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7. 공습
18. 사랑한다
19. 나를 잊지 마세요
20. 너의 세상으로
21. 그 여름의 노스텔지어
17. 공습
“휴렌턴이 고향이라고 했지?”
낯선 음성에 릴리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동갑내기인 소피아 허프였다. 서둘러 몸을 돌려세운 그녀는 고개를 자그맣게 끄덕여 보인다. 하여 소피아는 달리 붙이는 말 없이 생긋 웃었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내린 곳은 릴리의 등 뒤로 걸린 풍경화 <프리지어>였다. 흐드러진 봄 풍경 속에 담아낸 프리지어는 이 년 전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한 유명 화가의 작품이었다. 사용인 휴게실로 들어서던 그 순간부터 릴리의 시선은 이 노란 프리지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음…… 그림이라.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고민은 되었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그녀의 멍한 얼굴을 곱씹던 소피아가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두리번거리는 릴리의 손을 낚아챈 소피아는 빈 테이블로 그녀를 이끌었다. 얼굴이 달뜬 것이 제법 당황한 듯 보였음에도 릴리는 소피아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소피아가 이끄는 대로 그녀는 테이블에 착석했다. 맞은편에 걸린 <프리지어>가 무척이나 잘 보이는 가운데 자리였다. 시끌벅적한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릴리는 얕은 침묵을 지켰다.
그저 한 번씩 노란 꽃잎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시선이 전부였다. 릴리와 <프리지어>를 번갈아 살피던 소피아가 슬며시 말을 잇는다.
“그림을 좋아하는구나? 아니! <프리지어>를 유심히 보는 것 같길래.”
“그냥, 조금…….”
짤막한 대답에 당황한 눈을 굴리던 소피아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바로 향수 자극하기! 정말이지 이것만큼은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 그래, 맞다! 휴렌턴에는 프리지어가 많다던데, 정말 그래?”
“응.”
“……그렇구나.”
다시금 낯익은 정적이 흐르자, 소피아는 도망치고 싶어졌다. 자꾸만 제 말을 훔쳐 가 버리는 릴리가 얄미워서다.
낯을 가리는 것인지, 원래 성격이 그러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으므로. 릴리의 초콜릿색 머리카락을 곁눈질하던 소피아가 마른 한숨을 삼켰다.
릴리를 살펴보라던 집사장 밀튼의 지시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결코 오늘과 같은 수고를 감내하지 않았을 터였다. 이건 너무도 일방적이니 말이다. 자연스럽게 친해질 방법도 많은데.
물론 강제된 일은 아니었다. 거절할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은 도와드리고 싶었다. 오랜만에 사람을 들이게 된 탓에 그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않나.
실은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말이 돌았었다. 집사장은 내켜 하지 않았지만, 전하께서 공평하게 뽑으라 하셨다고. 이력과 면접 결과만 놓고 보자면 릴리가 적임자였으나 하필이면 그 이력이 노우드 가에서의 5년인 것이 밀튼은 못내 마음이 쓰이던 모양이었다.
바로 그 사에나 노우드가 황태자의 약혼녀였으니. 밀튼은 황태자와 관련된 모든 것을 병적으로 기피했다. 사용인 또한 예외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가 업어 키운 전하의 뜻이라는데. 그저 따를 수밖에.
릴리는 결국 채용되었고 집사장의 얼굴에는 잔주름이 몇 개 더 늘었다. 걱정거리 하나에도 몸과 마음이 쉽게 상할 수 있는 나이였다. 저택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서라도 오래 건강하셔야 하니까.
밀튼의 근심 많은 얼굴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하니 별수가 없다. 부지런히 또 릴리를 살펴보아야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피아는 릴리가 싫지 않았다. 나이 많은 부인들과 언니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처음 갖게 된 동갑내기였기 때문에. 밀튼이 신경을 기울이는 일 년을 보내고 나면 서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꺼내 들 말을 고민하는 소피아의 얼굴이 자못 진지했다. 제가 아는 그림들을 다 늘어놓을 참이었다.
릴리 또한 밝고 상냥한 소피아가 싫지 않았다. 따지고 들자면 오히려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으므로 밖에서 만나게 되었다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으나 그뿐이다. 한가하게 친구나 사귀기 위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저는 이곳에서 해야만 할 일이 있지 않던가. 매일같이 사에나의 독촉이 이어지고 있었다. 종알종알 떠드는 소피아의 목소리 위로 그녀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새어 든다. 깊은 밤과 함께 스미던 냉엄한 음성이었다.
