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찬 금욕생활 1권
활기찬 금욕생활 1권
활기찬 금욕생활
1권
활기찬 금욕생활 1권
차 례
1화. 안 하는 남편
2화. 낯선 남편
3화. 어린 남편
4화. 미운 남편
5화. 그때의 남편
6화. 우는 남편
7화. 예쁜 남편
8화. 묻는 남편
활기찬 금욕생활 1권
1화. 안 하는 남편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
바라고 꿈꾸던 격정의 시간도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고, 그 끝에 있는 건 숨 막히는 공허함뿐이라는 교수의 설명을 들은 세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전과 철학의 세계』라니, 강의명부터가 답이 없었다.
자신이 왜 이런 강의를 듣는 데 시간을 써야 하는 건지, 짜증이 솟구쳤다. 원래대로라면 이 시간에 생산적인 미팅을 백번은 더 했을 것이다.
그녀처럼 수강 신청에 실패한 학우들이 ‘성교’라는 단어에 얼굴을 붉힐 때도 세연은 홀로 삐뚜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우울의 순간에, 여러분은 실존하는 나 자신과 직면할 수 있을 겁니다.”
‘우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울할 틈 없게 성교를 하면 되는걸, 뭘 고민하는 거지? 발칙한 답을 찾은 세연이 턱을 괸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남학생의 새카만 뒤통수를 노려봤다.
결 좋은 단정한 흑발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이런 지루한 담론이 뭐가 재밌는지, 그는 간간이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 최근에 저 남자 때문에 우울… 이 아니라 울컥하기는 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그의 자리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 남자, 신나라는 만면에 해사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세연은 얄밉다는 생각을 숨기지 못한 채 샐쭉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순간, 고개를 젖힌 나라와 세연의 시선이 부딪혔다.
나무랄 데 없는 그의 완벽한 이목구비를 쳐다보자니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들끓는 것 같았다. 세연을 바라보던 나라의 눈에 잠시 이채가 서렸으나, 말 그대로 잠시였다.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린 나라는 자신을 둘러싼 친구들과 함께 강의실을 나섰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즐거운 웃음소리가 텅 빈 강의실에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다.
“신나라….”
세연이 예쁘장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저주라도 퍼부을 듯 음산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읊조려봤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다시금 현실을 깨달은 세연은 작게 탄식하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방금 그녀를 본체만체했던 잘생긴 남학생은 세연의 남편이다. 정확하게는, 남편이 될 예정인 남자였다.
‘기왕 우울할 거면, 나도 성교 후에 우울하고 싶다고. 남편이 있는데 왜 하질 못하냔 말이야.’
나라의 새카만 머리칼 아래에 펼쳐진 드넓은 어깨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어깨를 쓰다듬을 수도, 기댈 수도 없다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세연아, 안 가고 뭐 해?”
혹시 남편인가 싶었지만,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동기였다.
“으, 응. 가야지.”
최대한 대학생처럼 발랄하게 대답한 세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기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뒤로 한 채 세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강의실을 나섰다.
31살이었던 하세연이 21살이 된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그 말인즉슨, 원치 않게 10년 전 과거로 돌아온 세연이 나라와 조금도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한 채 7일을 흘려보냈다는 거였다, 젠장.
‘이대로는 안 돼.’
아랫입술을 깨문 세연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라가 있을 곳은 빤했으니까 말이다.
거의 경보하다시피 급하게 온 덕분에 세연은 이제 막 음료를 주문하는 남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의 근사한 뒤태에 시선을 빼앗긴 세연과 달리, 나라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질린 눈을 했다.
단언컨대, 그건 절대로 미래의 아내에게 지어서는 안 되는 표정이었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아까 친구들에게 건넸던 미소를 완벽하게 지운 나라가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그에게서 달라진 점은 나이뿐이었다. 나른한 눈매 아래에서 빛나는 고동색의 예쁜 눈동자도, 곧게 뻗은 콧대도, 문질러 보고 싶을 만큼 새빨간 입술도 전부 본래 남편의 것과 똑같았다.
세연은 저 예쁜 얼굴을 보기만 해도 몸이 달아올랐고 남편은 그녀가 기대한 그 이상의 것을 주었었다.
문제는, 이 어린 남편은 세연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사랑은 개뿔, 그는 세연을 싫어했다, 감히.
“할 말 없으면 좀 나와줄래?”
제법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세연은 기쁘지 않았다. 원래의 남편은 이보다 훨씬 다정한 음성으로 세연을 대했었으니까.
