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3권
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3권
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 3 ·
© 블라
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3권
· 차례 ·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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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3권
11장
수도 근처의 마력 연구소.
매일 이른 시간부터 이곳을 드나들던 아드리안은 평소와 달리 꽤 늦은 시각 마력 연구소를 찾았다.
아드리안이 지하에 있는 그의 연구실로 들어가려 하자 복도에서 그를 기다리던 연구원 세나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웬일로 이렇게 늦게 와?”
“……볼일이 있었어.”
“동생이랑 관련된 일이라도 되나 보지?”
마력 연구소에서 그와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세나는 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피곤한 듯 머리를 넘기며 짧게 대답했다.
“신경 쓸 것 없어.”
그리고 지하에 있는 그의 연구실로 향했다.
지하에는 마력이 외부로 분출되지 않도록 강한 제어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니 지하의 공간에서는 주로 거대한 마력장을 운용하거나 위험한 실험들이 진행되고는 했다.
끼이익. 문을 열고 연구실로 들어가면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있었다.
십 년 전부터 그가 만들어 온 엄청난 마력의 마법진이었다. 아드리안이 진지한 눈빛으로 마법진에 손을 뻗자 아직 불안정한 마법진이 지직거리며 검은 불꽃을 내뿜었다.
미완성이었지만 십 년 전과 비한다면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실리아를 지키려면 네가 어서 완성되어야겠구나.”
언젠가 실리아를 데려와야겠다 생각하며 만든 마법진이었다. 그림자를 불러들이는 이 흑마법은 위험한 존재로부터 그녀를 지킬 강하고 단단한 보호막이 될 테니.
칼리우스 가와의 혈맹이 깨지면 지금까지는 숨어 있던 위협들이 실리아를 향해 달려들 것이었다. 칼리우스 공작이 블랜디드 가에 대한 보호는 유지할 것이라 했으나 이처럼 좋은 기회를 하이에나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비록 지금은 금기시된 마법이지만 이건 아드리안이 실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해 둔 계획이었다.
깊은 잠이 들어 있던 그녀를 깨운 건 이만한 각오 없이 행한 것이 아니니까.
아드리안이 마법진 앞에서 눈을 감고 집중했다.
금빛의 따스한 그의 마력은 마법진을 만드는 데 집중할수록 탁하게 빛이 바래 갔다. 이제 완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한편 황궁의 동궁. 에리엘은 여전히 그녀의 거처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리카엘이 아닌 제국의 기사가 있었다. 그녀의 방 앞에는 늘 호위가 지키고 있었고 그녀가 잠시 정원을 산책할 때도 호위가 붙어 있었다.
시간은 느리게만 흘렀다. 리카엘이 사라진 지금 에리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른한 여름의 바람이 동궁의 정원에 불어왔다. 에리엘은 제국 기사들을 등지고 가만히 정원을 거닐었다. 싱그러운 초록 잔디를 거닐고 짙게 물든 녹음을 바라보아도 그녀의 마음은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리카엘에게는 함께 에덴의 뜻을 되살리겠다 말했지만, 지금 혼자 남은 그녀에게는 에덴의 뜻을 살릴 힘이 없었다. 이전처럼 조용하고 연약한 볼모 공주의 모습이었다.
무기력한 에리엘이 연못 근처의 바위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투명한 물 위로 제국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이 일렁일 때였다.
“에리엘 공주님.”
돌연 에리엘의 귓가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에리엘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는 그녀를 호위하는 제국 기사만 있을 뿐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형체에 겁이 난 에리엘이 몸을 움츠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또 한 번 낯선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에덴의 사자입니다. 잠시 말을 전하고자 하니 고개를 끄덕여 주시기를.”
에덴의 사자……?
에리엘이 멈칫했다.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의 주인은 형체가 없었다.
형체가 없는 그가 이상하기는 했으나 이자가 진짜 에덴의 사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에리엘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리카엘의 일은 몹시 유감스럽습니다. 하지만 리카엘과 함께한 공주님의 강인한 의지는 저도 잘 보았습니다.”
남자가 리카엘과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한 번도 에덴에 있는 자들과 연락한 적 없었고, 리카엘이 아닌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는데.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너는 누구지?”
경계심 이 가득한 에리엘의 말에 남자가 웃음기 어린 대답을 했다.
“오늘 밤, 공주님의 처소로 향하겠습니다. 그때 제 정체를 알려 드리지요.”
