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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까이 함께
진양 로맨스소설
우리 가까이 함께
ⓒ진양, 2022
지은이｜ 진양
펴낸곳｜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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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까이 함께
프롤로그
그가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첫 순간은 콜마르(Colmar)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였다.
마음이 붕 뜬 그 기분은 첫눈에 반한다는 상투적인 수사로 표현하기엔 좀 거창했고, 단순히 눈길이 가는 정도의 가벼운 호감이라고 하기엔 한참 모자랐다.
은근하지만 끈질긴 그의 눈길에도 그녀의 시선은 창문 너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기차 밖으로 거뭇한 속살을 드러낸 벌판이 수십 분째 이어졌지만, 그녀는 그 풍경이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분명 한국 사람이었다.
검은 머리칼과 까만 눈동자를 가졌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파리를 방문하는 수많은 여행객 덕분에 자연스럽게 구별하게 된 한국, 중국, 일본 각 나라 패션 스타일의 미묘한 차이 때문도 아니었다.
이 만남을 필연으로 만들고 싶은 그의 강한 바람이 만들어 낸 확신에 가까웠다.
한국인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지금의 이런 달뜬 흥분이라면,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 데 국적 따윈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여희는 그가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열다섯 살 프랑스 소녀와 첫 연애를 시작하던 무렵부터 ‘연애는 상관없지만, 결혼은 꼭 한국 사람과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유일한 가족이자 보호자인 할머니를 사랑했고 기쁘게 하고 싶었기에 늘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면서도 다분히 한국인다운 할머니의 소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을까 하고 종종 생각하곤 했다.
메스(Metz) 역에 정차한 기차는 승객을 내려놓은 뒤에도 한참 출발을 미뤘다.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흘끗 그를 보았고 기차가 파리 동역에서 출발한 후 처음으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기차에 문제가 생겼나 봐요.>
그녀는 말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다 영어로 대답했다.
<전 불어를 못해요.>
그는 재빨리 영어로 다시 물었다.
<여행 오셨나요?>
낯선 사람의 관심을 받자 그녀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스쳤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제스처에는 완곡한 거부의 뜻이 묻어 나왔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가요?>
<콜마르요.>
같은 목적지라는 반가움도 잠시, 그는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뱃속이 쓰릴 만큼 아쉬웠지만 단박에 호감을 느낀 여자의 기억에, 그것이 비록 순간 스쳐 지나가는 한 컷의 이미지라도 불쾌한 남자로 남는 건 원하지 않았다.
기차는 굼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출발할 때와 달리 거꾸로 달리는 기차에 당황했는지 그녀는 몸을 고쳐 앉았다.
하지만 이내 역방향으로 달리는 기차에 적응한 듯 차창 밖의 들판을 빼곡하게 채운 노란 꽃들을 넋을 잃고 응시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걸진 못했지만, 그녀를 향한 시선까지 거두기는 힘들었다.
둥근 이마, 감탄과 즐거움이 섞인 깊고 까만 눈동자, 작은 콧날, 조용히 숨을 내쉬는 붉은 입술, 달아오른 뺨.
단순히 외모로만 본다면 지금까지 그가 만나 온 연애 상대들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눈 안에 한 폭의 그림처럼 담기는 그녀의 가는 실루엣, 창에 코가 닿을 듯 바싹 붙어 앉아 바깥 풍경에 몰두하는 아담한 체구에서 풍겨 오는 사랑스러움이 그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역 플랫폼에 가까워진 기차가 점차 속력을 줄이자 주변 사람들이 부스럭부스럭 짐을 챙기며 하차 준비를 했다.
평일 오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콜마르로 가기 위해 기차에 타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승객 대부분이 빠져나가 널널한 열차 안에 두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제 기차는 종착역인 콜마르를 향해 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 그토록 화창하던 하늘에 거대한 구름 떼가 뭉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사위가 컴컴해졌다.
그때 객차 문이 열리고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 들어와 승객들의 기차표를 확인했다.
많은 좌석이 비어 있었기에 승무원은 금세 두 사람 앞에 섰다.
“어….”
어깨에 걸친 크로스 백을 뒤지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분명 여기 넣어 뒀는데….”
한국말이다.
당황한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스쳤다.
그의 승차권을 확인한 승무원이 몸을 돌려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파리 동역에서 예약한 표를 발권했어요. 그런데 잃어버린 것 같아요.>
<표가 없나요?>
<잃어버린 것 같다니까요. 예매한 내역은 있는데 그걸로는 확인이 안 될까요?>
<그러니까 지금 표 없이 기차를 탔다는 거죠?>
그녀와 승무원 사이에서 영어로 오가는 짧은 대화가 묘하게 어긋나는 것을 지켜보다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슈(Monsieur, 프랑스어로 남성을 높이는 말).>
그녀와 승무원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저분이 표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대신 온라인으로 예매한 내역으로 확인이 가능한지 묻는군요.>
그의 정중한 표현과 매끄러운 불어 발음에 굳어 있던 승무원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예약 내역이랑 신분증을 함께 확인하면 됩니다.>
승무원의 대답에 그의 다정한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여권 있어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던 그녀는 그의 한국어에 놀랄 타이밍을 놓쳐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서둘러 가방에서 여권을 꺼내 승무원에게 내밀었다.