왜 멀쩡히 잘 지내다가 이딴 과거로 와서, 새파랗게 어린 남편에게 무시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세연은 원래 삶에 어떠한 후회도, 아쉬움도 없었는데 말이다.
애초에 세연이 과거로 뚝 떨어진 것도 어찌 보면 전부 남편 탓이었다. 남편이 ‘그 말’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다시 없을 만큼 뜨겁게 첫 결혼기념일을 보냈을 거고 그 후로도 순조롭게 사랑을 나눴을 텐데.
“다 너 때문이야.”
세연이 뾰족한 목소리로 그를 탓했다.
영문 모를 소리를 들은 나라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그는 세연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차갑게 그녀를 지나쳐 갔다.
‘저 꼬맹이가 진짜….’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이를 갈던 세연은 뒤늦게 몰려오는 후회에 몸을 떨었다. 나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써도 모자란 판에, 그의 성질을 긁고만 있으니.
하지만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였다. 과거로 온 이후의 시간까지 합하면 남편과 하지 않은 지 벌써 3주가 넘었으니, 세연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있었다.
이 정신 나간 사태의 시발점은, 2주 전 사랑스러운 남편이 던진 헛소리에서 시작됐다.
「나 이제 당신이랑 안 할 거야.」
금욕을 선언했던 남편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때는 난생처음 세상이 무너지는 감각을 맞봤더랬지.
두 사람은 학창 시절 공공연한 앙숙으로 유명할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부부가 되고 나니, 이전에 서로를 미워했던 감정들은 눈 녹듯이 녹아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
미워하긴커녕 그와 결혼하는 게 순리였던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라는 누구와 비할 데 없이 완벽한 남편이었고, 세연은 온몸을 다 바쳐 그를 사랑했다.
그래, 말 그대로 ‘온몸’을 다 바쳐서.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경위가 정상적이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그 둘은 행복했다. 그들은 섹스 후에도 우울하지 않은 유일한 부부였다. 적어도 세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태평하게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신나라를 바라봤다.
그는 바짓단 아래로 살짝 드러난 복사뼈마저도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위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세연이 이를 드러냈다.
이제 어찌 되든 좋았다. 상대가 10살이나 어린 과거의 남편이든, 그가 지금 자신을 싫어하든, 그딴 건 중요치 않았다.
하세연의 목표는 단 하나, 이 지긋지긋한 금욕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것뿐이었다.
* * *
아직 겨울의 한기가 다 가지 않은, 꽃들이 이른 봉오리를 맺기 시작하던 3월의 첫머리. 겨울과 봄이 겹쳐지는 변덕스러운 계절에 부부의 연을 맺는 두 사람이 있었다.
결혼식을 올리기엔 애매한 시기였음에도, 규모가 큰 호텔 웨딩홀에는 그들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신랑 신나라, 신부 하세연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마침내 주례의 커다란 목소리가 홀 끝까지 울려 퍼졌고, 하객들은 새로운 부부의 탄생에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결혼식이었음에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던 세연은 주례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눈을 빛내며 옆자리에 선 근사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다갈색 머리카락이 눈이 부셨다. 그는 당장 울기라도 할 것처럼 벅찬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뭘 입었는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신랑의 옆모습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야할 뿐이었다.
‘지금부터 신나라는 내 남자야. 이제 나라랑 매일 화끈한 밤을 보낼 수 있다고!’
너무 기뻤던 나머지, 신부 하세연은 퇴장하는 것도 잊고 신랑 신나라에게 입을 맞췄다.
신랑은 갑작스러운 신부의 돌진에 당황한 듯 움찔했지만, 이내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그녀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식장에 있던 누군가 ‘쟤네 좀 말려!’ 하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깊은 키스를 나눴다. 그곳에서 거추장스러운 웨딩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신랑에게 달려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뒤는 뻔했다.
어쩌다 출장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 세연과 나라는 매일 같이 몸을 섞었다.
물론 몸이 떨어져 있을 때도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 서로의 욕망을 채워주었다. 몸이 멀어져도 사랑은, 아니 서로를 향한 갈증은 마르지 않았으니까.
유부녀가 된 세연은 가끔 남편과의 행복한 ‘관계’와 ‘경험’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질린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둘 다 약이라도 먹냐며, 징그럽다고 사색이 되던 친구도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그들은 정말 ‘사랑’이 넘치는 부부였다. 세연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만큼이나 변하지 않고 처음의 열정을 유지하는 부부는 흔치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뜨거운 관계는 반년도 채 못 갈 거라던 주변인들의 한숨 섞인 조언과 다르게,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격렬하고 짜릿한 신혼생활을 이어 나갔다.