“……지금 밝히거라.”
정체를 밝히지 않는 그가 수상할뿐더러 그녀의 처소는 낯선 자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남자를 수상히 여긴 에리엘이 목소리에 힘을 주자 먼발치에 물러나 있던 제국의 기사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공주님?”
에리엘이 말없이 연못 옆의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매앰, 여름을 알리는 풀벌레 소리만 들릴 뿐 남자의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아니. 아무 일도.”
그리고 앉아 있던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만일 그자가 말을 지킬 수 있다면 오늘 밤 모습을 드러내겠지.
에리엘이 제국의 기사와 함께 천천히 동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이었다. 에리엘은 등불을 켜 놓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문 밖에는 그녀를 호위하는 제국의 기사가 있었고 복도와 정원에도 황궁을 지키는 제국의 기사들이 즐비해 있었다.
에리엘은 낮에 들었던 음성의 주인공이 이 기사들의 눈을 피해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냥 잠이 들기에는 영 찝찝한 경험이었다.
그는 리카엘과 그녀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에덴의 사자라 칭했으니까.
‘…….’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방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면 바깥의 기사가 의아하게 여길 것이기에 에리엘은 탁자 위에 있는 초를 후, 불어 꺼트렸다.
방 안에 은은한 어둠이 감돌았다. 그녀가 침대로 향하려는데, 순간 닫혀 있던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에리엘의 기다란 머리칼이 흩날리며 꺼진 양촛대 옆으로 푸르른 잎사귀가 한 잎 툭 떨어졌다.
“너는…….”
“쉿.”
창문을 넘어온 낯선 남자가 검지를 그의 입가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불 꺼진 방 안이 소란스럽다면 바깥의 기사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수 있었기에.
‘공주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그가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에리엘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리엘이 놀란 눈을 커다랗게 뜨자 남자는 길게 눈을 휘어 보일 뿐이었다.
‘로드 드래곤의 수장인 라스칼이라고 합니다.’
그가 여전히 에리엘의 머릿속으로 말을 전했다.
로드 드래곤. 에덴의 비밀 결사대의 이름이었다.
비밀 결사대에 대한 정보는 왕실 내에서도 극히 한정된 자에게만 알려져 있었으며 그 수장에 관해서는 연금술사일 것이라는 말만 돌 뿐, 정확한 정보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라스칼이 놀란 에리엘을 다독이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놀라셨겠지요. 하지만 목소리를 내면 바깥의 기사들이 들을 수 있으니 지금은 제 말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남자의 말을 듣는 에리엘의 눈동자가 점차 차분해져 갔다.
그가 정말 로드 드래곤의 수장이 맞는지. 맞다면 어떤 이유로 자신을 찾아온 건지 들어야 했다.
에리엘이 경계 어린 태도를 유지하자 라스칼이 말을 이었다.
“그동안 공주님의 의지는 잘 보았습니다. 리카엘도 공주님을 많이 의지했지요.”
그의 입에서 또다시 리카엘의 이름이 나왔다. 그는 리카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리카엘도 로드 드래곤 소속이었던 건가?
그런 에리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라스칼이 말을 이었다.
“리카엘도 로드 드래곤의 일원이었습니다. 공주님께서 리카엘과 함께하셨던 것처럼 지금부터는 로드 드래곤과 함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오로지 에덴만을 위해 움직이고 또 움직일 겁니다. 제국의 그림자를 쓴 에덴이 아닌 찬란한 빛의 에덴을 위해서 말입니다.”
라스칼의 말에 에리엘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리카엘이 죽은 이후 그녀의 삶에는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로드 드래곤과 함께한다면 리카엘과 못 이룬 그 야망을 실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전히 이자의 정체는 확실치 않았다. 자신과 리카엘 사이의 일을 알고 있다지만, 이자가 정말 로드 드래곤의 수장이 맞는 것인지.
에리엘이 탁자 위에 있던 만년필을 들어 종이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아리스께 받은 증표를 보이거라.]
그가 만일 에덴의 비밀 결사대인 로드 드래곤의 수장이 맞다면, 에덴의 아리스에게 목숨을 바치는 맹약을 한 후 받은 증표가 있을 터였다.