“예약 내역도 같이 보여 줘요.”
핸드폰을 꺼내 이메일을 찾아 뒤지는 그녀의 손길이 바빠졌다.
<메스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나 보죠?>
그는 승무원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시스템이 다운됐다고 하더군요.>
<기차가 콜마르에 연착할까요? 먹구름 떼가 쫓아오는 걸 보니 도착할 즈음 비가 내릴 것 같은데.>
가벼운 잡담을 주고받는 사이 그녀가 원하던 이메일을 찾아서 예매 내역을 승무원에게 보여 주었다.
승무원이 지나간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고맙습니다.”
그녀와는 완전히 가망 없을 거라 생각해 포기했던 그는 다시 이어진 대화가 못내 기뻤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표만 없는 건지, 아니면 사라진 게 더 있는지 다른 물건들도 확인해 보세요.”
파리 어디에서든 소매치기가 기승이었지만 지하철과 기차역의 좀도둑들은 특히 악명 높았다.
순간 해쓱해진 얼굴로 그녀는 자신의 소지품을 확인했다.
다행히 다른 물건들은 그대로인 듯했다.
“표만 어딘가에 떨어뜨린 모양이에요.”
“다행이네요. 다음번엔 혹시 모르니 예매 내역도 출력하거나 캡처해서 다니세요.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좀 더 시골로 가면 데이터 연결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인연을 이어 나가고 싶었던 바람과는 별개로, 경계심이 사라져 무방비한 그녀의 표정을 마주하자 그는 단호한 경고를 해 주고 싶은 충동도 함께 느꼈다.
누가 작은 도움을 주더라도 그게 상대방이 안전한 사람이란 뜻은 아니라고,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언제 누가 돌변할지 모르니 그렇게 한 번의 친절로 마음이 풀어지면 안 된다고.
그는 주제넘은 그 경고를 간신히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한국 사람인 줄 몰랐어요.”
그녀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래요?”
“뭔가 느낌이… 분위기나 스타일이 좀 달라서요.”
“어머니가 한국계 프랑스 분이에요.”
“어쩐지, 그래서 한국어를 잘하시는구나.”
그는 방긋 웃어 보였다.
“한국인의 피가 더 많이 흐르는걸요. 외할아버지만 프랑스 분이셨고, 외할머니와 아버지는 한국인이시죠.”
그는 태어나 열두 살까지 한국에서 자랐다는 이야기까지는 덧붙이지 않았다.
그때 곧 콜마르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녀가 벗어 두었던 겉옷과 가방을 챙기는 걸 지켜보았다.
“저, 그럼.”
아직 기차는 완전히 멈추지 않았지만, 그녀는 가벼운 고갯짓을 인사 대신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객차 출입구 쪽의 선반으로 다가간 그녀는 여행 가방을 꺼내려고 손을 뻗었다.
작고 마른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그가 도와주려고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녀는 엄청나게 커다란 여행 가방을 거뜬히 꺼내 바닥에 바로 세웠다.
기차가 멈춘 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플랫폼 위로 흩어졌다.
그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행 가방을 끌며 걸음을 옮기는 그녀가 그가 앉은 자리의 창가로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지금껏 망설였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빠르게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가로질러 달렸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역사 밖으로 몸을 내밀자마자 빗줄기가 그를 가로막았다.
비를 피하려고 뛰는 이들, 역 안으로 들고 나는 사람들, 마중 나온 이들이 세워 둔 작은 자동차와 우산이 뒤엉킨 프랑스 시골의 작은 역사 앞은 어수선했다.
그는 혼잡함을 헤치며 그녀를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에 머리칼과 옷이 젖어 들었다.
드디어 그녀의 큼직한 여행 가방이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시야에 잡혔다.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불러 세우고 싶었지만, 그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잠깐 그가 걸음을 멈춘 사이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에게서 여행 가방 손잡이를 건네받았다.
여행 가방이 실린 차 트렁크의 문이 닫히기도 전에 그녀는 비를 피하기 위해 택시 뒷좌석에 올라탔다.
몇 걸음 앞으로 내디뎌 봤지만 축축하게 젖은 사람들에게 번번이 가로막혔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 택시가 출발했다.
더 이상 그녀를 쫓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허탈한 마음으로 멀어지는 택시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
내가 바보니?
기차가 출발하고 난 뒤 몇 시간을 쉬지도 않고 쳐다보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너무 뚫어져라 보니까, 민망해서 차마 그쪽으론 고개도 못 돌리고 창밖만 구경했지.
기차가 어떤 역에 멈춰서 한참 움직이지 않았던 거 기억나?
바깥만 보고 있었더니 목이 아프기도 하고 뭔가 호기심이 생기기도 해서 네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는데… 눈이 딱 마주쳤잖아.
첫인상?
음, 아름답다?
얼굴 찌푸릴 것 없어, 그땐 정말 그랬단 말이야.
너를 정면으로 처음 마주한 순간 정말 심장이 멎는 줄 알았으니까.
그렇게 크고 깊은 눈매도, 그렇게 선명하게 붉은 입술도 처음이었어.
얼굴은 소년처럼 해사했지만, 어깨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남자 중에서 가장 넓고 단단해 보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