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없는 모란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1권
향기 없는 모란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1권
향기 없는 모란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1권
향기 없는 모란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1권
차 례
열두 번째, 여름(1)
열두 번째, 여름(2)
열두 번째, 여름(3)
열두 번째, 여름(4)
열두 번째, 여름(5)
열두 번째, 가을(1)
열두 번째, 가을(2)
열두 번째, 가을(3)
열두 번째, 가을(4)
열두 번째, 가을(5)
열두 번째, 가을(6)
향기 없는 모란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1권
열두 번째, 여름(1)
“살려주세요, 공주마마! 마마!”
발작과도 같은 외침이 나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갑옷을 입은 두 명의 병사가 나인의 양옆에 서서 축축하게 젖은 겨드랑이 사이에 단단한 팔을 끼우고, 그녀를 바깥으로 끌어내는 중이었다. 병사들의 등 뒤에는 ‘온(穩)’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네, 네 이놈들! 이것 놓아라! 놓지 못하겠느냐!”
나인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버둥거리자, 굵은 털로 뒤덮인 병사의 손이 나인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 쥐었다.
“아악……!”
나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머리카락을 고정하던 비녀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솥뚜껑처럼 두꺼운 손마디 사이로 핏물이 맺힌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뜯겨 나왔다.
눈물로 뒤범벅된 나인의 얼굴은 병사들이 처음, 방 안에 들이닥쳤을 때부터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마! 마마! 공주마마!”
나인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절박한 몸짓으로 손을 뻗었다. 공포에 질린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밖으로 끌려가는 내내, 나인의 시선은 오롯이 방 안의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마!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나인의 시선이 반쯤 부서진 탁자로 향했다.
다리가 부러진 탁자 앞에는 한 명의 여인이 차분한 모습으로 앉아서 모든 소란을 지켜보고 있다.
마치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 것처럼 그저, 고요한 눈으로 자신의 하나뿐인 시비가 병사들에게 붙잡혀 밖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마마……!”
나인의 애절한 외침을 삼키며, 장지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인의 시선은 부서진 탁자 앞에 앉아 있던 여인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샅샅이 뒤져라! 황족과 관련된 인물이라면 쥐새끼 한 마리도 놓쳐선 안 된다!”
“예!”
병사들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자가 머리에 청색 두건을 쓰고,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눈에 익은 자였다.
언젠가 온 가문의 초대를 받아 그들이 다스리는 북쪽 영지에 얼마간 머물렀을 때, 그곳의 책임자로부터 직접 소개를 받았던 젊은 장수였다.
“황실의 물건은 모조리 부숴버려라! 적들의 물건을 남기는 것은 가문의 수치다!”
“…….”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여인을 보고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사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될 거라 말했던 젊은 장수는 악귀의 형상을 하고, 제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던 입으로 병사들을 지휘하며, 누구보다 앞장서서 전각을 부수고 있었다.
쿵!
병사들의 발길질 몇 번에 비단 금침이 놓여있던 침대가 두 쪽으로 갈라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끼던 비단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문간에 세워뒀던 매병(梅甁, 꽃가지를 꺾어다 꽂아두는 병)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지고, 따사로운 햇볕이 비추던 창문은 파편만 남아 먼지와 함께 뒹굴고 있었다.
사람도, 물건도…… 온 가문의 이름 아래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드르륵!
장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한차례의 파괴 행위가 끝나고, 전각을 부수던 병사들이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언제 그렇게 소란스러웠냐는 듯, 순식간에 모든 것을 삼킬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던 여인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이 살던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폐허가 된 방 안에 홀로 남아 있었다.
“…….”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황량하고 쓸쓸한 방이었다.
엉망이 된 방 안을 둘러보던 여인의 눈동자 위로 슬픈 감정이 떠올랐다.
“……역시 여기 있었군.”
그때, 닫혀 있던 장지문이 다시 한번 열리며 전각을 집어삼킬 것 같은 거대한 그림자가 마룻바닥에 길게 드리워졌다.
그림자를 따라 오른손에 보검을 든 장신의 남자가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남자의 눈매는 산짐승의 것처럼 사나웠고, 눈동자 위에 맺힌 안광(眼光)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품고 있었다.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내였다.
탁!
남자는 망설임 없이 전각에 발을 들이며, 엉망이 된 방 안은 둘러보지도 않은 채 곧장 앞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전각을 가로지르는 남자의 등 뒤에도 병사들의 갑옷에 있던 것과 똑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반쯤 부서진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남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지?”
