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1권
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1권
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 1 ·
© 블라
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1권
· 차례 ·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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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가짜가 되어드릴게요 1권
1장
침대맡에 앉은 그녀는 꼭 날개를 잃은 작은 금조 같았다.
새장을 열어도 도망갈 능력이 없는 연약한 존재.
얇은 목은 한 손에 쥐면 부러질 것 같았고, 희롱하면 커다란 두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진득한 침을 삼키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는 놓아주어야지. 이제껏 그녀를 가두었던 목줄을 풀어 주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설핏 이유 모를 분노가 차올랐다.
그래. 이 분노의 이유는 가만히 있는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는 반항하지 않으니까.
오랜 시간 성을 비운 그에게 원망의 말도, 투정의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걸 체념한 채였다.
처음부터 그랬다. 잘 훈련된 애완견처럼 주인의 말에 따르는. 언제든 그가 그녀의 목을 비틀어도 그저 순응하겠다는 거였다.
피가 끓는 기분에 목덜미의 핏줄이 꿈틀거렸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여자였다.
“……이혼하지.”
그 말에 순수한 눈이 멍하게 깜빡였다. 그 눈에는 무슨 말이냐는 듯한 물음과 당황이 섞여 있는 듯했다.
“네?”
“……이혼하자고.”
그가 다시 한번 말하자 실리아의 눈이 점차 커다래졌다. 그제야 그의 말이 진심이었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시선 둘 곳을 모르는 그녀의 눈이 여기저기를 방황했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밑 입술을 깨물며 오른쪽 소매 끝을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본 칼리우스 공작의 눈매가 점점 더 가느다래졌다.
그녀는 기쁘다고 생각할까?
티를 내지는 않지만 분명 그러하겠지.
이제 그녀를 좀먹던 괴물의 성에서 탈출할 수 있으니까. 그녀에게는 저를 향한 어떠한 감정도 없었으니까.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괘씸함에 분노가 치솟았다. 칼리우스 공작이 두 주먹을 꽉 쥐는데, 그녀의 턱이 작게 움직였다.
“어째서요……?”
그녀가 물었다. 형편없는 물음이었다.
이 결혼의 이유는 단지 혈맹을 위해서였다. 혈맹이 깨진다면 결혼을 유지할 이유가 사라지니.
당신과 내가 함께할 이유는 이제 없으니까.
“혈맹을 깰 거야. 당신과 내가 함께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
“그럼 제가 가짜라는 사실은…….”
“아니, 당신은 그대로 있으면 돼.”
가느다란 그녀의 말을 막아 버렸다.
그녀가 가짜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게 되지 못할 터였다. 그녀는 여전히 실리아 블랜디드였고, 이혼한 후에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그것이 그가 그녀를 놓아주는 유일한 이유이니까.
“내일 위원회에 통지하지. 당신이 실리아 블랜디드인 건 변함없어.”
“…….”
실리아의 입술이 작게 열렸다.
멍하게 열린 입술이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오늘은 내가 다른 방에서 잘 테니 당신은 내일 방을 옮기도록 해.”
칼리우스 공작이 말을 마치고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작은 손이 그의 팔목을 붙들었다.
“제가…… 나갈게요. 공작님은 이곳에 계세요.”
그녀의 태도가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얇은 천 사이로 느껴지는 작은 손의 감촉이, 그녀의 향과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당신은 아무렇지 않겠지.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만지는 것일 테지만 칼리우스 공작에게는 작은 움직임조차도 몹시 큰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작은 움직임에 마음이 동했다.
“……당신은 쉬워서 좋겠네.”
불공평하다는 것쯤은 몇 번이고 되뇌고 있었지만, 당장 요동치는 심장을 잠재울 수 없었다.
칼리우스 공작이 손을 들어 그를 붙든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이 족쇄가 없었다면 당신은 나를 원했으려나?”
내가 당신을 먹고, 당신이 내게 먹히는 혈맹이 없었더라면. 그때는 당신이 나를 똑바로 봐 줄 수 있었을지.
아니. 그랬더라면 그녀와 자신이 만나는 일 따위는 없을 터였다.
그녀와 자신을 묶어 준 건 오로지 혈맹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우리는 운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리아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져 갔다. 말문을 잃은 그녀가 또다시 스스로 입술을 깨물으려 했다.
연분홍의 입술이 선홍빛으로 변해 가는 동안 그는 참을 수 없는 갈증을 삼켜 내야 했다.
그녀를 생각하고, 또 마주할 때면 아주 깊은 갈증이 찾아왔다.
블랜디드의 피. 그녀가 진짜 블랜디드를 닮은 단 피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헛헛한 갈증의 원인이었다.
