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부인들 4권
공작부인들 4권
공작부인들
공녀와 하녀의 이야기
4권
공작부인들 4권
차 례
1. 결혼식
2. 내 것과 아닌 것
3. 저주
공작부인들 4권
1. 결혼식
“샤샤, 이리 와. 간식 먹자.”
긴 은발을 높게 틀어 묶은 카리나가 자신의 처소 바닥에 쪼그려 앉아 고양이를 불렀다. 창가에서 노곤하게 졸고 있던 고양이가 노란 눈을 빛내며 사뿐사뿐 카리나에게 다가갔다.
“벌써 보름이야. 갇혀 지내는 것도 넌덜머리나게 지겹군.”
카리나가 창밖을 보며 고양이의 몸을 쓰다듬었다. 하얀 네글리제 위로 검은 털이 날려 앉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카리나는 어지간한 독약에는 내성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저런 약초를 직접 맛보고 차를 달여 마신 탓이었다. 덕분에 이번 독을 마시고도 오래지 않아 일어날 수 있었다.
그때, 처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카리나가 샤샤를 던지듯 내려놓고는 재빨리 침대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점점 가까워지던 발걸음 소리는 침대 발치에서 멈추었다. 카리나는 숨소리를 죽인 채 깊이 잠든 척했다.
“일어나. 등에 욕창 나겠어.”
익숙한 목소리에 카리나가 금빛 눈을 번쩍 떴다. 에보니 블라딘이 팔짱을 낀 채 귀신처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계속 일어나 있어도 돼. 이슈텔 리젠트라가 조건을 다 수용하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이제 나도 백작님 아니고 공작님.”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그럼 이제 헬리온 대공도 안 오는 거지?”
“헬리온? 갑자기 웬 헬리온?”
“그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내 방에 불쑥불쑥 나타났단 말이야!”
카리나가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 내며 소리쳤다.
“와서 하녀들에게 내가 깨어난 적 없냐고 묻고, 손으로 얼굴을 쿡쿡 찌르고 침대를 흔들고! 잠든 척하고 있느라 고역이었다고!”
“이야, 스릴 넘치고 재밌었겠다. 나라면 웃음을 못 참아서 딱 걸렸을 텐데, 잘했어.”
에보니가 샤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킬킬거렸다.
“그럼 자기도 나도 서로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오늘을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이별을 고할까?”
“아름다운 이별?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나는 공작이 됐고 자기는 공작 부인이 됐잖아. 이 정도면 피차 할 수 있는 최대의 결과치를 낸 거라고 보는데?”
에보니의 말에 카리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크게 비웃음 소리를 냈다.
“당신이나 꿈을 이룬 거겠지, 아직 난 아니라고. 나 혼자만 이런 지옥 불 앞에 밀어 넣고선 네 목적 달성했다고 손을 떼?”
“음, 자기 쪽에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줄은 몰랐네. 그래, 어디 들어나 보자. 내가 뭘 더 해주길 바라는데?”
“내가 살아남으려면 황후가 되어야지. 그것밖에 더 있겠어?”
카리나의 말에 옷에 묻은 고양이 털을 떼던 에보니가 돌연 몸짓을 멈추었다.
“전에 말할 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학을 떼더니, 그새 마음이 바뀐 거야?”
“그래. 어차피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나면 날 도와줄 사람은 하나도 없어. 어디 지방으로 내려 간다하더라도 리젠트라 공작 부부가 죽어라 보복하겠지. 그러니 황후가 되어 내 살길을 찾아야지, 안 그래?”
“뭐, 자기 입장에선 그게 제일 나은 방법이긴 하지. 이슈텔 리젠트라한테 용서받지 않는 이상.”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네. 그 사람이 퍽이나 우리를 용서하겠어.”
에보니의 말에 카리나가 어이없단 듯 조소했다. 실란다 백작이야 엄연한 가해자였다 해도, 이번 리젠트라 공작 부부 사건은 달랐다. 무고한 가족을 건드렸으니 용서는커녕 살려두는 것조차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튼 에보니 당신도 내가 황후가 되는 게 여러모로 낫지 않겠어? 적어도 리젠트라보다야 내가 블라딘 가문에 우호적일 테니까.”
“글쎄. 내가 가문 일에는 관심이 없어서. 난 내 손으로 블라딘을 공작으로 되돌려놓은 거면 만족해. 그 다음엔 누가 이 집안을 망치든 상관이 없거든. 내 이름만 실추시키지 않으면.”
에보니가 손수건을 꺼내 코를 휑 하고 풀었다. 몇 년간 잠잠했던 고양이 알러지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에 코가 간질거렸다.
“근데 폐하께서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던데. 이번 건만 봐도 그렇잖아. 록펠트 공작 부인 작위도 안 주시려고 했던걸? 사실 나도 이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 줄 몰랐어.”
