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버그린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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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버그린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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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1. 황금의 땅 (2)
12. 비밀
13. 빙설과 저주
14. 악몽 같은 자정일지라도 (1)
포에버그린 4권
11. 황금의 땅 (2)
“물론 알죠. 우리를 연결해준 사람이 유르카인 후작이잖아요.”
“아는 분이 이런 곳에 데려온단 말이에요?”
샤디예가 어깨를 으쓱했다.
“문제 될 게 있나요?”
알튼의 문화와 결혼관은 이그나르와 전혀 달랐다. 고대 풍습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채로 지속해왔다. 그 차이를 인지하고 있으니 샤디예의 사고도 존중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그나르인으로서 야만적이라느니, 도덕적이지 못하다느니 욕할 입장은 못 되었다. 제국이라는 위명에 지워진 추악함을 생각한다면.
그래도 자네트는 화가 났다. 외무대신이란 직함은 장식이 아닐 터. 저보다 박식한 사디예가 존중을 보여주지 않아 불쾌했다.
자네트가 이를 악물었다.
“비키세요.”
분위기가 심각했다. 벨로아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기억 저편으로 밀어 넣고 두 여자를 중재하려 했다. 그때 신경전이 허무하게 끝났다.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누구?」
반라의 남자가 다가와 자네트와 벨로아를 훑어보았다. 관찰당하는 기분에 자네트가 턱을 들었다.
가까이서 본 그는 루웰과 비슷한 나이 같았다.
「끼어들 때인지 아닌지 분간하지 못하나? 이 바닥에선 눈치가 빨라야 눈감는 날까지 무사할 수 있을 텐데.」
「걱정 없어. 난 목숨이 여러 개라서 말이야.」
냉기를 휘감은 말에도 남자는 키득거렸다.
「……계속 그러고 서 있을 셈은 아니겠지? 저 담요로 몸을 가리든지 해.」
닝고르산맥에서 불어오는 북풍보다 싸늘한 어조였다.
벨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추위를 탈 기온이 아닌데 오한이 들었다.
자네트가 알튼어를 구사했다는 것은 뒤늦게 깨달았다. 서툴다고 했었건만 일상생활이 문제없을 수준이었다.
생각해보면 준비성 철저한 성격에 배우지 않았을 리가 없다. 곧이곧대로 믿은 벨로아가 순진했다.
자네트는 명분을 만들어준 것이리라. 앵무새가 새장 밖으로 스스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드러내지 않는 배려가 그녀의 방식임을 벨로아는 다시금 실감했다.
자네트는 좋은 사람이다. 싫은 것에 관한 표현이 확실해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지는 않지만, 뭐 어떤가.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이 되레 애쓰는 일만큼 피곤하고 어리석은 것도 없는데.
벨로아는 그 불가능한 일에 매달렸다가 회의감만 얻었다. 그런데도 놓지 못했다.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었던 건 자네트 덕이었다.
벗이자 은인.
누가 뭐래도 자네트는 벨로아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오해받을까 봐 염려스러웠다.
경계심이 많을 뿐, 적대하는 게 아니다. 벨로아는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끼어들기로 했다.
「저 땍땍거리는 여잔 뭐하러 데려왔어?」
투덜거림이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 벨로아는 개입하려다 말고 남자를 봤다.
담요로 상체를 가린 남자가 삐딱한 자세로 샤디예를 째려보고 있었다.
「미리 감사 인사를 해두세요. 슐레트 님께 길을 열어줄 사람입니다.」
남자가 의아한 눈빛으로 샤디예를 응시했다. 의아한 것은 자네트도 마찬가지였다. 샤디예의 발언과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류층에서도 밑바닥일 터인 남자에게 깍듯하다니.
두 사람의 관계를 유추하려 할수록 생각의 타래가 뒤엉켰다.
자네트가 여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왕을 알현할 때부터 쌓인 피로감이 두통으로 몰려왔다.
“참는 데 한계가 있어요. 이만 말해주세요. 저희를 여기 데려온 이유.”
샤디예에게 한 발짝 다가선 자네트가 말했다. 예삿일이 아니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 * *
안쪽 방은 생각했던 광경과 달랐다. 외관에 비해 쾌적하고 고급 가구가 놓여있었다.
무엇보다 침대가 없었다. 저택 응접실에 온 듯했다.
“……눈속임이군요.”
외무대신씩이나 돼서 만난 지 얼마 안 된, 심지어 지인에게 부탁받은 사람을 음지로 데려올 만큼 몰상식할 리가.
자네트는 안도하며 소파에 앉았다. 오해가 풀리니 궁금증이 생겨났다.
