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버그린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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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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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08. 자유와 상인의 섬 (2)
09. 뿌리칠 수 없는 운명
10. 인생의 변환점
11. 황금의 땅 (1)
포에버그린 3권
08. 자유와 상인의 섬 (2)
“내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폐하께서 귀공을 잡아둔 이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아스카르 대공은 관직이 없을뿐더러 정치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겉으로는 국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배움이 짧은 평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스카르 대공은 황족이고 제국에서 하나뿐인 작위를 받았다. 드넓은 영지를 다스리고 부유했다. 전쟁 영웅이기도 했다.
그런 높으신 분이 나라를 주름잡지 않는다면 누가 권력자란 말인가.
사람들은 황제보다도 아스카르 대공을 우러렀다. 황제에게 없는 것이 아스카르 대공에게는 있었다.
바로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
비극적인 태생, 불행한 유년기, 전장의 총지휘관으로 보낸 성장기, 전쟁 속 성년식, 국민 영웅.
아스카르 대공이 걸어온 길 자체가 영웅담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광적으로 존경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감정이란 덧없는 것이어서 하루아침에 바뀔 때가 많았다. 성녀라 칭송받던 여자가 마녀로 몰려 죽임당하는 경우처럼, 존경심에서 적개심이 태어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삶이 어려울 때 사람들은 황제보다 아스카르 대공을 원망하리라.
합리적이지 못한 사고방식이지만, 그들이 사실을 보려고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스카르 공이 황궁에 있는 건 좋지 않아요. 재상은 귀공이 토지세 인상을 찬성했다고 말을 만들어낼 거예요.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고도 남을 작자예요.”
테이블보를 그러쥔 황후의 손이 경련했다. 창백한 손등에서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아스카르 대공은 희게 질린 손가락을 보다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황후를 시실리아라고 불렀던 때로 돌아간 듯이.
“콧잔등에 주름졌습니다. 황후께선 항상 그 뒤에 울음을 터뜨리셨는데……. 또 우시렵니까?”
아스카르 대공이 테이블 중앙에 놓인 접시를 황후 쪽으로 밀었다.
“드시고 표정 푸십시오. 어릴 적에 좋아하셨잖습니까.”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군요.”
접시를 내려다보던 황후는 향수에 젖었다.
처음 제비꽃 설탕 절임을 먹게 된 때가 열세 살. 어느 연회에서 아스카르 대공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
별명이 울보 씨씨였던 만큼 시실리아는 툭하면 울었다. 여린 마음이 또래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다. 어른들은 뒤에서 불길한 아이라고 수런거리기 바빴다. 한집에서 사는 조부모마저 시실리아를 냉대했다.
마차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 그 낙인이 시실리아를 외톨이로 만들었다.
그날 연회에서도 시실리아는 홀로 남겨졌었다. 눈칫밥을 먹고 자란 아이는 마음 놓고 있을 곳을 찾아 야외 정원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발목을 접질려 넘어졌다. 불편한 신발이 문제였다. 다친 곳이 시큰거리자 서러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거기 누구 없어요?”
시실리아는 울먹이며 도움을 청했다. 사람 목소리 대신 부엉이의 울음만 들려왔다.
서러움이 배로 늘었다. 어두운 정원을 살피는 사용인 하나 없는 것에 피해망상이 밀려들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 대부님도 실은 내가 귀찮을 거야. 미울 거야. 베로니카 성에 초대받았어도 오지 말아야 했어.’
시실리아는 울보 씨씨가 되어 흐느꼈다.
그때 풀숲에서 무언가가 바스락거렸다. 튀어나온 불빛은 떠다니는 유령 같았다.
시실리아는 놀라서 입을 막았다. 자꾸 울면 유령이 잡아간다는 유모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유령으로 추정되는 불빛이 가까워질수록 아랫배가 짜르르했다.
‘혹시라도 실수하면 어쩌지?’
두려움밖에 없었던 마음속에 창피함이 들이찼다. 울보에 이어 오줌싸개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간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터였다.
시실리아는 몸을 움츠리며 배뇨감을 참았다. 이대로 유령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새끼 고양이가 숨어든 줄 알았더니만, 베로니카 공의 종손녀였군.”
