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4권
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4권
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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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
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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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4권
16장
칼리우스 공작이 떠난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가을의 서늘한 기운은 한걸음 물러나고, 지금은 차가운 겨울이 성큼 다가온 계절이었다.
이제 머지않아 눈이 내리겠구나, 싶었다. 눈이 내리는 날은 칼리우스 공작이 돌아오기로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나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앙상한 가지가 찬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칼리우스 공작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비밀리에 간 것이었으니 어디서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칼리우스 공작은 무사하겠지. 그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담요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그가 오면 이보다 날이 더 추워져 있겠지.
눈이 왔으니 그는 이곳에 오자마자 또 영지의 불편을 해결해 주기 위해 떠날 터였다. 그러니 그가 돌아와도 그를 볼 시간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늘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는 스스로를 괴물이라 칭하지만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그의 모습은 결코 괴물이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연약한 것들을 돌봐 주는 따뜻한 신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에 잠긴 나는 보드라운 담요를 손안에서 만지작거렸다.
차가웠던 겨울을 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그와 함께 다시 한번 하딘에 가야지. 화사한 꽃이 만발한 하딘의 풍경 속에서 그와 함께 거니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루빨리 그날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천천히 흘러내려 갔다. 눈이 내리려면 아직은 몇 밤이 가득 지나야 했다.
한편 칼리우스 가의 원로들이 모인 회의실 안. 황궁에서 근무하는 데카르트의 말에 보드리 자작이 가장 먼저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데카르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똑똑히 들었습니다. 칼리우스 공작님이 침식의 땅으로 향했으나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셨다고…….”
데카르트의 말을 듣던 원로 한 명이 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칼리우스 공작님이 자리를 비우신 지 이제 한 달입니다. 그동안 전장에서 몇 년씩 고생하실 때도 늘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시곤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섣불리 공작님께서 돌아오시지 않는다고 판단합니까?”
“하지만 저는 들은 말을 그대로…….”
데카르트가 말을 흐리며 진땀을 뺐다.
그러자 데카르트가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세르비우 후작이 그의 편이 되어 말을 거들어 주었다.
“맞습니다. 데카르트 경이 어째서 헛된 말을 하겠습니까. 그것도 공작님에 관한 것을.”
“그건 그렇지만…….”
원로들의 얼굴이 어색하게 변했다. 뭐라 섣불리 말할 수가 없어서 낯선 침묵이 감돌았다.
생각에 잠겼던 보드리 자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마법사들 사이에서 크게 술렁인 일이 있었죠. 오래전 봉인되었던 고대 마물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건 헛소문에 지나지 않았습니까.”
원로들이 쉬쉬하며 보드리 자작의 말을 넘겼다. 하지만 보드리 자작은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얼마 전 테리온 공작님과 그레이스 공작님이 동시에 황궁으로 돌아오기도 했지요. 기사들의 말을 들어 보니 그 두 사람에게서 마물의 냄새가 독하게 배어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보드리 자작?”
“세 공작이 함께 침식의 땅에 간 것이라면, 바로 고대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 간 것 아니겠습니까?”
칼리우스 공작이 당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상대가 고대 마물이라면 달랐다.
고대 마물이라면 마지막 여신의 피를 이었다는 대마법사만이 상대할 수 있었다고 전해졌으니까. 아무리 칼리우스 공작이라 할지라도 상대하기 버거울 터였다.
“하지만…….”
원로들이 말을 주저했다. 보드리 자작의 말이 정황상 맞아떨어졌으나 그의 말을 인정하면 가주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소리가 되었다.
조심스러운 분위기 속 보드리 자작이 말을 이었다.
“저 역시 공작님께서 변을 당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라는 것도 있으니.”
가주의 자리가 위태롭다면 이는 가문이 흔들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므로, 이렇게 두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문의 원로들이 왜 있겠는가. 이럴 때 마땅한 수를 찾아야 했다.
“저희도 다른 방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제대로 된 후계 준비를 하는 것은 어떨지요.”
“후계라…… 칼리우스 공작님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래도 루카스 경이 적임이지요.”