비밀기지. 그곳에 은둔한 남자. 그와 사연이 깊은 듯한 고위 관료.
답은 뻔했다. 반역 모의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설마 그런 일에 끌어들일까. 긴장 풀어요.”
속이 훤히 보인다며 샤디예가 실소했다.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곳이 여기뿐이에요. 아까 말했죠? 말을 조심하라고.”
설명이 부족했다. 자네트는 미간을 찌푸려 그 뜻을 밝혔다.
“아크바는 지금도 존재해요. 왕궁 깊은 곳에서 알튼 전역을 살피죠. 한 곳을 제외하면요. 여긴 오래전 오르쿠스의 신전이 있던 땅이라 아크바의 힘이 닿지 않아요.”
비타와 오르쿠스. 쌍생인 두 신은 사이가 좋지만, 서로의 힘은 그 반대였다.
자네트가 끄덕였다.
“납득한 것 같으니 옛날이야기를 하나 들려줄게요.”
과거를 회상하는 샤디예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왕이신 아메트 4세 곁엔 수많은 여인이 있었어요. 그중에 아내로 인정받지 못하고 내쳐진 여자가 있었죠. 노예는 왕족이 될 수 없으니……. 아들은 궁에 남을 수 있었지만 이름조차 받지 못했어요.”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눈에 선하네요.”
“그나마 기댈 곳이 있었어요. 왕의 아내 중 한 명이 보살펴줬거든요. 평민 출신에 자식도 없어서 자기 아들이라 생각할 모양이었는지.”
샤디예가 살벌한 왕궁에도 인정 넘치는 사람 하나쯤은 있다며 미소 지었다.
“아무튼, 내가 열네 살에 입궁했을 때 그 남자애를 처음 봤어요. 비쩍 곯은 꼴을 보곤 왕궁 노예인 줄 알고 며칠간 실컷 부려 먹었죠. 반항적인 눈을 하고서도 시키는 일은 다 해냈어요.”
궁에 불려와서 저명한 천문학자의 제자가 될 만큼 영특한 나도 몰랐었지. 그 아이가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증오를.
샤디예는 혼잣말하듯 자조했다.
“내가 천문학자로서 이름을 날리고 관직에도 올랐을 때 우리는 다시 마주쳤어요. 그는 여전히 이름 없는 왕자였지만 분위기가 달라졌었죠. 세상을 발아래 둔 정복자 같았달까. 기묘했어요. 몇몇 왕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가고 아메트 4세도 쇠약해졌을 때라.”
왕좌를 둘러싼 암투인가. 자네트는 진부한 상상을 하며 귀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권 다툼이 벌어졌어요. 딱 삼 일이었지만.”
“짧네요.”
“신의 계시가 있었으니까요. 몇 세기가 지나도록 계승에 관여하지 않던 아크바가 날아와, 그의 머리 위를 맴돌았어요.”
“……그 사람이 아메트 5세군요.”
샤디예가 끄덕였다.
“그분은 왕좌를 위협할 이들을 숙청했어요. 피바다였죠. 계승권이 있는 십여 명, 그 어머니와 가문까지 포함하면 거의 백 명에 달했으니까. 그 후에 그분은 스스로 아메트라고 칭했어요.”
아버지로부터 이름을 받지 못한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다니. 아이러니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자네트는 그러한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메트 5세란 이름이 곧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므로. 출신에서 비롯된 열등감으로부터 그 자신을 지키는 방패막이 되므로.
자네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 남자, 아니, 슐레트 님은 용케 살아남으셨군요. ……호아킨의 아버지도.”
“아메트 5세를 보살폈던 여자가 슐레트 님의 어머니세요. 당시 갓난아기였던 슐레트 님을 살리는 대신 돌아가셨죠. 그리고 구젤은……. 구젤의 어머니가 내 천문학 스승이셨어요.”
샤디예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전하께선 내가 곁에 있기를 바랐고, 난 남매처럼 지내던 구젤이 무사하길 바랐어요. 스승님에 이어 구젤까지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거래했죠.”
알현실에서의 불손한 태도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게 된 자네트는 숙연해졌다. 자유분방한 영혼인 줄 알았건만, 샤디예는 견고한 감옥에 갇힌 존재였다.
“궁금증을 풀어주신 건 감사해요. 하지만 샤디예 님의 의도를 모르겠어요. 외부인한테 늘어놓을 만한 이야기는 아닌데요. 대체 저한테 무얼 원하시길래.”
자네트가 바라보고 있던 입술이 휘었다.
“이래서 영리한 사람이 좋아. 빙빙 돌려 말해도 말귀를 알아듣는다니까?”
