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버그린 6권
포에버그린 6권
포에버그린
6권
포에버그린 6권
차 례
17. 나락으로
18. 얽힌 인연들
19. 성전
포에버그린 6권
17. 나락으로
화염이 광산을 잡아먹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폐광이 폭파되며 화재가 발생했다. 루니아가 채굴되는 광산 근방이라 동료들이 우왕좌왕하며 도망쳤다.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불길이 빠르게 번졌다. 뒤돌아보자 손을 뻗어 동료를 한 명씩 잡아가는 마수가 보였다. 그 광경을 목도했다면 누구든지 불을 마수라고 표현하리라.
산 채로 불타는 이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나무가 부러져 쓰러지고, 회색빛 연기가 시야를 가리고……. 너무나 끔찍한 기억이라 평생 잊지 못할 터이다.
*호외의 내용은 광부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그날의 참극》
* * *
바이올라 축제가 끝난 후로도 로시엔은 쉬지 못했다. 사방에서 밀려든 일들을 처리하느라,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느긋이 차를 마시며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는 것은 사치였다. 영지의 상황을 살피며 수도와 이국의 동향까지 파악해야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로시엔은 종이 묶음을 내려다보며 아래턱을 만졌다. 궁정화가인 학술원 동기가 보낸 일지에서 황궁의 살벌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후계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그만큼 황제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향락에 빠져 총기를 잃은 지 오래이니 예견된 일이기는 했다.
“또 그런다. 턱 만지지 말라고 말한 게 엊그젠데. 풋내 나는 가주라고 얕잡히지 않으려면 근엄한 척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호아킨이 책상을 내리쳤다. 그녀의 손 밑에 토지 매각 증서가 있었다.
디레스 정원의 자투리땅을 중앙 귀족들에게 팔기로 했다. 매각으로 마련된 돈은 비밀결사의 자금이 될 터였다. 훗날 거래를 빌미로 중앙 귀족들을 회유할 수도 있고.
회유는 자네트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아스카르 성에서 헤어지기 전에 토지 매각 건을 털어놓았더니 그들을 대공파로 끌어들이자고 했더랬다.
로시엔은 그때를 회상하며 서명했다. 매각 증서를 받아든 호아킨이 그를 타박했다.
“웃지만 말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라니까. 누님으로서 하는 충고다. 젊은 놈이 설치고 다닌다고 못마땅해하는 귀족들이 적지 않아.”
“연륜에서 나오는 무게감을 내가 어쩌겠어.”
로시엔이 보고 있던 일지를 한 장 넘겼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네가 손을 떼어낸 적이 있었지. 만지지 말라면서.”
“내가? 그런 적 없어. 잔소리만 했었지.”
종잇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기억 속에 분명 어떤 여자가 있었다. 아래턱을 매만지던 로시엔의 손목을 잡은 여자.
잘못된 기억인 건가.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나 마음이 쓰였다.
로시엔이 상념에 잠긴 동안 호아킨은 머리를 기울여 일지 내용을 엿보았다.
“황궁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좋네. 그 사람한테 부탁한 거지? 널 유명인으로 만들어준 동급생. 첩보 활동을 시킨 셈인데 괜찮겠어? 속인 것 같잖아.”
“눈치가 빠른 친우야. 무리한 부탁이면 거절해도 된다고 했는데……. 알고서도 도운 거지. 내게 빚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럴 만하지. 학술원에 다닐 때 괴롭힘당하던 걸 네가 도와줬다며. 달밤 아래 미청년 덕분에 궁정화가도 됐고.”
“그 그림 얘긴 그만해.”
로시엔이 헛기침했다. ‘달밤 아래 미청년’만 언급되면 그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졸업식 날 기념으로 받은 그 작품을 객실 벽에 걸어둔 것은 그러한 까닭이었다. 자주 드나드는 곳에 두면 지나다닐 때마다 민망하지 않겠는가.
결과적으론 손님들에게 자기애를 과시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졸업한 지가 언젠데.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그만.”
“알았어. 그나저나 파벌 간 다툼이 심해지겠네. 서로 자기들이 미는 인물을 차기 황제로 세우려고 아등바등. 미리엄 가문이 중앙 귀족의 선봉이 되어서 다행이야.”
“대부님 세력이 불리한 건 변함없어.”
“찬탈자의 위치란 게 그렇잖아. 그래도 후대엔 다르게 전해지겠지. 역사는 승자의 편이니까.”
대화가 끝날 즈음 문이 열렸다. 안나가 양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어 들어왔다.
