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버그린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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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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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4. 악몽 같은 자정일지라도 (2)
과거담; 소망이 이루어지길
과거담; 열셋, 1월의 어느 날
제3부. 여명
15. 물밑 전쟁
16. 봄철 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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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악몽 같은 자정일지라도 (2)
“세실, 정신이 들었니?”
“무슨 소리세요? 그런데 우리가 왜 숲에…… 저게 뭐야!”
세실이 의식을 찾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불줄기들이 회오리치고 사방에 불티가 날아다니니 소스라칠 만했다.
“꾸물댈 시간이 없어.”
기운을 차린 자네트가 세실의 손을 잡고 뛰었다. 정면에 블랙이 있었다.
“블랙!”
“기껏 언데드 무리를 해치웠더니만 또 뭐야?”
이런. 자네트의 뒤를 보며 블랙이 혀를 찼다. 촉수처럼 움직이는 불줄기 하나가 거목을 내리쳤다. 뿌리째 뽑힌 나무는 그들의 머리 위로 쓰러지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블랙이 결계를 쳤다. 결계에 튕겨 나간 나무가 옆으로 떨어졌다.
“아, 아가씨! 어떡해요!”
세실이 하늘을 가리켰다. 수 갈래의 불줄기가 뭉치더니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쿵. 지반이 울렸다. 자네트 일행은 무사했으나 결계에 금이 갔다.
연이어 두 번째 공격이 들어왔다. 자네트가 결계에 손바닥을 댔다. 마력을 보태서 결계의 경도를 최대치로 높였다.
“소용없어. 곧 깨질 거다. 나와 네 힘만으론 부족해.”
“넌 강한 마력을 지녔잖아! 시간을 되돌릴 만큼!”
“엄밀히 말하자면 금서가 한 일이야. 유쿤디의 힘이 담겨서 소원을 들어주는 데 한계가 없는 거지. 난 금서에 종속된 노예이자 오르쿠스의 하수인으로서 마력만 조금 나눠 받은 거다.”
“그럼 불기둥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균열이 범위를 넓혀갔다. 몇 번 더 타격을 입으면 결계가 버티지 못할 터였다.
“저것 좀 보세요!”
자네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마력이 스민 바람이 밀려왔다. 거센 풍압에 불기둥이 찌그러졌다.
공중에 떠 있는 누군가가 마도구로 바람을 생성하고 있었다.
“자네트, 멀뚱히 있지 말고 도와!”
쿼리의 목소리였다. 자네트는 결계 밖으로 뛰쳐나가 불기둥에 다가갔다. 힘을 합친다면 불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꺼야만 했다.
저 화염조차 이기지 못한다면 애쉬에게 승리할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테니.
자네트가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공기의 흐름에 맞춰 마력을 몸 밖으로 흘려보냈다. 서로 다른 성질의 마력이 어우러지자 불기둥이 압력을 받아 얇아졌다. 규모가 줄어들면서 불길이 회전했다.
숲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태풍 같은 바람에 휩쓸린 나무들이 꺾이고 뽑혔다. 자네트는 날아가지 않으려고 땅에 엎드렸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나무 한 그루가 회오리의 중심으로 굴러갔다. 중간에 자네트가 있었다.
“아가씨!”
“자네트!”
먼저 달려오는 건 세실이었으나 블랙이 빨랐다. 그는 큰 독수리가 되어 자네트를 낚아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뭐 하는 거야! 돌아가, 블랙!”
자네트는 공중에서 바라보아야만 했다. 굵은 나무에 세실이 치이는 모습을. 높게 떠오른 몸이 힘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퍽, 하고 터지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그 소리만은…….
“알겠으니 버둥대지 마!”
블랙이 하강했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자네트는 세실에게로 달려갔다.
불기둥을 잠식한 바람이 사그라들어 주변이 고요했다. 소음은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세실!”
기력이 쇠한 탓에 휘청였다. 땅으로 엎어져 손바닥과 무릎으로 세실이 있는 곳까지 기어가야 했다.
“눈 좀 떠봐, 응?”
세실의 상태는 심각했다. 비틀린 팔다리와 밑에 고인 피. 경련하는 눈꺼풀과 색색거리는 숨소리.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호흡이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괜찮아. 치료할 수 있어. 마녀의 서재에 있는 의술서와 약초 도감, 치료술에 관한 마도서를 전부 탐독했으니까.
“아가씨.”
훅 불면 날아갈 홀씨 같은 음성이었다. 자네트는 세실의 입가에 얼굴을 바짝 댔다.
“말하면 폐가 아플 거야. 조금만 참아. 내가…….”
“제가 안 했…….”
“믿어. 넌 아무 잘못 없어. 다그치고 화내서 미안해. 내가 잘못한 거야.”
손을 포개 잡자 세실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가씨…… 곁에서, 행복했어요.”
“왜 떠나가는 사람처럼 말하는 건데. 마지막인 것처럼 말하지 마!”
“…….”
“너는 살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반듯이 눕힌 세실 위에 살포시 양손을 얹었다. 주문을 외자 출혈이 심한 곳부터 피가 멎었다.
치료술이란 마력 소모가 빠르지만 연계하여 사용할수록 효력이 증폭되는 주술.
자네트는 잇따라 주문을 외면서 그다음에 써야 할 주문을 떠올렸다. 감각을 둔화시켜 고통을 줄여주고, 부러진 뼈를 맞추고…….
돌연 기침이 나왔다. 꿀렁이며 올라온 것이 있었다. 뱉고 보니 핏덩어리였다.
“그만해라. 마력이 고갈되면 네 목숨까지 위태로워.”