원로들의 입에서 루카스의 이름이 언급되자 세르비우 후작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루카스는 일전에 한번 후계 자리를 논하다 크게 다친 적이 있었기에 그의 아버지인 세르비우 후작도 마냥 달갑게 느껴지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보드리 자작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루카스 경이 아무리 실력 좋은 마검사라고는 하나, 그의 눈에 차지는 않았다. 마력 증폭제를 먹고도 칼리우스 공작을 이기지 못한 데다가 그런 선택을 할 정도로 아둔하지 않은가.
하지만 루카스 경을 제외하자니 다른 마땅한 후계 후보자가 없었다. 지금껏 공작 자리는 늘 블랜디드의 피를 머금은 칼리우스에게서 나왔으니.
힘으로 보면 단연하건대 지금의 칼리우스 공작을 뛰어넘을 이는 없었다. 생각에 잠기던 보드리 자작이 문득 깨달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면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원로들이 모두 보드리 자작 쪽을 바라보았다.
“후계는 차후 문제이지요. 만일 칼리우스 공작님이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안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원로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보드리 자작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때 데카르트가 조심스럽게 다른 의견을 냈다.
“하지만 폐하께서 지원을 해 주실지…… 제왕의 진이 깨진 지금 마법사들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보드리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황제가 이 일에 두 팔 걷고 도와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고대 마물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으니까. 테리온 공작과 그레이스 공작이 황궁으로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걸 보면 황제는 이 일을 그저 묻어 두려는 모양이었다.
“폐하의 손을 빌릴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에게 블랜디드의 피가 있지 않습니까.”
치유와 강화의 힘이 담긴 블랜디드의 피.
칼리우스 공작은 아직 이 블랜디드의 피를 모두 흡수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에게 블랜디드의 피를 바친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을 갖게 될 터였다.
“가문의 모든 마법사를 부르지요. 마법사들과 함께 그녀를 데리고 침식의 땅으로 향합시다.”
보드리 자작의 말에 원로들이 염려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아직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지 타성에 젖은 얼굴들이었다.
원로 한 명이 자신 없는 투의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저희끼리 결정해도 되는 문제인지요. 아직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는데…….”
보드리 자작의 미간이 좁아졌다. 고민만 하고 있다가는 어쩌면 칼리우스 공작을 구할 때를 놓쳐 버릴 수 있기에.
“원로회가 왜 있겠습니까. 위급한 상황이니 저희가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
“어쩌겠습니까. 이대로 공작님이 오기만을 손 놓고 기다리실 겁니까?”
그때 침묵을 지키던 세르비우 후작이 입을 열었다.
“나는 찬성하지.”
원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세르비우 후작의 말에 다른 원로들도 눈치를 보며 차차 동의했다.
“……그러도록 합시다.”
원로들의 동의를 받은 보드리 자작이 제법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그럼 마법사가 모이는 대로 칼리우스 공작가로 향하도록 하죠.”
* * *
“아버지……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흘 후, 세르비우 후작가.
세르비우 후작은 담담히 갑옷을 입으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 루카스는 방금 아버지가 한 말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칼리우스 공작님이 돌아오지 못하셨다니요?”
기다란 망토를 묶던 세르비우 후작은 변함없이 차분한 어조로 루카스에게 대답했다.
“침식의 땅에 갔던 칼리우스 공작님이 아직 돌아오지 못하셨다는구나. 회의를 통해 칼리우스 공작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럼 아버지도 침식의 땅에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루카스의 물음에 세르비우 후작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자 루카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버지가 가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입니다!”
“우리가 칼리우스 공작을 직접 구하러 가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라. 블랜디드의 피를 전해 주러 갈 뿐이야.”
“블랜디드의 피라면…… 칼리우스 공작 부인 말입니까?”
“그래. 혈맹대로 그녀의 피를 마시면 공작님께서 더 큰 힘을 갖게 될 테니.”
모든 준비를 마친 세르비우 후작이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너도 갈 것이냐?”
세르비우 후작의 말에 루카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버지가 먼저 자신에게 제안할 줄 몰랐기에.
세르비우 후작은 루카스가 올가을에 아카데미를 졸업했음에도 그에게 후작위를 물려주지 않았다. 자잘한 영지 업무 따위를 넘겨줄 뿐, 중요한 결정권 같은 건 한 번도 루카스에게 주지 않았다. 세르비우 후작이 루카스를 온전히 믿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줄곧 루카스를 후계자로 점찍어 두던 세르비우 후작이 이렇게 변한 건 레이티나와 있었던 일 이후부터였다.