그때 세게 깨문 그녀의 밑 입술 사이로 새빨간 피가 한 방울 맺혔다. 아주 작은 액체였으나 그녀의 피 냄새는 그를 홀리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가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피가, 입술이 미치도록 단맛이었다.
어떻게 잊겠어.
조금도 놓칠 수가 없어서 갈급하게 그녀를 머금었다.
“으웁…….”
실리아가 벅찬 숨소리를 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침대 위로 그녀를 눕히고 더더욱 탐욕을 드러냈다.
그녀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일렁일수록 끈질기게 그녀를 붙들었다.
손안에 그녀를 쥐었지만 더없이 허탈한 기분이었다. 그의 갈증은 밑 빠진 독처럼 완전히 채워질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아. 여전히 실리아 블랜디드로서의 삶을.
* * *
“오늘은 날이 좋구나.”
산들바람이 불었다.
눈부신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뜨고 위를 올려다보면, 햇살을 닮은 한 남자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볕을 녹여 만든 것만 같은 금발에 눈동자도 호박꽃처럼 어여쁜 금색이었다.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남자에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맑았던 남자의 눈망울이 탁하게 기울어졌다.
그가 한 손을 들었다. 내 위로 떨어질 것만 같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통이 찾아올 거야.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그의 손은 톡, 가볍게 내 머리에 안착했다. 고통은 없고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머지않아 네 몸도 나을 수 있을 거야.”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남자는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꼭 그럴 거야, 실리아.”
남자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실리아.
그때 바람이 불어 내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다. 흩날리는 머리칼이 남자를 닮은 금색이었다.
나는 시선을 내려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생전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공주님 드레스를 입은 채였고, 내 손과 발은 이전과는 달리 자그마했다.
‘……실리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 생의 나는 이제 없다는 것을.
바람이 좋고, 볕이 좋은 날.
이번 생의 나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기억을 돌이켜 보자면 지난 생의 기억은 끔찍했다.
열여덟이 되기까지 나는 줄곧 가족의 일원이 아닌 구박데기로 살아야 했으니까.
믿기지 않게도 처음부터 그랬다.
같은 핏줄인 오빠는 완벽한 부모님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늘 비범했고, 나는 뒤떨어졌기에.
같은 것을 배워도 오빠는 저만치 앞서가는 한편 나는 늘 남들보다 늦게 이해하고는 했다.
외형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는 꼭 빚어 놓은 것처럼 눈코입이 완벽히 자리해 있었다. 엄마의 쌍꺼풀 진 눈과 아빠의 오뚝한 코를 닮아 연예인 못지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조금 작았던 키는 중학교 시절을 거치자 훌쩍 커서 부족함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반면 나는 콤플렉스덩어리였다. 엄마 아빠의 콤플렉스를 모아 놓은 최악의 집합체.
점점 완벽해지는 오빠와 다르게, 나는 되레 살이 붙고 못나지기만 했으니까.
인생은 불공평했다.
같은 핏줄임에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야, 돼지. 너 그 꼴로 내 친구들 앞에 나오기만 해. 확 죽여 버린다.」
외근이 잦았던 부모님 덕택에 우리 집은 곧잘 오빠의 파티장이 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방에 콕 틀어박혀 절대 나오지 말라는 명을 받들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벌을 받게 되니까.
「돼지, 너 미쳤어? 나오기는 왜 나와! 아, 진짜. 쪽팔리게.」
그날은 열이 나는 것 같아서, 약을 가지러 부엌에 갔던 참이었다.
그래서 오빠의 명을 깰 수밖에 없는 거였는데. 오빠는 바깥으로 나온 나를 보더니 불같이 화를 내기만 했다.
달칵. 문이 잠겼다.
멀어지는 오빠의 발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마 오빠는 한참이 흐른 후에야 이 문을 열어 줄 터였다. 그게 내게 내려진 벌이었다.
‘열이 나는 것 같은데…….’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나는 열로 인해 벌게진 얼굴이었다. 숨은 색색거리고 눈가가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방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무래도 상태가 좋지 못했다.
정말 좋지 못했다.
「오빠…….」
힘을 주어 오빠를 불러 보았다. 하지만 대답이 올 리 없었다.
이곳에는 물도 약도 없었으니 밖에 나가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돼지 새끼, 죽여 버린다.」
환청처럼 들리는 오빠의 목소리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지난 생의 마지막 기억이기도 했다.
새삼 떠오른 악몽 같은 기억에 어깨를 떨었다.
그러자 내 찻잔에 차를 따라 주던 첫째 오빠, 아드리안이 동작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해 보였다.
“왜 그래, 실리아. 몸이 좋지 않아?”
다정한 물음이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아드리안이 미소를 머금고는 내 찻잔에 차를 마저 따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