두 손이 세실에게서 억지로 떨어졌다. 자네트는 제지하는 손길을 뿌리치곤 하던 것을 마저 하려고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블랙의 짓이었다.
“너를 지키는 게 내 역할이다.”
주문을 욀 수 없다면 술법을 쓰면 될 일. 자네트는 핏덩어리를 짓이긴 후, 피가 묻은 손가락으로 세실의 가슴에 원을 그렸다.
그 순간, 날숨을 뱉으며 나는 파열음.
“안심해. 나 여기 있어. 얼른 낫게 해줄게.”
세실의 눈 깜박임이 느려졌다. 그녀가 목소리를 쥐어짰다.
“자네트…….”
……아가씨.
끝맺지 못한 말은 세실의 숨과 함께 흩어졌다. 바람에 실려 아득한 곳으로 사라졌다.
“세실? ……아니지? 눈 떠, 세실!”
자네트가 그녀의 핼쑥한 뺨을 감싸 만졌다. 세실의 감긴 눈에, 콧날에, 입술에 눈물이 떨어졌다.
질 나쁜 악몽인가. 나를 흔들어놓으려는 애쉬의 농간인가. 이건 환각이고, 진짜 세실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닐까.
현실을 부정하던 자네트가 늘어진 몸뚱이를 보듬었다. 온기도 촉감도 친숙했다. 세실이 틀림없었다.
부르르 떨리는 입술에서 울먹임이 비어져 나왔다. 그것은 이내 통곡으로 변했다.
“아휴, 뭔 난리래. 애쉬의 마력이 느껴져서 와봤더니만 걘 코빼기도 안 보이고.”
잔불을 진압하고 온 쿼리가 투덜대며 착지했다.
“넌 왜 눈물을 짜고 있니? 그 앤 또 뭐고.”
뒤돌아본 자네트의 눈빛이 섬뜩했다. 혼이 빠져나간 듯하면서도 이글거렸다.
쿼리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자네트가 뛰어들어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다.
“쿼리 님.”
“자, 잠깐! 피범벅이잖아. 나한테까지 묻히지 말란 말이야!”
“되살리는 법을 말해줘요. 언데드로 만드는 법 말고, 온전히 부활하게 하는 주술을 알려주세요.”
“고위 소생술은 애쉬만 쓸 수 있거든?”
쿼리는 몸부림치다가 포기했다. 뭐라도 알려주지 않으면 자네트가 몇 날 며칠이고 엉겨있을 것 같았다.
“오르쿠스 님께 호소해 봐. 그 애의 영혼을 내어달라고. 아니면 보물고에 있는 황금 보주를 달라고 하든지. 한 번 죽은 이를 되살리는 물건이니까.”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어요?”
“문을 열어줄게. 대신 갔다 오면 네 머리카락을 나눠줘. 이번에 만들 마도구에 필요한 재료거든.”
블랙이 끼어들었다.
“죽음의 신은 냉엄한 원칙주의자야. 산 사람이 지하계에 발 들이는 걸 달가워할 리 없어.”
“그래도 갈 거야.”
결단한 자네트를 말릴 수 있는 자, 아무도 없었다.
“넌 잠자코 따라오기만 해.”
자네트가 눈물과 콧물, 그을음이 묻은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과격한 손길에 절망감도 씻겨 내려갔다.
그동안 쿼리는 지하계로 가는 문을 냈다.
“자, 혹시 모르니까 가져가. 내 저서는 모두 읽었겠지? 그럼 사용법을 알 거야.”
“세실을 부탁해요. 금방 돌아올 테니.”
작은 주머니 두 개와 흰 광물 조각. 쿼리의 발명품들을 받은 자네트는 문에 다가섰다. 까마귀가 자네트의 어깨에 올라앉았다.
문이 서서히 열렸다.
***
마지막 언데드를 처리한 루웰은 주저앉았다. 실력이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지칠 만한 상황이었다.
어림잡아 백 명. 숨을 몰아쉬며 쓰러트린 적의 수를 세다가 손에 쥔 무기를 내려다봤다. 얼리는 능력으로 언데드를 일격에 해치울 수 있게 한 검.
그 검에 매달아 놓은 솔방울이 사라졌다. 싸우면서 떨군 듯했다. 루웰은 얼굴을 쓸어내리곤 일어섰다. 바닥을 살피며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이곳은 마을이었다. 언데드를 토벌하다 보니 오게 되었는데, 산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 주민은 한 명도 빠짐없이 언데드로 전락한 것이었다.
‘이 일을 알려야 한다.’
갈림길로 돌아가려는 순간 밤하늘이 붉은 기를 띠었다. 굉음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루웰은 동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종말의 도래. 멀리 보이는 광경을 묘사하라면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
지하계의 초입은 음습한 굴이었다. 양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검푸른 불덩이가 내부를 밝혔다.
자네트는 침을 삼키곤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뛰었을까.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콧마루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
액체에 닿은 피부가 따끔했다. 얼른 손가락으로 닦아내자 바늘로 콕콕대는 듯한 통각이 옮겨갔다.
“옷에 닦아야 아픔이 멈출 거다.”
블랙의 말대로 손가락을 옷에 비볐더니 통증이 없어졌다.
“물이 아니었어?”
“여긴 참회의 길이고 위에서 떨어지는 건 눈물이다.”
“눈물?”
“네 행동으로 불행해진 자들이 흘린 눈물이지.”
두 다리가 차츰 속도를 늦췄다. 멈춰선 자네트는 손바닥을 위로 뻗었다. 한두 방울 물이 떨어졌다.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린다.
“죄의 산물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