쭉- 기지개를 켰다.
빛이 닿자 그녀의 뽀얀 피부가 더욱 빛났다. 정말이지 이렇게만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여자였다.
“슬이 아가씨. 식사하세요.”
이 집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미옥의 출근 시간은 여느 직장인들과 다름없는 오전 9시.
그런데 슬은 늘 그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옷장 가득한 옷들 중 예쁜 옷을 골라 입고, 화장까지 곱게 마친 채 미옥을 맞이했다.
누가 봐도 곧 외출할 것 같은 차림이지만 달리 어딘가로 외출한 적은 없었다. 지난 2년간 단 한 번도.
왜냐하면 그녀는 집 안에만 틀어박혀서 지내는 은둔형 외톨이. 즉, 히키코모리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히키코모리라 하면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 일어나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모습을 떠올리곤 하는데, 슬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집에 가정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상당히 럭셔리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잘 먹었습니다.”
토스트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그녀는 곧장 커튼이 걷힌 거실의 통유리문 앞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녀의 일과는 매일 비슷했다. 책을 읽거나, DVD를 구매해 영화를 보거나, 그냥 텔레비전만 틀어도 채널은 많고 많아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때때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한번 붓을 쥐면 며칠의 시간을 훌쩍 써버리기도 했다.
인터넷 쇼핑은 그녀의 제일 큰 즐거움이었다. 백화점에 가지 못하는 대신 웹 서핑을 하며 쇼핑을 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필요한 건 뭐든 인터넷으로 구매할 수 있는 시대니까.
물론 그 많은 택배를 수령하는 건 미옥의 몫이어야 했다.
그래도 다행히 온종일 실내에만 들어앉아 있는 건 아니었고, 날씨가 좋은 날은 자주 집 밖으로 나갔다.
뾰족하고 두터운 하얀색 울타리가 정원을 포함해 집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슬이 디딜 수 있는 영역은 딱 그 울타리 안쪽까지 만이었다. 집 밖으로는 나와도 대문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거였다.
정원은 충분히 넓었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음침했다. 그나마 정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깔끔했는데, 강이 내려다보이는 좋은 위치에 그네가 하나 놓여있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주로 그 그네에 앉아 흐르는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명상에 빠져 있고는 했다.
다른 히키코모리들에 비하면 상당히 요상하긴 하겠지만 활동영역이 그들보다 조금 더 넓을 뿐, 한정된 공간 안에 틀어박혀 있는 모습이나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모습을 보면 그녀를 히키코모리라 칭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슬은 지난 2년간, 단 한 번도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세상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던 간에, 적어도 이 울타리 안에서만큼은 매일이 안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이 평화로움이 흐트러질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 * *
“비가 오려나…….”
굳게 닫힌 커튼을 살짝 들춰 밖을 살피던 미옥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비 온다는 예보가 있기는 했어요.”
미옥이 황급히 커튼을 닫으며 뒤를 돌아보자, 슬이 주방에서 머그잔에 담긴 홍차를 호호 불면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해가 제법 길어졌네요. 집사님 퇴근하실 때쯤이면 캄캄했었는데.”
보통은 가정부에게 ‘아주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곤 하지만 그녀는 늘 ‘집사님’이라며 미옥에게 존칭을 붙였다.
미옥이 부담스러워하며 편히 대해달라고 만류해도 슬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록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일지라도 자신을 위해 일 해주는 사람이니 예의를 차리는 건 당연하다며.
그러다 보니 미옥도 그녀의 존칭과 존대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비 오기 전에 오늘은 얼른 들어가 보세요.”
“어휴, 아녜요. 아직 저녁 드신 거 뒷정리도 못 했구요.”
“설거지 그거 하룻밤 정도 밀리면 어때서 그래요.”
“그래도요.”
“비 오면 집에 가는 길 힘들어지실 거 아녜요. 어서요.”
미옥은 못 이기는 척 앞치마를 벗어 정돈하고 주방 캐비닛에 넣어두었던 외투를 꺼내 입었다.
늘 해왔던 생각이지만 오늘 또 생각했다. 이토록 천사 같은 아가씨를 고용주로 만난 건 정말이지 평생의 행운을 다 갖다 바치고 얻은 것일 거라고.
“봄비가 이렇게 기다려질 줄이야.”
슬은 그대로 머그잔을 들고 현관 앞까지 미옥을 배웅했다.
“또 눈이 오진 않겠죠? 지난겨울 내내 지겹도록 왔잖아요.”
“그러게요. 어휴, 눈이라면 이제 징글징글해요.”
“기왕 비 올 거 요란하게 쏟아졌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아가씨는 왜 그렇게 비를 기다리세요?”