탁자 앞에 앉은 여인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 패왕(?王)이라 불리며 북방 이민족들과 전쟁터를 호령하던 대장군의 눈빛이었다.
여인은 저를 향한 서릿발 같은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며 천천히, 아주 느릿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미가 없으니까요.”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앞으로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둘 사이의 거리가 한 뼘 남짓 줄어들었다.
“나는 분명, 그대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었을 텐데.”
여인은 대답 대신 고요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까와 똑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남자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밤하늘에 뜬 별처럼 반짝이는 여인의 새까만 봉목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습격이 예정된 시간도, 장소도, 모두 알려주었다. 황족은 한 명도 살려두어선 안 된다는 가문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그대가 몸을 숨길 수 있는 피난처를 마련해주었어.”
여인은 그런 남자의 사정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랬지요.”
“……그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황궁에서 달아날 수 있었다.”
담담하게 말을 잇던 남자의 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좀처럼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 남자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지?”
“…….”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황궁에 남은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던 남자의 얼굴 위로 정제되지 못한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천화!”
천화(天花).
하늘의 꽃이라 불린 여인은 남자의 얼굴 위에 드러난 분노를 놓치지 않으며, 아니, 오히려 남자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화를 내는 모습이 기꺼운 듯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르던 개가 집을 습격했다고 해서 주인이 집을 버리고 달아날 수는 없지요.”
남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여인이 말하는 ‘개’와 ‘주인’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분명했다.
휘익!
남자의 칼집에서 검이 뽑혀 나와 여인의 목덜미에 닿았다.
“지금 나와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것인가?”
여인은 시퍼런 검날이 자신의 목을 지그시 누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깟 위협쯤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말장난이 싫다면, 늘 해왔던 것처럼 일문일답(一問一答)이라도 주고받을까요?”
“……!”
흡사 재미난 대화라도 나누는 것 같은 여인의 태도에, 검을 쥔 남자의 손등이 부르르 떨렸다.
여기서 조금만 힘을 주면, 가문의 보검이 여인의 목덜미를 파고들어 저 가녀린 목쯤은 간단하게 베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남자는 가까스로 내면에 쌓인 분노를 다스리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힘주어 노려보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남자는 여인의 목을 찌르던 검을 바닥으로 내렸다. 여인의 목덜미에는 불그스름한 칼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내 말을 들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신호를 주는 대로 전각을 빠져나가, 뒷문에 세워둔 말을 타고 달아나라. 목적지는 양양(襄陽). 도착하는 대로 미리 준비해둔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뱃사공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에 데려다줄 것이다. 산길을 걷다가 제비꽃을 엮은 표식이 보이거든 그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전에 한 번 나와 함께 가본 적 있는 곳이니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어서…….”
그러나 여인은 꼼짝 않고 서서, 부서진 탁자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온 공자,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고 있나요?”
초조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던 남자의 얼굴이 격랑에 휩쓸린 것처럼 일그러졌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별거 아니에요. 질문 한 번에 대답 한 번. 늘 해왔던 것처럼 서로를 알아가자는 것뿐이죠.”
“…….”
남자는 도저히 이 여인을,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침착하기 짝이 없는 이 여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녕,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단 말인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대는 저에게 일문일답을 제안하면서 물었죠.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과거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는지.”
여인은 부서진 탁자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매끈한 나뭇결을 두드리는 경쾌하고도 규칙적인 소리가 부서진 전각에 울려 퍼졌다.
“질문을 들었을 때 놀라면서도 얼마나 기뻤는지…… 그대는 결코 모를 거예요. 시간이 과거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안도감에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답니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시간이 없었다.
조금 있으면 여인이 머물던 이 전각 안으로, 자신이 지휘하지 않는 가문의 병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초조함에 식은땀이 계속 배어 나와 검을 쥔 손바닥이 미끄러질 것 같았다.
“어째서 이런 의미 없는 문답 따위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어서 몸을 피해야…….”
여인이 생긋 웃으며 남자의 말허리를 잘랐다.
“물론, 거짓을 고백하기 위해서지요.”
여인의 대답을 들은 남자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진실을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거짓을 고백한다니?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시간이 과거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 된 연유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지 물었죠.”
“그대는 분명, 나의 질문에 모른다고 답하였지.”
“그래요.”
여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부, 거짓이었어요.”
챙강!
그와 동시에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만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남자가 여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거짓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