세연은 자신의 결혼생활에 진심으로 만족했다. 이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을까 싶을 정도로, 남편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아찔한 감각을 매일매일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두 사람은 첫 결혼기념일을 맞았다.
“사장님, 오늘 결혼기념일이시죠? 결혼식 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너무 빠르네요. 정말 축하드려요!”
첫 결혼기념일을 맞아 평소보다 화려하게 꾸민 세연을 보고 직원들이 홀린 듯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설레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직원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여 보인 세연이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짐들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오늘 뭐 하실 거예요? 잠깐만요, 그거 남편분 드릴 선물이에요? 제가 알기로는 이 브랜드 가격이… 우와, 대박이다!”
세연의 짐 사이에서 익숙한 브랜드 로고를 발견한 직원이 말을 잇지 못하며 연신 ‘역시 사장님!’을 외쳤다.
그 내용물은 한정판 시계였는데, 친한 백화점 직원에게 특별히 이야기한 끝에 겨우 예약을 걸어 얻어낸 것이었다.
남편의 지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에 딱 맞춘 것처럼 어울리는 물건이었기에 세연은 귀찮음을 기꺼이 감수했다.
슈트 차림으로 이 시계를 찬 그와 뜨겁게 관계하는 장면을 상상했더니 저도 모르게 군침이 넘어갔다.
“사장님 남편분께선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예쁘고 능력 있는 데다가 일편단심인 아내가 있잖아요. 전생에 나라라도 구하셨나?”
직원들의 끊이지 않는 환호를 들으면서 세연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남편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나라를 구한 건 세연이었다.
그들은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로 연신 ‘오늘 뭐 하실 거예요?’라는 질문을 던졌고,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세연은 미소까지 띤 채 직원들의 물음에 하나하나 답해주었다.
“P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거예요.”
“우와, 거기 한강뷰로 유명한 데잖아요! 예약 잡기 진짜 힘들다던데!”
“그리고 남편한테 준비한 선물을 줘야겠죠?”
“제가 남편분이었으면 저 시계를 받은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을 겁니다.”
한 남자 직원이 얼빠진 감탄사를 던지자 다른 직원들이 그를 향해 눈총을 쐈다. ‘네가 어떻게 사장님 남편이 될 수 있냐.’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전 직원들이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연은 묘하게 눈빛을 빛내더니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사장님의 매혹적인 미소에 직원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할 거예요.”
“네?”
“밤새 할 거라고요.”
말을 마친 세연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는 곧 있을 포식을 기대하는 짐승의 눈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의 돌직구에 직원들은 그 자리에 딱딱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익숙한 반응을 보이는 그들을 힐끗 쳐다본 세연이 짧게 손뼉을 쳤다.
“자, 이제 일합시다.”
직원들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일을 시작하는 그녀에게 그 이상 말을 걸 수 없었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직원들은 한참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젊고 아름다운 사장님의 발언을 곱씹었다.
“방금 사장님 말씀 때문에 집중이 안 돼요.”
별안간 신입사원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사수에게 말을 걸었다. 사수 역시 달아올랐던 얼굴을 식히지 못한 채였다.
“사장님 부부가 원체, 음… 금슬이 좋으셔.”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고 부럽네요….”
두 사람은 서로 눈도 못 마주친 채 멍하니 모니터만 응시했다.
유명 너튜버 매니지먼트의 사장, 하세연의 남편 사랑은 사내에서도 유명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는 남편 외의 남자에게는 완벽한 철벽을 쳤고 오늘처럼 통이 큰 선물들을 자주 준비해 직원들을 놀라게 했다.
여기까지는 전 직원들이 아는 사실이고, 초창기 멤버들만 아는 사장님의 비밀 아닌 비밀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하세연 사장은 자신의 남편과 ‘하는 것’을 과하게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때때로 남편분의 정력과 허리가 무사한지 진지하게 걱정될 정도로 말이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부부관계를 부러워하는 직원들도 많았다.
이렇듯 나라와 세연 부부는 알게 모르게 만인의 질투와 동경을 한 몸에 받는 ‘완벽한 부부’였다.
기다리던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세연은 전 직원에게 칼퇴를 명하고 회사를 나섰다.
남편은 당연한 듯이 그녀의 회사 앞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