―아직이니?
―죄송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참을성이 그리 좋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가씨. 서두르겠습니다.
―죄송하다는 소리도 슬슬 지겹구나. 대공이 집을 비웠다며. 무엇이든 내게 가져와.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겠어?
무엇이든 가져오라던 사에나의 엄포가 내내 릴리의 목을 졸랐다. 대공이 돌아오기 전까지 알아내야만 했다. 비록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말이다. 겨우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릴리는 어느 때보다도 초조하였다.
대공과 관련한 것들은 전부 집사장의 손을 거치고 있던 터라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용인들도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직까지는 집사장의 경계 또한 대단했다.
어디서든 저를 살피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대공의 공간인 2층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소피아가 이것에 대해 귀띔해 주기는 하였다.
―절대로! 널 싫어하셔서 그런 건 아니야. 대공가의 사용인들이면 전부 다 겪었던 과정이거든. 처음 들어와서 일 년 정도는 2층에 출입할 수가 없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일 년이라니. 때문에 처음에는 눈앞이 노랗게 보이던 것도 사실이나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릴리는 무엇이든 해야만 했고, 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피아의 호의 따위는 가볍게 저버릴 수 있을 정도로.
어차피 그녀 또한 저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집사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쯤은 진작부터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편치 못한 것은 소피아의 진심 때문일 것이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도 저를 도와주는 마음만큼은, 오직 저를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그림 이야기를 떠드는 마음만큼은, 전부 다 진심일 테니.
때문에 거리를 두고 싶었다. 이 정도의 호위만 저버릴 수 있도록. 부디 제가 더 큰 호의를 저버릴 일이 없도록. 그녀는 슬그머니 테이블 아래에 숨긴 두 손을 그러쥔다. 희게 웃는 소피아의 얼굴 위로 릴리의 착잡한 시선이 내려앉았다.
* * *
바다 사나이는 앞으로도 미신을 떨쳐 내지 못하게 되었다. 폭풍우가 치는 바다만큼이나 사나운 꿈자리의 예감은 좀처럼 빗나가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윌터는 무척이나 심각한 얼굴로 차창 밖 풍경을 바라다보았다.
사위가 포탄의 화염으로 물들고 바로스로 떠난 마커스와 바즐이 붉게 물든 땅 위를 헤매는 꿈은 당연하게도 길조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빗나가기만을 바랐는데. 그는 종이처럼 버석해진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긴급> 서명과 함께 날아든 두 사람의 급보가 꽤 심각했다. 오죽 급했던지 시범 비행 중이었던 신형 순찰기 Lis-60과 연락하여 곧바로 실어 보낸 터였다. 하여 새벽녘에 날아든 급보는 지금 윌터의 품 안에 들어 있었다. 이것이 윌터가 동이 채 트기도 전에 황궁으로 향하게 된 이유였다.
조용히 담배를 꺼내든 그는 어쩐 일인지 불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한참이나 손을 떨었던 탓이다. 금세 불을 붙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군인이자 제독으로서 운전수에게는 결코 보여선 안 될 모습이었다.
그는 차창 너머로 쏟아지는 새벽바람에 제 한숨을 숨겼다. 어느 때보다도 깊고 낮은 숨이다. 어느덧 여명이 밝아오고 밝아 오고 있음에도 윌터를 덮친 것은 공포와 상실감이다. 전부 다 잃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끼는 수하이자 전우들을 전부 다.
“…….”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이른 시일 내에 사지로 나서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제 수하들이 선 곳은 이미 사지 위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야만 한다. 결코 전우의 가정에 전사 통지관이 찾아가는 일이 없게 하리라.
훌륭한 지휘관이란 부대원들의 목숨값을 아는 이다. 하여 모든 대원을 아끼고 마땅히 보답해야 한다. 윌터 또한 그런 지휘관인 터였다. 윌터의 눈빛은 이미 전장에 선 것처럼 서늘하다. 담배를 구겨 넣으면서 그는 준엄하게 말했다.
“끝까지 밟게.”
“네, 알겠습니다.”
단숨에 속도를 높인 자동차는 텅 빈 대로 위를 마치 전투기처럼 뻗어나갔다. 급보로 띄워진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급보>
날짜: A913 0902
보내는 이: 마커스 코헨 대위, 바즐 애플턴 대위.