시실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불빛은 유령이 아니라 등불이었다. 등불을 든 남자는 쭈그려 앉아 시실리아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초상화로 익히 봐온 얼굴과 마주한 탓인지 시실리아는 안심했다. 처음 만난 상대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날아갈 만큼 큰 소리였다.
“울보 씨씨라더니, 울음소리 한번 우렁차구나.”
비꼬는 말을 수차례 들어봤으나 다른 느낌이었다.
시실리아는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용기를 얻어 찢어질 정도로 입을 벌렸다. 속앓이하며 쌓아놨던 설움을 해소하니 후련했다.
울다가 힘에 부친 시실리아는 남자의 목에 매달려 딸꾹거렸다.
그는 한밤중 소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다그치기만 하는 유모나 대놓고 귀찮아하는 사용인과 달랐다.
시실리아는 생판 남인 그와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눈뜨자마자 본 것을 어미라고 인식하는 새끼 오리가 된 순간이었다.
“다 울었으면 갈까?”
시실리아가 끄덕이자 남자는 그녀를 받쳐 들고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밤공기가 따라 들어왔는지 싸한 기운이 연회장을 뒤덮었다.
시실리아는 난생처음으로 주목을 받았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구석이 제 자리였는데 이 순간만은 달랐다. 모든 이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세상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아스카르 공, 어찌 된 일이요? 혹 시실리아가 무슨 잘못을 한 게요?”
베로니카 공작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다급히 다가왔다.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여읜 시실리아의 대부가 그였다.
“아닙니다. 발목을 다쳤기에 안아 들고 왔습니다.”
아스카르 대공이 옆에 있던 하녀에게 의사를 불러오라 지시했다.
“그렇군. 시실리아, 그만 내려오거라. 폐를 끼치지 말아야지.”
베로니카 공작의 눈짓을 받은 다른 하녀가 다가와 팔을 벌렸다.
시실리아는 뜻을 알면서도 아스카르 대공의 목덜미에 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불호령이 떨어지겠지. 뒤늦게 후회스러워 눈을 꾹 감았다.
“아가씨를 도중에 내팽개치는 건 신사답지 못한 행동 아닙니까. 의사가 올 때까지 데리고 있겠습니다.”
“신사? 귀공이?”
믿기지 않는다는 식의 물음이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무례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언사였다. 시실리아는 의문을 품었다가 이내 이해했다.
베로니카 공작과 아스카르 대공은 황족이기도 하거니와 전우였다고 들었다. 피보다 우정이 진한 사이. 농담을 주고받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노력해볼까 합니다. 얹혀사는 꼬맹이들이 하도 잔소리를 해대서.”
“유르카인 공의 아들과 귀공이 후원하는 아이 말인가? 둘을 데려오면 좋았을 텐데 말이요.”
“학술원도 방학이니 유르카인 후작저로 보냈습니다.”
아스카르 대공이 시실리아를 향해 말했다.
“나이가 비슷하겠구나. 그 애들을 만나고 싶으면 나중에 아스카르 성으로 놀러 와도 좋다.”
“……갈래요.”
시실리아가 말을 더듬지 않고 본심을 말했다. 자신이 말해놓고도 놀라웠다.
“낯을 가리는 아인데……. 못 본 새에 씩씩해졌구나.”
베로니카 공작이 대견하다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잡담은 의사가 도착하고 나서 끊겼다.
의사는 시실리아의 발목에 부목을 대어 처치한 후 돌아갔다. 객실에 시실리아와 아스카르 대공, 조각상처럼 서 있는 유모가 남아있었다.
“주무실 시간입니다. 어서 가시지요.”
시실리아는 유모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미련이 남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치료를 받으며 졸긴 했으나 아스카르 대공과 헤어지기 싫어 눈을 부릅떴다.
시실리아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줄 것이 있다.”
아스카르 대공이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아이들은 단 걸 좋아하던데 너도 그러느냐.”
“좋아해요.”
시실리아는 주머니를 받아들며 고백했다.
그날 무엇을 좋다고 했는지 아스카르 대공은 평생 모르리라. 시실리아는 그래도 좋았다.
황후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접시에 손을 뻗었다. 입 안에서 물러지는 제비꽃. 과거에는 설렘이었고, 현재에는 미련도 슬픔도 아닌 것이 된 설탕 덩어리. 맛은 변함없을 텐데 마음에 따라 달고 쓰다.