“맞이할 준비 다 끝냈어요! 아가씨가 오시기만 하면 돼요. 제가 마중을 나갈게요.”
호아킨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트를 반기다니 별일이네. 싫어했잖아.”
“제가 언제요?”
안나가 말을 쏘아붙이곤 로시엔을 보았다.
“갔다 와도 되죠?”
“그래. 네가 환영해주면 자네트도 기뻐할 거다.”
“가볼게요!”
생긋 웃은 안나가 뒤돌아 걸어 나갔다. 문을 닫으면서는 호아킨을 째려봤다. 쾅 소리에 호아킨의 눈이 커졌다.
“눈빛 봤어? 누가 새침데기 아니랄까 봐. 밝아진 건 좋은데 성격이 예전보다 괴팍해진 것 같아.”
호아킨이 혀를 찼다.
“자네트를 따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앞날은 예측할 수가 없다니까?”
“놀랄 일인가.”
“옛날을 생각해 봐. 자네트를 골탕 먹이겠다고 벼르곤 했잖아.”
“그럴 리가. 이유도 없이 남을 싫어하는 애가 아니었어.”
“싹싹하고 착한 애로 여겼겠지만, 그건 가식이었거든? 안나가 다른 사람들한텐 얼마나 앙칼졌는지 모를 거다. 따라다니면서 뒷수습하느라 나만 고달팠지.”
로시엔이 몸서리치는 호아킨에게 종이 뭉치를 떠넘겼다. 하소연을 들어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일이 산더미인 데다가 계속 늘어날 전망이었다.
아스카르 대공이 권좌에 앉는 그 날까지.
* * *
창을 내다보자 길가에 선 여자가 보였다. 자네트는 천장을 두들겨서 마차를 세웠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여자가 문을 열고서 자네트 옆에 탔다.
“오랜만이네요, 아가씨. 잘 지내셨죠?”
“그래, 안나. 날 기다린 거니?”
안나는 맞은편에 앉은 루웰에게 눈인사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뭐 하러 나와 있겠어요.”
“저택에서 기다려도 됐을 텐데. 고마워.”
안나가 배시시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뺨이 볼록해졌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자네트는 유심히 봤다. 얼룩덜룩한 흉터가 거의 사라진 뺨을. 평온을 되찾은 얼굴을. 행복에 겨운 안나를.
시선을 느낀 안나가 뺨을 만지작댔다.
“이젠 육안으로도 가까이서 봐야 보일 정도예요. 아가씨가 주신 연고 덕이죠. 정말 감사해요.”
“베일로 가리지 않은 걸 보니 마음이 놓여.”
자네트가 안나의 손목을 잡아 끌어 내렸다. 손을 맞잡음과 동시에 마차가 저택의 정문을 넘었다. 안나는 둘이서만 정원을 거닐다 가자며 마차를 멈추게 했다.
두 여인은 내려서도 손을 잡고 걸었다. 산책길에 내려앉은 땡볕을 밟으며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건만 쫑알쫑알하던 안나가 입을 다물었다.
반대편에서 클로드가 오고 있었다. 그는 다가와 자네트에게 우양산을 건넸다. 노르덴 기사단으로 복귀한 그가 유르카인 후작저에 있어 자네트는 놀랐다.
“클로드 경을 볼 줄은 몰랐네요. 안나를 보살피는 일이 끝났으니 여기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스카르 전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볼일이 끝났으니 곧 돌아갈 겁니다.”
안나는 대화에서 빠진 채 딴청을 피웠다. 클로드가 좋은 오후라며 말을 붙여도 시선을 떨어뜨린 채 가느다란 목청으로 대답했다.
멀리서 클로드를 부르는 외침이 들렸다. 자네트가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클로드가 말했다.
“케인과 함께 왔습니다.”
“알튼 원정에서 돌아왔다고 들었어요. 늦었지만 수고했다고 전해줘요.”
“본인이 자진해서 갔었으니 수고스러웠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무인의 표본인 사내가 각진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안나가 날숨을 터트리며 구부정한 등을 폈다. 그녀를 지켜보던 자네트의 입술이 얇게 말렸다.
“갑자기 조용해졌네?”
“……불편해서요.”
“하긴, 그렇겠구나. 때리고 물건을 던지고 막 대했으니.”
안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기세가 쭈그러들어 입술을 잘근거릴 뿐이었다.
그 반응으로 자네트는 짐작했다. 안나가 클로드 앞에서 소심해지는 이유를.