그 말에 카리나가 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말라붙어 있던 입술이 금세 뜯어져 비릿한 피 향이 났다.
공작 부인 작위를 달라는 간곡한 요청에도 황제는 요지부동이었다. 울며불며 매달려도, 죽는 소리를 내며 떼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황제는 오히려 카리나를 나무라며, 이제부터라도 이슈텔과 잘 지낼 생각을 해야지 사사건건 맞설 생각만 하냐고 무척 혼을 냈다.
덕분에 에보니도 황제에게 불려가 카리나에게 괜한 바람을 넣지 말라고 된통 혼났다. 유하고 감성적인 성격의 황제였지만, 그래도 황제는 황제였다. 황제의 위엄이 주눅이 든 에보니는 반박 한 마디 못 하고 황제전을 나왔다.
완고한 황제의 마음을 돌린 건 일리드였다. 일리드가 오랜 시간을 들여 설득한 끝에야 이번 일을 벌일 수 있었다.
그간 헬리온은 뛰어난 국무 수행능력을 보여 대신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리드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선 이슈텔 리젠트라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리젠트라 공작 부부를 몰아붙일 극적인 상황이 필요했다. 카리나가 공작 부인 작위를 얻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공작 부부에게 무거운 벌을 주기 위해선 자작극의 주인공인 카리나의 신분 또한 그에 맞게 높아져야 했다. 황제는 몹시 내켜하지 않았지만, 결국 카리나에게 리젠트라와 같은 공작 부인 작위를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보니는 카리나를 황후의 자리까지는 올릴 수 없겠거니 하고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저쪽은 그게 아닌가보네.’
물론 카리나가 황후가 되는 것이 자신에게도 나쁠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에보니는 이제 이룰 것을 전부 이루었다. 괜히 어려운 일에 엮여 힘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거절할 수 없게 만들어줘야겠지? 네가 날 처형대에 세웠던 것처럼 악랄한 방법을 써서라도.”
“오, 그래? 얼마나 악랄한 방법인지 궁금해지는데?”
“왜 그거 있잖아, 당신 형제들. 그쪽을 파다 보면 뭔가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쯤은 걸리지 않겠어?”
카리나의 서늘한 목소리에 에보니의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애써 평소처럼 웃어보았지만, 불안한 마음까지 가라앉지는 않았다.
‘원래 저런 얼굴이었던가, 저 여자.’
에보니는 잠시 말없이 카리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 만난 날, 자신에게 거래를 청하던 모습과는 확연히 딴판인 얼굴이었다.
‘그때는 참 예뻤는데, 눈에 생기도 가득했고.’
지금 그녀의 얼굴은 욕망과 절망으로 가득 점철되어 있었다. 이제 에보니의 눈에 카리나는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내 손으로 늑대 새끼를 키웠나 보네.’
성도 없는 하녀였던 카리나에게 리젠트라의 성을 붙여주고, 여러 작위를 거쳐 결국 록펠트 공작 부인 자리까지 앉힌 건 자신이었다. 이제와 드는 생각이지만 너무 일을 크게 벌였나 싶기도 했다.
‘앞으로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할지, 슬슬 고민해봐야겠네.’
늑대가 된 개를 계속 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간의 정을 봐서라도 이제는 자유롭게 목줄을 풀어줄 생각이었지만, 그 짐승이 자신의 목을 노린다면 끝까지 함께 갈 생각은 없었다.
카리나의 처소를 떠나며 에보니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 * *
이슈텔 리젠트라가 일리드 테브로니아의 혼인 소식은 불과 결혼식 이 주 전에 공표되었다. 더불어 리젠트라 공작 부인의 공개 재판은 취소되었다.
예고도 없이 날아온 소식에 귀족들은 당황했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황태자가 정해진 것 아니냐며 혼란스러워했다.
남부 대공령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축하 사신을 보냈다. 북부 대공령에서는 대노한 알렌시아 황녀가 황제께 전서조를 보내 예정된 식을 중단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황태자를 발표하기 전에 결혼식을 먼저 올린다는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헬리온의 편에 섰던 중앙 귀족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 의리 없이 곧바로 일리드의 편으로 돌아선 자들도 있었고,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는 자들도 있었다.
“이슈텔, 이게 대체 어떻게……. 릴체 후작 부인께서 헬리온 대공과 손을 잡으라고 하셨잖아요?”
별궁으로 옮겨와 지내는 동안 실비아의 얼굴은 몹시 상해있었다. 짧은 면회 시간 동안에도 그녀는 자신보다 내 걱정을 더 많이 했다.
“황제 폐하께서 재판을 취소하신 것도 이번 일과 관련 있죠? 이슈텔이 황제 폐하와 거래를 한 거 맞죠?”