받는 이: 윌터 스미스 제독.
긴급히 전달합니다. 바로스의 무기상들이 일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당장 연구원들의 귀국 조치가 필요합니다. 추가 정보는 곧이어 전달하겠습니다.
* * *
급박한 상황에 레오폴드는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했다. 잠들었던 차림 그대로에 로브만 걸친 상태였다. 급보를 마주한 황제의 표정이 싸늘했다. 적막에 휩싸인 프라이빗 룸안에서 그의 엄중한 목소리만이 내릴 뿐이다.
연구원들의 즉각적인 귀국 명령이 떨어짐에 따라 잠수함에 곧장 출항 지시가 전해졌다. 또한 바로스 현지에 파견할 장교들을 추리라는 엄명이 이어졌다.
“한 시간 안으로 준비를 마치게. 최대한 서둘러야 하네.”
“네, 폐하.”
서늘한 레오폴드의 얼굴 위로 깊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무거운 한숨을 삼키며 묻는다.
“가장 위험한 곳이 어딘가.”
“바로스 현지와 서해 연안입니다.”
“……그렇군.”
“그렇습니다.”
찰나의 침묵에 황제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때문에 윌터는 이만 말을 줄였다. 초계 활동 중인 카일의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은 까닭은 아들을 사지로 보낸 그 마음이 어떠할지, 감히 헤아릴 수가 있어서였다.
윌터 또한 아버지였으므로, 자식을 둔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도 결국에는 아버지이지 않나. 순간 떨리던 레오폴드의 손이 설핏 눈에 들어왔다. 담담해지려 애쓰는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라이즈웰 소령은 교전을 피하지 않을 테니, 지금이라도 장갑순양함을 배치하지.”
제 아들을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한마디 한마디에 눌러 담은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던 터라 윌터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세상이 카일과 황제에 관해 떠드는 것들은 전부 다 틀린 것이다.
그는 언제나 아들을 사랑했고, 언제나 아들 걱정했다. 우연한 기회로 마주하게 되었던 레오폴드의 기도를 윌터는 잊어 본 일이 없다. 교회 바닥에 납작 엎드린 황제가 바라던 것은 하나뿐이었다.
―일평생을 당신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또한 죽어서도 당신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내 아들을 무사히 돌려주세요. 제발.
사무치게 처절했던 그 목소리는 평생 가도 잊지 못할 듯하였다. 결국에는 소파 아래로 숨겨버린 레오폴드의 손이 애달팠다. 그간 황제가 얼마나 카일을 제대시키고 싶어 했는지는 윌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세상천지에 매번 최전선의 사지로 자식을 앞세우고 싶은 아버지는 없음을. 그는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라이즈웰 소령과 L-11은 보로레오섬 시찰을 마치면 곧바로 귀환할 예정입니다.”
“알았네. 계속 보고 부탁하지.”
“네, 폐하.”
모든 것은 추측에 불과하지를 않던가. 교전을 벌이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번처럼 조용히 귀환할 수도 있는 일이다. 비록 지휘권자가 가져서는 안 될 사사로운 마음이라 할지라도, 이번만큼은 최악을 생각하지 않는 상관이고 싶었다.
부디 최신형 장갑순양함이 바빠질 일이 없었으면 하고……. 이때까지만 해도 윌터는 그런 꿈을 꾸었더란다. 다시 프라이빗 룸의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냉기 서린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선 이는 에릭 베이커 소령과 익숙지 않은 이등병 하나였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윌터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곧바로 경례를 붙인 두 사람은 부동자세로 나란히 섰다.
황제와 제독의 앞인지라 이등병 딘은 특히나 더 긴장한 얼굴이었다. 하얀 봉투를 손에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일순에 시선을 맞댄 에릭과 윌터는 심각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살얼음판인 그의 표정만 보아도 일의 경중을 알 수 있을 듯하였다.
하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던 터다. 입술을 앙다문 그가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참았다. 에릭의 목소리가 적막과 함께 흐를 때쯤에야 윌터는 다시 얼굴을 보였다.
“급하게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에릭의 음성이 심각했다.
“뭔가.”
이는 레오폴드 또한 마찬가지이다. 황제의 표정이 준엄하였다. 에릭의 시선이 딘을 향했다. 제 손에 들린 편지를 눈짓하기가 무섭게 그는 뻣뻣하게 걸어 나갔다. 테이블 너머로 레오폴드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던 딘은 단숨에 레오폴드의 앞에 서게 되었다.