그러자 라스칼이 그의 품 안에서 빛나는 푸른 원석을 꺼내 보였다. 에덴의 대연금술사만이 가지고 있다는 연금술사의 돌. 그 위에는 아리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제 목숨은 이미 아리스께 맹세한 것. 의심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으로 그의 신분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에리엘은 조심스럽게 종이에 글씨를 이어 써 내려갔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그러자 라스칼이 천천히 그녀의 옆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바로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저희와 함께한다는 약속의 표시로 문양을 새기겠습니다. 아프지 않으니 겁먹지 마세요.’
라스칼이 그녀의 목덜미 위로 손을 뻗었다. 길게 내려온 머리칼을 들춰내고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목 옆에 지그시 손을 내렸다.
그러자 희기만 했던 그녀의 목덜미에 강인한 푸른 용의 문양이 점점 새겨져 내려갔다.
따끔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질감은 곧 사그라졌다.
에리엘이 천천히 손을 들어 문양이 새겨진 목덜미를 만져 보았다. 그러자 라스칼이 또 한 번 그녀의 머릿속에 말을 전했다.
‘이제 되었습니다. 이 문양을 통해서 제 힘을 조금 전해 드릴 수 있으니 머릿속으로 제게 말을 전하실 수 있을 거예요.’
손가락으로 문양의 모양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 부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새로운 의식을 받아들이듯 맞닿은 피부 사이로 맥박이 쿵쿵 요동쳤다.
‘……그래.’
정말로 내가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에 내 말이 울렸다.
‘잘하시네요.’
라스칼이 입꼬리를 기다랗게 올렸다. 이후 에리엘이 그에게 물었다.
‘다시 칼리우스 공작 부인을 노릴 건가?’
칼리우스 공작이 스스로 혈맹을 깨겠다 선포했으나 이후에도 블랜디드의 피에 대한 결정권은 오로지 칼리우스 공작만이 쥐고 있었다. 그가 언제든 마음을 바꾸어 그녀에게 손을 뻗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전에 칼리우스 공작 부인을 노리려던 일들이 모두 그에게 가로막혀 실패했기에 에리엘의 얼굴에는 근심이 깃들었다.
그녀의 근심 어린 물음에 라스칼이 덤덤히 대답했다.
‘여전히 칼리우스 공작은 저희의 가장 큰 대적입니다. 그의 힘을 약화시켜야 하는 건 변함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건대 칼리우스 공작이 꽤나 그 피를 지키려 하더군요. 쉽게 블랜디드에게 다가갈 수 없겠습니다.’
에리엘이 가는 눈을 하고 라스칼을 바라보았다. 잿빛 로브를 쓰고 있는 라스칼의 눈매는 살짝 올라가 있었으며 총명한 벽안을 하고 있었다. 뒤집어쓴 후드 너머로 그의 푸른 머리가 언뜻 보였다.
‘하여 다른 수를 써 보고자 합니다.’
‘다른 수……?’
‘제국의 황궁 안에는 제왕의 진이 잠들어 있습니다. 알고 계시나요?’
제왕의 진. 제왕의 마법진이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오래전 마물과 인간이 사투를 벌이던 때, 제국의 마법사들이 마물을 잠재우기 위해 만든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마법진은 제국과 주변 나라들의 마물을 제어하고 있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제국에서 마물로 인한 피해가 적은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에리엘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어째서 제왕의 진을 말하는지.
‘칼리우스 공작이 마물의 아티팩트를 삼켰다고 했죠. 인간의 힘을 뛰어넘은 마물의 힘 말입니다. 그것을 역으로 이용할까 합니다.’
라스칼의 말에 에리엘이 더욱 고개를 가로 기울였다. 라스칼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
‘제왕의 진을 파괴하여 칼리우스 공작 안에 있는 마수를 깨우는 겁니다.’
‘뭐……?’
‘지금까지는 제왕의 진 덕분에 그가 과분한 마물의 힘을 다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제왕의 진이 깨진다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그가 날뛰는 마물의 힘까지 다룰 수는 없을 겁니다. 스스로 파멸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제왕의 진을 파괴하면 에덴에서도 마물이 날뛰지 않겠느냐.’
제왕의 마법진은 제국뿐만 아니라 제국과 인접한 에덴을 수호하고 있기도 했으니까.
라스칼은 그런 것쯤은 문제 되지 않는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최상급 마물들은 제왕의 진이 없다 하더라도 인간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건 중상급 마물 정도인데, 이는 에덴의 힘으로도 제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