실비아가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으며 흐느꼈다.
“실비아, 울지 말아요.”
“나 때문에 이슈텔이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됐는데 어떻게 안 울어요! 내가 좀 더 주의를 했어야 했는데.”
“우리가 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자책하지 말아요, 실비아. 식이 끝나면 폐하께서 언니를 공작 저로 돌려보내주신다고 했어요. 그동안에 어서 회복해서 마티나를 보셔야죠.”
제대로 보지도 못한 딸의 이름을 들은 실비아가 더 크게 곡소리를 내며 울었다.
별다른 혐의가 발견되지 않은 자르는 별궁에서 풀려났으나 아내의 혐의 때문에 공작 저 출입이 금지되었다. 자르는 갓난 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실란다 백작 저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나랑 자르는 이슈텔 결혼식에도 못 가잖아요! 아무리……. 아무리 상황이 이렇게 됐다 해도 아가씨 결혼식인데!”
실비아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분에 차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을 거고, 나 또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할 테니까.
“헬리온 대공이랑은 이야기 한 거예요?”
내가 힘없이 고개를 젓자 실비아가 기겁했다.
“그럼 말도 안 하고 이슈텔 혼자 결정한 거예요? 왜 그랬어요, 정말! 그럼 헬리온 대공도 발표를 듣고 알게 된 거예요?”
“네…….”
“미쳤어, 미쳤어. 정말 무슨 생각으로!”
실비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슈텔, 그냥 면죄권을 써요. 뒷감당은 나랑 오빠가 할게요. 어떻게든 되겠죠.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그냥 폐하께 가서-”
“아뇨. 면죄권은 따로 쓸 데가 있어요.”
내 말에 실비아의 눈의 의아함으로 커졌다. 그녀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속삭였다.
“어디에 쓸 건데요?”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면회 종료를 알리는 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실비아는 별궁 안으로 돌아갔다. 서서히 닫히는 문틈으로 실비아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보였다.
* * *
실비아를 달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나를 보던 새언니의 죄책감 섞인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혔다.
면죄권을 사용할 데가 있다는 말.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무사히 깨어났을 때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부디 큰 문제없이 깨어나야 할 텐데.’
혼자만 짊어지는 비밀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어쩌면 그 어떤 황금보다도 비싼 대가를 치른 걸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상처 입힐지도 모르니까.
정처 없이 걷다보니 어느 새 내 처소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처소 문이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안에 누가 계시지?”
내가 없는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건 황족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그의 이름이 불리었다.
“헬리온 대공께서 오셨습니다.”
애비게일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했다. 나는 드레스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유리병을 꼭 쥐었다. 책상 위에 두고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소 안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앉은 헬리온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이슈텔.”
날 보는 그의 눈가에 붉은 기가 선연했다.
“방금 전에 증인들이 남부 대공령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라비와 북부 기사들을 보내두었으니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폐하께 가서 식을 취소해달라고 하자, 응?”
나와 일리드의 혼인이 발표된 날, 헬리온은 곧바로 황제전으로 가 사흘 밤낮을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러나 황제께선 헬리온을 무시했고 예정대로 식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렸다.
헬리온은 폐하께 자신이 황태자 자리를 포기할 테니, 그 자리는 일리드에게 주시되 자신에게는 나를 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에시의 말이, 헬리온이 어찌나 서럽게 애원하던지 그 자리에 있던 하녀들도 다 같이 울었다고 했다.
“이슈텔.”
헬리온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우리 같이 도망갈까?”
“도망이라니. 그런 말 하지 마, 헬리온. 그러는 순간 우리는 반역자가 되는 거야.”
차분한 목소리로 헬리온을 달랬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왜 안 돼? 너희 오빠와 새언니도 다 데리고 북부로 도망가자. 그 사이에 라비가 증인들을 찾을 거야. 그러면 모든 게 해결 되잖아, 뭐가 문제야? 내가 다 책임질게.”
“헬리온, 제발!”
내가 그에게 붙잡힌 팔을 빼내며 말끝을 높였다.
“도망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너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러는 너야말로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잖아!”
“뭐……?”
말문이 막힌 내가 멍하니 헬리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깊게 심호흡을 한 후 말을 이었다.
“네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이러는 거라 생각하지 않아. 면죄권을 쓰지 않는 거면 그에 견줄 만한 다른 대안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지?”
“…….”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말해 줘, 이슈텔. 그래야 내가 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없어, 그런 거.”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거짓말을 했다. 말리파와의 거래에 대해 조금이라도 운을 뗐다가는 걷잡을 수 없이 말이 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면 차라리 면죄권을 써!”
“아니, 나는 우리 가문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가는 짓은 안 해.”
“지금 그런 자존심을 부릴 때야?”
“아무것도 잃지 않기 위한 내 선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