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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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주가 변동 때문인지 회장님 심기가 많이 불편하셨습니다. 게다가 이상한 괴소문과 함께 이사님 이미지에도 타격을 입은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만…….”
오후가 되어 임원회의에 참관했던 아름이 윤성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윤성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넌, 괜찮은 거야?’
연락 한 통 없는 수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윤성은 고개를 번쩍 들어 앞에 서 있던 아름에게 무언가 지시했다.
“아름 씨.”
“네?”
“오전에 B그룹 기사 쓴 기자, 누구죠?”
“한영일보 연예부였습니다. 기자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금일 중으로 포털사이트에 기재된 이사님 기사는 모두 내리는 것으로…….”
“아니, 정정해달라고 해요.”
“네?”
아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윤성을 응시했다.
그는 무언가 결심을 굳힌 듯, 입을 굳건히 다물고 눈을 감았다.
* * *
“야야야! 이거 진짜 대박이야! 진짜 큰 거 터졌다!”
평화롭던 백상그룹 홍보실이 발칵 뒤집혀 버렸다. 김 과장은 호들갑스럽게 기사 한 줄, 한 줄을 읽으며 말했다.
“태윤성 이사님이 직접 인정하셨어. 파혼하실 거래!”
“헐! 이거 진짜 대박이다!”
“어쩐지, 옥상에서 맨날 꽁냥거릴 때부터 알아봤다니까요! 어휴. 얼굴 반반하고 똑똑하니까 넘어갔나 봐! 이사님 취향이 아나운서인가?”
홍보실 직원들은 조심스럽게 속닥거리듯 윤성의 집무실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아름 씨, 아름 씨가 말해 봐. 이수인이랑 친했잖아? 이거 알고 있었지?”
부서에서 살짝 동떨어진 곳에, 윤성의 집무실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아름이 입을 삐쭉 내밀고 어깨를 들썩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손주화 불쌍하다. 그 자존심에 뒤로 넘어가겠네?”
“그러게. 개망신당한 거나 다름없지. 백상그룹에 까인 전적이 그대로 남는 거잖아.”
“이수인 씨랑 친하게 지낼걸.”
직원들이 속닥거리는 것을 유심히 듣고 있던 아름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재수 없는 손주화보다는 이수인 씨가 백번 나은 것 같아요.”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아름을 응시했다.
* * *
-부끄러운 말이지만 집안과 집안끼리의 약속으로 진행되었던 결혼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감정이 따라가는 대로, 제 인생을 걸고 싶은 여자가 생겼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경솔하고 책임감 없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루셨던 최초 기사의 보도 내용은 정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 사람을 선택했고, 그 사람이 저를 따라주고 있기 때문에 공격성 댓글이나 인신공격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을 넘는 사람들은 그에 따른 책임을 묻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분 32초가량의 짧은 인터뷰 영상. 보도자료엔 수많은 댓글이 달려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던 사람들은 수인을 응시한 채 쑥덕거렸다.
“아. 진짜 대단한 남자다. 설마 지금 이거, 이수인 두둔하는 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드라마네. 완전 드라마야.”
“주화 선배 어쩔 거야!”
“난 임자 있는 사람 건드는 애들이 제일 싫어. 꽃뱀인가?”
“야, 듣겠다! 조용히 해!”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수인은 그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태연하게 가방을 챙겼다.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주화는 노트북을 힘있게 노려보며 기사를 읽었다.
‘정신 나갔네. 태윤성.’
완벽한 패배.
완벽한 패자.
주화는 아나운서실을 나서는 수인을 따라 가방을 챙겨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그녀의 앞에서 걸어가는 수인, 그리고 수인의 앞에 서 있는 윤성.
주화는 두 사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주화와는 다르게, 윤성은 지금 이 순간 한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수인이라는 여자.
그 여자는 강한 척 당당하게,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여린 몸을 추스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자. 수인아.”
윤성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나한테 오면 돼.”
또각또각.
수인이 윤성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보란 듯이.
손주화가 보란 듯이 윤성의 손을 잡았다.
“나 괜찮으니까, 두 사람 이야기 더 하고 와요.”