황후가 손가락을 털고 찻물로 입을 헹궜다. 고개를 들어 아스카르 대공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는 언제나 속죄하고 있었다.
눈빛으로, 표정으로, 유독 예의 바른 태도로.
“더는 울지 않아요. 씨씨가 아니니까.”
“……미안합니다.”
“아스카르 공을 원망하지 않아요. 나는 그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어요.”
그 일은 운명적이었다. 희극인 줄 알았던 일이 비극으로 끝났기에 더욱.
시실리아는 열아홉 살에 황궁으로 불려 갔었다. 베로니카 공작에게 귀띔받은 바로는 황제가 친히 그녀의 혼처를 정해준다는 것이었다.
결혼 상대는 아스카르 대공. 무지렁이가 아닌 이상 황제의 본의를 알 수 있었다.
시실리아는 고귀한 신분이지만 가문의 힘이 없어 남편을 돕지 못할 여자였다.
황제가 아스카르 대공의 앞길을 막을 패로 시실리아를 택한 까닭은 그뿐이었다.
시실리아는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황궁으로 갔다. 아스카르 대공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성년식 이래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대공 전하도 불려 온 이유를 들으셨겠지.’
그 생각 때문에 아스카르 대공을 만나서는 눈도 맞추지 못했다. 그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루딕, 네게 얼굴을 들 수가 없으나…… 시실리아라면 떠나보낸 황후의 그림자를 지워줄 수 있을 것 같구나. 하나 원래 너와 맺어주려 불렀으니 네가 바라는 대로 하마. 시실리아와 혼인하겠느냐.”
황제는 알현실에서 시실리아의 마음을 산산조각 냈다. 여자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를 주었지만, 그녀의 심장을 도려내 암흑뿐인 구덩이로 던져버렸다.
황제의 말이 진실이었다면 죽도록 비참하지는 않을 터였다. 차라리 황제가 시실리아에게 첫눈에 반해서 혼인을 원했다면…….
그러나 황제는 사랑 같은 말랑한 감정을 품을 자가 아니었다. 황제는 시실리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스카르 대공만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존귀하신 폐하의 뜻이 우선입니다.”
이그나르의 군주인 황제를 거스르는 자, 아무도 없으리.
시실리아는 앉은 채로 기절할 것 같았다. 권력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농락하는가.
황제가 인간의 탈을 쓴 악마로 보였다. 모든 일은 아스카르 대공에게 채워둔 목줄이 건재한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배다른 동생이 여전히 순종적인 개인지 확인하려고.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황제는 아스카르 대공에게 결혼 상대를 강제하여 견제하려 했다. 아스카르 대공이 순순히 따르니 변덕을 부려서 결혼 상대를 빼앗으려 한다.
시실리아는 맞은편에 정좌한 남자를 응시했다. 무엇도 바라보지 않는 눈동자가 공허했다.
내 비극이 당신 비극에 비할까.
왜 나와 혼인하겠다고 주장하지 않았는지 따지기에는, 그를 원망하기에는…….
시실리아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된 인생에 죄책감을 얹고 싶지 않았다.
“지난 일은 언급하지 말아요. 화창한 날에는 밝은 이야기를 해야지요.”
황후가 분위기를 바꿨다.
“유르카인 공이 아마란티아 양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인가요?”
황후는 아스카르 성에 놀러 가 동갑인 로시엔과 종종 어울렸었다. 자네트는 아마란티아 백작 부인의 양딸이므로 가계도상 그녀의 육촌이었다.
황후가 소문에 관심을 가질 만했다.
“글쎄요. 연애사까지는 모릅니다.”
아스카르 대공이 말을 아꼈다.
“아마란티아 양에게 물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친척인데.”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아 만난 적이 없어요.”
“황궁에 초대하십시오. 시녀로 두어도 되고. 말동무가 있으면 적적하지 않으실 겁니다.”
황후가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 올렸다.
“아스카르 공답지 않은 발언이네요.”
“참견이 저와 어울리지 않는 건 압니다. 단지 황후께서 외롭지 않길 빕니다.”
황후가 작은 숟가락으로 차를 저었다. 찻잔 속 소용돌이에 희열이 휩쓸려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폐하께서 정부를 들이셨잖습니까.”
“파빌라 말이지요.”
“그레이엄 공의 사람이다, 교황 성하의 사람이다, 혹은 퀴르톤 자작의 사람이다, 말이 많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