루카스가 칼리우스 공작과 대련할 적 레이티나에게 마력 증폭제를 받아 마셨으니까. 아버지 앞에서 제힘으로 기회를 붙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줬을뿐더러 마력 증폭제의 부작용으로 전처럼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었으니 제국에서 희귀한 마검사의 호칭도 불안정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완전히 사라졌던 마력이 일부분 돌아오기는 했으나 반쪽짜리 마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왜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지. 아버지가 자신을 다시 신뢰하는 건가, 싶었으나 그건 아니었다. 그의 눈빛에서는 신뢰와 애정이 아닌 쌀쌀한 찬기가 돌았다. 올 테면 와 보라는, 저를 깔보는 눈빛이었다.
“…….”
루카스는 굴욕감을 느끼며 눈을 아래로 깔았다. 원래도 자신감에 찬 성격은 아니었지만 마력이 반으로 줄어든 이후 그는 더욱 쉽게 주눅이 들고는 했다. 이럴 때 레이티나가 있어 주었더라면…….
마력 증폭제를 건넨 건 레이티나였으나 루카스는 그녀에게 배신감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더욱 들었다. 자신이 이기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마력 증폭제를 주었을 테니까.
자신의 폭주는 사고였다. 그러니 그녀를 원망하거나 그녀가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누님은 이제 내 곁에 있을 수 없겠지.’
레이티나는 더 이상 제국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블랜디드의 피를 탐내는 무참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으니까.
그녀의 욕심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레이티나는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갖고자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욕심까지 부릴 줄이야.
안타까우면서도 슬펐다. 만일 그녀가 옆에 있었더라면 내게 어떠한 말이라도 해 주었을 텐데.
이 상황에 그녀가 있었더라면, 그녀는 아마 자신의 등을 떠밀어서라도 아버지를 따라가라고 했겠지. 늘 숨어 버리는 자신과 달리 레이티나는 어떻게든 권력과 힘을 스스로 쟁취하려 했으니까. 후계의 자리에서 밀려나지 말라며 제게 용기와 힘을 주었을 거였다.
문득 주먹을 꽉 쥔 루카스가 세르비우 후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겠습니다.”
루카스의 대답에 세르비우 후작은 놀란 기색을 띠었다. 아버지의 얼굴에 예기치 못한 당황이 서리자 루카스의 마음속에 기묘한 쾌감이 일었다.
“정말이냐……?”
세르비우 후작이 재차 묻자 이번에도 루카스의 대답에는 변함이 없었다.
“네, 저도 아버지와 함께 가겠습니다.”
비록 누님이 곁에 없지만 그녀라면 분명 이렇게 하라 말해 주었을 테니까.
칼리우스 공작저.
예년보다 이른 추위가 찾아왔다. 코끝을 발갛게 만들 정도로 시린 바람에 로그나츠가 두툼한 양털로 된 망토를 단단히 잠그며 성벽 주변을 순찰했다.
공작님이 떠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행하는 일과 중 하나였다. 과거 레이티나가 보내온 독거미처럼 마님을 노리는 것이 있을 수 있으니. 행여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위험이 있기라도 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성 곳곳을 확인했다.
흰 입김을 내뿜으며 로그나츠가 성벽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돌연 바깥에서 무리 지어 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둔탁한 소리가 한두 사람이 아닌 듯했다. 이상함을 느낀 로그나츠가 성문 입구로 다가가자 먼발치에서 말을 탄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그들이 단단히 채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꺼운 갑옷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로그나츠는 곧바로 문지기에게 명령했다.
“성문 경비를 더욱 단단히 하도록 하거라.”
“네, 로그나츠 님.”
로그나츠가 마력을 끌어내 성문 주변을 실드로 휘감았다. 그리고 언제든 마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몸을 긴장한 채 성문 앞에 자리를 지켰다.
곧이어 소란스러운 모래바람을 휘날리며 말을 탄 이들이 성문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까만 갑옷을 입고 있는 이들은 모두 칼리우스 공작가의 원로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로그나츠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어째서 이 시간에 이런 차림으로 원로들이 공작저를 찾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로그나츠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리 중 가장 앞에 있던 보드리 자작이 천천히 말을 몰아 로그나츠의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