미안해서만은 아닐 테다.
이후 안나는 급격히 말수가 줄었다. 저택으로 들어가 로시엔이 있는 집무실에 도달할 때까지 한 말이 열 마디 안팎이었다.
“들어가 보세요. 저는 객실에 짐 들여놓는 걸 보러 갈게요.”
노련한 사용인들이 실수할 리 없었다. 자네트는 핑계인 줄 알면서 안나를 보내주었다.
집무실로 들어가려는데 호아킨이 문을 열고 나왔다. 마주치자마자 포옹하는 바람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퍽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과격한 인사였다.
“둘만 있게 해주려고 나온 거야. 들어가 봐.”
호아킨이 휘감은 팔을 풀며 집무실을 가리켰다. 자리를 피해 주는 대신 자신과 수다의 밤을 보내야 한다면서.
자네트는 약속을 나누고 문고리를 잡았다. 문에 가로막힌 시야가 트이자 일어서고 있는 로시엔이 보였다. 업무에 집중하고 있던 것은 아닌 듯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힘들진 않았어요?”
“마차를 오래 타는 데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로시엔의 품에 파고들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립던 향취를 맡으니 피로가 풀렸다.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이리 와요.”
자네트가 소파로 이끌려 갔다. 나란히 앉은 연인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으니, 그가 붙잡은 손을 쥐었다 놓길 반복하였다.
“무슨 신호예요?”
“그냥, 쳐다만 보길래요.”
“달라진 곳이 있나 살펴본 거예요. 턱선이 날카로워진 것 같네요. 수척해서 그런가?”
못나 보이려나. 나직한 혼잣말에 자네트가 콧소리를 흘렸다. 외견을 신경 쓰는 로시엔의 모습이 의외였다.
“그런 게 아니라 걱정돼서요. 바이올라 축제 기간부터 줄곧 바빴던 거지요?”
자네트가 로시엔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축제 때 오고 싶었는데, 못 와서 아쉬웠어요.”
“가문의 중대사와 맞물려서 영지에 있어야 했잖아요. 크라츠 경과 미리엄 양의 결혼식은 잘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고맙다고 전해달래요. 보내준 선물 잘 쓰겠다고 했어요.”
“직접 가서 축하하지 못해 아쉽네요.”
두 사람이 마주 봤다. 상대의 미련이 남은 표정을 통해 제 표정을 본 셈이었다. 웃긴 일도 아니건만 웃음소리가 세차게 터졌다.
한참 떠들다가 로시엔이 화두를 돌렸다.
“생각보다 잠잠하던데. 재판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일을 키우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기로 했어요. 루웰 경을 본래 자리로 돌려놓는 게 중요하니까요.”
적법한 주인에게 영지를 돌려주어라. 그렇게 한다면 재판까지 가지 않고 덮겠다.
자네트는 퀴르톤 자작에게 보낸 협박장을 상기하며 덧붙였다.
“서신에 대한 답을 기다려 봐야지요.”
“이번엔 그자도 어쩌지 못하겠군요. 이르긴 하지만 루웰 경에게 축하의 말을 전해야겠습니다. 가문의 땅을 되찾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자네트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론 키토시안 공이라고 불러야 할 거예요.”
* * *
안나가 수상했다.
며칠간 붙어 지낸 결과, 자네트의 생각은 확고해졌다. 클로드와 관련되기만 하면 안나가 달라진다고.
클로드 경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그때마다 안나는 말을 아꼈다. 불가피한 상황 외에는 그를 피하고, 마주친다고 해도 긴 대화를 꺼렸다. 그의 앞에서만 안나답지 못했다.
하루는 분수대에 걸터앉아 이야기할 적이었다. 멀리서 오는 클로드를 발견한 안나가 일어서더니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하녀를 돕겠다는 명분이었다. 클로드와 마주치지 않기 위한 핑계였겠지만.
안나는 하녀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품에 안았다. 뺏다시피 넘겨받은 탓에 바구니 밑으로 흰 식탁보가 늘어졌다.
바닥에 끌리는지도 모르고 걷던 안나는 식탁보 끄트머리를 밟고 넘어졌다.
볕에 말려 방금 걷어온 것인데 빨랫감이 또 생겼다며 하녀가 투덜거렸다. 그녀가 바구니를 들고 가버리자 안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친 것 같아 뛰어갔건만 자네트가 부축할 필요는 없었다. 홍당무가 된 얼굴을 보고 말았다. 웃음이 나려는데, 안나의 몸이 번쩍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