“수인아.”
“나도 오늘은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멀어지는 수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주화가 원망 어린 눈빛으로 윤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안녕. 오빠…….”
사방엔 새하얀 국화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단연 눈에 띄는 노란 프리지어를 품에 안고 납골당에 나타난 수인은 살포시 꽃을 내려놓으며 수형의 영정 앞에 섰다.
“오빠가 좋아하던 프리지어 가져왔어. 하얀 꽃은 거기에도 많을 테니까.”
언제나 늘 그렇듯이, 환하게 웃고 있는 수형을 볼 때면 마음이 너무나도 아려 온다.
수인은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인 채 미소를 지었다.
“오빠. 나 요즘 돈 꽤 많이 번다? 좋아하는 옷도 마음껏 사 입고, 비싼 음식도 먹고, 이사도 할 예정이야. 조금 더 깨끗하고 넓은 집으로.”
『…….』
“근데 오빠가 없어. 오빠가 없더라.”
『…….』
“거긴 아빠랑 엄마랑 다 있으니까 오빠는 적어도 외롭지 않을 거 아니야. 그치?”
참으려 했다.
참으려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수인은 결국 주저앉아 버렸다.
“오빠…… 미안해. 나 더 이상은 힘이 나질 않아. 처음엔 오빠를 위해서, 그 여잘 망치려고 했어. 그래서 태윤성이라는 남자를 이용하고 싶었어. 다 똑같을 거라 생각했어. 죄책감 따위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어. 근데…… 어떡하지?”
『…….』
“날 위해서 전부를 내거는 그 사람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 내가 정말 그래도 되는 건지, 그 남자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오빠, 나 어쩌지? 나 어떡해? 나……. 그 사람 사랑해. 그렇게 되어 버렸어. 미안해, 미안해 오빠.”
『…….』
“그냥, 그냥 나도 다 없던 것처럼 그 사람 옆에서 행복하면 안 될까? 자격 없다고, 벌 받으라고 지옥에 밀어 쑤셔 넣는다 해도 좋으니까 그냥…….”
수인의 가녀린 어깨가 들썩였다.
“내가…… 내가 나쁜 년인 거지? 그런 거지?”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주저앉아 흐느끼던 그녀는 조금씩 감정을 추슬렀다. 눈물을 닦고 천천히, 겨우 일어섰다.
비틀거리던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였다.
전혀 알지 못하는, 단 한 번이라도 마주한 적 없는 낯선 여자가 수인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수인 씨.”
“네?”
“수인 씨 맞죠?”
낯선 여자는 수인을 알아보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깡마른 체구의 여자는 제법 한껏 화려하게 치장했으나 어느 정도 중후한 느낌이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낯선 여자를 응시하던 수인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 * *
“박윤주라고 합니다.”
경기도 어느 한적한 외곽에 위치한 카페.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주위엔 개미 한 마리조차 없을 고요함이었다.
“저를 어떻게 아시고…….”
수인은 잔뜩 긴장한 눈빛이었다.
윤주는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고 수인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참……. 예쁘게, 반듯하게 잘 컸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놀랐죠? 갑자기 내가 나타나서.”
“혹시 수형 오빠 지인이신가요?”
윤주는 ‘수형’의 이름이 나오자 시선을 내렸다. 뭔가 수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수인은 이 상황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중년의 여자. 그리고 그녀의 행동.
수인은 경계 어린 시선으로 윤주의 눈을 마주했다.
“친구라고 해 둘게요. 수형 씨가 그렇게 생각해 줄지 모르겠지만…… 난 친구였다고 생각해요.”
“실례지만, 정확히 어떤 관계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번엔 윤주가 잔뜩 긴장한 듯 보였다.
“수인 씨.”
“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듣고 나면, 아주 힘들어질 테니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윤주는 긴장이 되는지 물 한 컵을 쭉 마셨다.
“최근에 백상그룹 태윤성 이사에 대한 기사를 읽었어요. 그리고 당신의 존재를 알게 됐죠.”
수인은 서서히 굳어가는 몸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얘기가 당신의 복수에 조금이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