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3권
하얀 거짓말 3권
하얀 거짓말
3권
하얀 거짓말 3권
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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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짓말 3권
1
이번에는 해인이 연기를 시작했다.
농염한 눈빛을 빛내며 목소리에도 교태를 살짝 담았다.
그 기세에 놀란 미래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형님한테 이런 말 해도 되나? 그이가 침대에서 어떻게 돌변하는지 알아? 겪어보지 않았으면 말도 하지 마.”
해인은 너스레를 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인 줄 알았잖아.”
“나한테 그런 말을 왜 하는데? 교양 없이.”
“이거 지금 엄청 중요한 포인트거든? 매일 살을 부딪치는 부부라면 당연히 알 수가 있지. 상대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지, 아닌지.”
해인은 마지막으로 미래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형님도 잘 알지? 나보다 더 오래 경험했을 테니까?”
해인의 물음에 미래의 얼굴이 온통 일그러졌다.
속 좀 아플 거다.
해인은 제 승부수가 통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디서 감히 내 남자를 가지고 헛소리를 해?
잠시 흔들렸던 해인이 바로 멘탈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해인이 미래가 가져온 커피를 마시고, 커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던 그날이었다.
처음에는 정신이 없어 주방 직원들의 움직임에 신경 쓰지 못했지만 곧 그들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희진이 해인을 향해 말했다.
「가볼래?」
그녀의 짧은 질문이 의미하는 바를 해인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정보를 최대한 모아야 한다는 최 회장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했다.
해인은 희진을 따라 조용히 직원 휴게실로 향했다.
희진은 해인이 문에 귀를 댈 때까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해인은 처음 해보는 일이라 긴장하면서도 꽤 적극적이었다.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말을 엿듣는 행동은 불쾌하면서도 스릴 있었다.
「작은 사모님이 정말 그 커피를 가져오셨다고?」
「그랬다니까. 내가 직접 받았는걸.」
「어머, 작은 사모님이 왜 그러셨지?」
「새 사모님이 보기 싫었나 보지.」
안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그럼 그 안에는 뭐가 들어있었던 거래?」
「나도 모르지. 배탈 나게 하는 약이라도 넣었나.」
재잘거리는 소음 속에서 쓸 만한 정보를 캐내는 것은 나름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해인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왜 보기 싫었는지 나는 알겠다.」
그때, 해인이 귀를 쫑긋 세웠었다.
「신혼부부에 대한 질투지, 뭐. 정우 도련님이 여자한테 워낙 목석같잖아.」
오호라, 아주버님은 다정한 스타일이 아니군.
「예전에 이 집에 살 때도 두 사람 방에서는 밤이고 낮이고 아무 소리도 안 들렸어. 신혼부부 방이었는데도.」
「어머, 정말?」
「그래서 애가 안 생기나 보다.」
해인에게 그 대화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겉으로 보기에도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육체적인 궁합도 그다지 잘 맞지 않는 듯했다.
거기까지 듣고 해인과 희진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어땠어?」
희진은 마치 신입사원을 훈련시키는 다정한 선배처럼 해인을 향해 소감을 물었다.
「기분은 참 별로네요. 한집 안에서 서로 엿듣는다는 게.」
「이런 일 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만 해도 돼.」
희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러다 혼자만 당하는 거지.」
그녀는 이런 행동에 나름대로 대단한 소신을 갖고 있는 듯했다.
「이런 얘기도 회장님께 보고하나요? 방금 제가 엿들었다는 사실도 어쩌면 보고하겠죠?」
「필요하다면.」
희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도 처음부터 이런 일이 즐거웠던 건 아니야. 지금도 즐거워서 하는 건 아니고. 그렇지만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 수단은 좀 지저분해도 괜찮다고 생각해.」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얻은 정보를 어디에 쓰게 될지도 모르겠고요.」
해인의 그 당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게 된 셈이었다.
바로 오늘 그 이야기들이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미래는 무서운 얼굴로 해인을 노려보았다.
해인이 작정하고 찔러본 말이 미래의 약점에 적중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다시 얘기해볼까? 네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은우를 정신적으로 지배했다는 둥 말 같지도 않은 희망 사항은 넣어두시고.”
미래는 한참을 말없이 해인을 노려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미래는 다시 멘탈을 잡기라도 했는지 한결 표정이 가벼워졌다.
“넌 나에게서 아무 말도 못 들을 거니까.”
해인은 답답함에 어금니를 힘을 꽉 주어 물었다.
어떻게 실토하게 만들지?
묶어놓고 고문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데 너도 참 미련하다.”
“뭐가?”
미래가 삐딱한 시선으로 해인을 조롱하며 말했다.
“궁금하면 네 남편한테 직접 묻지 왜 나한테 와서 행패야?”
해인은 다시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었다.
해인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은우에 대한 일을 은우에게 물어볼 수 없다는 것.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너도 최은우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아니까. 시도 때도 없이 수면 발작을 일으키니 조심스럽겠지. 저러다 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겁도 덜컥 날 것이고.”
미래는 무서운 이야기를 잔인하게 웃으며 지껄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 안 해봤어?”
“뭐가?”
“최은우 입장에서는 모든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느니 차라리 영영 안 깨어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거.”
“뭐라고?”
“솔직히 그렇잖아. 자살하는 사람들이 아무렴 다 이유가 있지 않나…….”
쫘악.
해인의 손바닥이 전광석화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미래의 작은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악!”
미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소파에 고꾸라졌다.
“말이면 다인 줄 알아!”
해인은 따귀 한 대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미래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멱살을 잡아챘다.
“한 마디만 더 해봐.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테니까.”
“뭐야? 지금 날 쳤어?”
“그래! 그리고 얼마든지 더 쳐줄 수 있어.”
“야, 너 미쳤냐?”
“미치기만 했겠냐? 네 말대로 나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야. 잃을 게 산더미 같은 너는 나 절대 못 이겨. 나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해인은 힘껏 미래를 내동댕이쳤다.
“으악!”
미래는 다시 한 번 소파에 처박혀버렸다.
“아줌마!!!”
미래가 악을 쓰듯 주방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네, 사모님.”
그때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가사도우미가 주방에서 쪼르르 달려 나왔다.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봐서 방금 일어난 소동을 모두 목격한 모양이었다.
“당장 본가에 보고해. 김 실장이든, 어머님이든, 다 알려. 이 정신 나간 여자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싹 다 말하라고!”
미래는 지긋한 중년 여성에게 반말로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그 정도로 되겠어? 직접 가서 울고불고하지 그래? 어머님은 네 편이라며?”
해인은 미래를 향해 조소를 날리며 말했다.
“이따가 집에서 봐, 형님아. 나는 좀 들를 데가 있어서.”
해인은 미래를 두고 그 집을 빠져나갔다.
* * *
폭풍 같은 오전 영업을 마친 은우는 사장실에서 한숨을 돌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형, 나야.”
-은우? 네가 웬일이야?
형 정우는 은우의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무뚝뚝한 정우의 성격 탓에 두 사람은 자주 통화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형한테 부탁할 게 있어.”
-뭔데?
“들어줄 거지?”
곧 정우의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들어줘야지. 내 동생 부탁인데.
은우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사 랩에서 성분 검사 좀 받고 싶은데.”
-성분 검사? 어떤 걸?
“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