“알고 있는 사실이니 구태여 말씀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입담으로 제 혼을 빼놓을 생각일랑 마시고, 용건을 말해주세요.”
“그래요, 내가 졌어.”
샤디예가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부탁이요?”
“돌아갈 때 슐레트 님과 같이 떠나줘요. 알튼만 벗어나게 도와준다면 나머지는 호아킨이 알아서 할 거예요.”
“당황스럽네요.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는데요.”
“그거야 내가 혼자 세운 계획이니까요.”
샤디예의 발언은 슐레트도 모르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의구심이 들었다. 들려준 이야기에 거짓 한 점 없는지. 죽일 수도 없고 내버려 둘 수도 없는 골칫덩이 왕족을 처리하려는 게 아닌지.
샤디예가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일지도 모른다. 과한 생각일까.
일단 의심하고 보는 성격 탓에 자네트의 마음속에는 불신감이 만연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산 세월이 길었다.
“슐레트 님도 떠나길 원하실까요? 왕좌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으세요?”
슐레트가 야망이 있어 보이는가. 절대 아니었다. 자네트는 잠깐 보고도 그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철없고 나태하고 무기력한, 우물 안 개구리. 그 우물조차 넓다고 여겨 위로 뛰어보지도 않고 현실에 안주하는 타협주의자.
자네트가 그였다면 허름한 곳에 살면서 대낮에 일어나지는 않을 터였다. 자신이 왕의 핏줄임을 알게 된 날, 마음속에 본래 자리를 되찾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을 테니까.
그날로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골몰하고, 기어이 해냈을 테니까.
“서로 아는 사실을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겠죠.”
샤디예가 자네트의 표현을 빌려 빈정댔다. 떠보느라 괜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
“밑지는 장사는 아닐 텐데요. 알튼의 외무대신이자 대륙 제일의 천문학자한테 빚을 지울 기회잖아요.”
부탁하는 사람은 샤디예인데 그녀가 더 당당했다.
“좋은 정보를 하나 줄게요. 사나트가 어떠냐고 아메트 5세께서 물으신다면 소신껏 답하세요. 사실대로.”
“무슨 의미인가요?”
“외국에서 온 손님한테 여행은 잘했는지 묻는 건 의례적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흘려들어선 안 되지요. 하나라도 얻어가고 싶은 게 있다면.”
며칠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며 샤디예가 일어섰다. 그녀는 여유만만했다.
“유념해요. 전하께서 솔직한 이를 총애하신다는 걸.”
* * *
그날 이후 벨로아는 자진해서 샤디예를 따라다니느라 바빴다. 방에 늦게 돌아오거나 밤을 지새우고 돌아왔다. 그만큼 천문학 공부에 열의를 불태웠다.
코델리아를 비롯한 운송부 일행은 알튼 남부로 떠났다. 황금 독수리상을 실물로 보고 싶다는 이유로.
상황이 그러하니 자네트는 귀빈실에 틀어박혀 쉬었다. 체력을 회복하지 못했거니와 바깥공기가 삭막했다. 온종일 감시당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샤디예의 말을 듣지 않았었다면 좋았을 것을…….
말수가 적어지고 행동도 조심스러워졌다. 창틀을 넘어 날갯짓 소리가 들어오면 가슴이 철렁였다. 아크바일 리 없는데 말이다.
수도사처럼 지내기를 며칠째. 자네트는 루웰을 데리고 왕궁을 나섰다.
“지금쯤이면 도착했겠군요. 알튼에 도착하기 전부터 다들 대륙 최남단 절벽을 밟고 오겠다고 성화였으니 거긴 시끄러울 겁니다.”
“경도 따라가지 그랬어요? 여기 있는 것보다 즐거울 텐데.”
“주인을 두고 어딜 갑니까. 본분을 내팽개칠 생각은 없습니다.”
자네트가 미약하게나마 웃었다. 한가로운 오후, 유속이 느린 강에 떠다니는 물비늘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기쁨을 자아내는 미소였다.
“오늘 루웰 경은 기사가 아닌 동행인이에요. 치안이 좋은 곳이니 마음 편히 구경하도록 해요.”
알튼은 이그나르보다 신분제가 엄격했다. 전쟁 포로를 가축처럼 취급했던 구시대. 그때 관습이 여태 대물림되었다. 노예를 합법적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증거였다.
죄를 저질렀을 때의 처벌도 낮은 계급일수록 가차 없었다. 신분이 높은 자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사형이었다.
그렇다 보니 사나트에서는 도둑질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골목마다 나앉은 사람이 있지만 구걸하려고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