“봄비가 와야 봄이 올 테니까요.”
“봄을 참 좋아하시네요.”
“아무렴, 봄인걸요.”
슬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걸려있었다. 봄이라는 단어를 입에만 담아도 기쁜 모양이었다.
“저 가볼게요. 문단속 잘하고 주무셔요.”
“네. 내일 봬요.”
미옥이 현관을 열자 축축이 젖은 흙내가 물씬 풍겨왔다. 슬은 그 내음을 비가 올 것 같다며 기분 좋게 받아들인 채 소파에 기대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보니 슬은 9시가 훌쩍 넘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자 행동이 다급해졌다. 텔레비전은 그대로 켜둔 채 현관문 앞까지 달려 나가 선반에 놓인 사료 봉지에서 사료를 한가득 옮겨 담은 뒤 곧장 현관문을 열었다.
“앗, 차가-”
슬이 바랐던 대로 비가 요란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슬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 앞에 대충 놓여있던 우산을 펼쳐 들고 텅 빈 차고로 향했다. 그 차고는 현관문을 바라보고 섰을 때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고, 강이 내려다보이는 그네와는 정 반대편에 있는 곳이었다. 차가 들어올 일은 거의 없어서 차고가 아니라 창고처럼 쓰이는 곳이었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그 차고에는 이미 다섯 마리의 고양이가 미리 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양이들은 흠뻑 젖은 털을 연신 혓바닥으로 핥아대다가 그녀가 사료를 놓아주자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비가 많이 오니까 오늘 밤에는 이 차고 안에서 머무르다 가. 알겠지?”
슬이 아기 고양이 중에서도 가장 작은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왜 이렇게 자라질 않니? 밥 좀 많이 먹어야 할 텐데…….”
매일 밤 9시쯤 반복되는 그녀의 일과였다. 처음엔 한 마리의 고양이를 위해 사료를 놓아두었는데 그 고양이가 다른 암컷 고양이를 데려오기 시작했고, 두어 달 전쯤엔 세 마리의 새끼까지 낳아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정부인 미옥말고는 달리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기에, 이 아이들에게 말을 붙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흣…….”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귀를 의심할만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있어!’
슬은 흠칫 놀라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소리는 차고 구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끙끙대며 아픔을 짓누르는 신음소리 같았다. 근처엔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져 있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앞으로 긴 다리가 뻗어져 나와 있었다. 남자 구두를 신고 있었다. 비록 신음소리이긴 해도 낮은 목소리였다. 분명히 남자였다.
‘어떡하지?’
남자? 당연히 무서운 존재였다. 더군다나 슬은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보였기 때문일까, 왜인지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무의식의 이끌림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슬은 두려움을 꾹 참고, 그 남자의 모습이라도 확인해보기 위해 숨죽인 채 그곳으로 다가갔다.
“핫!”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그 전에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나 그곳엔 어떤 남자가 있었다. 정장을 입은 채로 흠뻑 젖은 그 남자는 벽에 기대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고통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힘겹게 부여잡고 있는 허리춤에선 새빨간 피가 흘러나와 하얀색 셔츠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인기척에도 미동조차 없는 걸로 보아 정신을 반쯤 잃은 상태인 것 같았다.
누구일까?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나쁜 사람일까? 나는 도망쳐야 할까? 경찰에 신고해야 할까?
머릿속은 복잡했고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그 남자는 또 한 번 신음하며 고개를 들었고 뒤통수를 벽에 바짝 기댔다. 그 바람에 슬은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리곤,
“헙…….”
멍해졌다.
믿을 수가 없어서.
“왜… 당신이…….”
그가 어떠한 연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를 알아본 순간, 슬은 단 하나의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를 살려야 한다. 무조건 살려야 한다!
슬은 얼마나 급했는지 우산도 쓰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 얇은 이불을 들고 다시 내려왔다.
밥을 다 먹고 저들끼리 놀고 있던 고양이들은 다시 나타난 그녀에게 호기롭게 이마를 비벼 댔지만, 고양이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침착하게 남자의 옆에 이불을 펼쳤다.
벽에 기댄 앉아있는 남자가 바닥에 누울 수 있도록 다리를 끌어당긴 후, 한 바퀴, 다시 한 바퀴를 더 돌려 이불 위에 올라가게 했다. 이불의 끝과 끝을 묶어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불은 나무 사이에 걸린 해먹처럼 남자를 감쌌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 이불을 끌었다.
“읏-!”
세차게 몰아치는 빗물에 땅도 흠뻑 젖어있는 터라 힘도 두 배로 들 텐데, 태풍이라도 오면 날아갈 것만 같던 야리야리한 몸으로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왔는지 그녀의 몸짓엔 머뭇거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