바로 코앞에 황제가 있다. 긴장한 딘이 옆에 선 윌터를 잠시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그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무엇이든 다 괜찮다는 듯이. 덕분에 딘은 천천히 입을 뗄 수가 있었다.
“라이즈웰 소령님의 집무실에서 발견된 투서입니다. 창문 틈 사이로 끼워져 있었습니다, 폐하.”
“소령의 방에서?”
“네, 그렇습니다.”
투서를 건네받은 레오폴드가 곧바로 봉투를 열었다. 고요히 그것을 읽어내리던 황제의 표정에 한순간 살기가 돌았다. 선득한 눈으로 편지를 내려다보던 그가 욕을 읊조렸다.
“이 새끼가 감히.”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레오폴드의 모습을 마주한 끝에야 윌터는 더 큰 일이 벌어졌음을 예상해 볼 수가 있었으므로. 내부는 마치 교도소의 처형장처럼 얼어붙었다. 투서는 다시 윌터에게 건네졌다. 이윽고 깜짝 놀란 그는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제 입을 막았다.
이런…… 이런 짓을…….
레이언의 기행에 윌터는 말을 잃었다. 딘과 에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제국의 황태자가 아니던가. 그뿐만이 아니다. 하물며 그는 해상을 호령하는 바렌 대 해군의 지휘권자이다.
그런 자가 적국의 무기상을 만나고 연구원들을 납치했다. 연루된 장교들도 한둘이 아닐 터였다. 하여 모두를 속여넘길 수 있던 것이다. 현지에서 지속적으로 연구원들을 만났던 마커스와 바즐까지도.
소름 끼치는 적막 속에서 윌터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레이언이 짓밟은 해군의 명예와 제 수하들. 그 청춘들의 얼굴이다. 언제까지 그의 손에 전우들이 바스러져 가야 한단 말인가.
개만도 못한 새끼.
투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때문에 가운데 부분이 구겨졌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윌터의 손안에서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잦아들던 찰나였다. 한겨울 북해의 바다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내린다.
“레이언 지금 어디 있나.”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던 황제의 눈에 격노가 들어찼다. 곧이어 자리에서 일어선 레오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직접 찾지.”
그가 마지막으로 해군은 언제나처럼 임무에 최선을 다해달라는 전언을 남겼다. 프라이빗 룸을 나서는 레오폴드의 발걸음마다 격랑이 일었다.
* * *
새로운 인쇄소에서 만난 <페이퍼>의 사주 더글라스는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평소 발행량의 2배에 이르는 증쇄 때문인 듯하였다. 한 부도 남김없이 팔아먹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황후가 불태운 신문사 1층의 인테리어 값이라나?
다 낡아빠진 그 1층에 인테리어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헛웃음이 나왔으나 클리프턴은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많이 팔아서 진짜로 인테리어를 하든지 말든지. 솔직히 그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클리프턴의 시선은 내내 신문에만 닿아 있었으니까.
참나, <황태자가 키워낸 오델피의 들녘 아래서>라니. 저 멋들어진 제목 좀 보라지.
완성된 신차를 처음 보았을 때만큼이나 뿌듯한 터였다. 이는 더글라스도 마찬가지였다. 목숨과 맞바꾸었다고 봐도 무방하지를 않던가! 지금까지도 풀지 못한 붕대를 내려다보던 더글라스가 인상을 빡 썼다. 하지만 좋은 날인 만큼 그는 다시금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활짝 벌리는 것이다.
“어휴, 속이 다 시원합니다!”
더글라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마찬가지라네, 하하.”
클리프턴 또한 호탕하게 웃었다. 배달 준비를 마친 신문을 내려다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하여 입이 제멋대로 움직인 탓이다.
“하기야, 드벤도 뻑 하면 세금……. 하? 하! 아닙니다. 요즘 허약해져서 그런가, 말이 자꾸 헛나오지 뭡니까. 하하하!”
클리프턴이 제일 싫어하는 세금 이야기가 튀어나온 탓에 더글라스는 곧바로 입술을 당겨 물었다.
당장 드벤이 준 광고만 해도 얼만데!
살짝 고개를 돌린 더글라스가 제 입을 마구 때렸다. 다시 클리프턴을 마주한 그는 강아지 새끼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내일이면 전역으로 뿌려질 텐데, 축하주 한잔 어떠십니까?”
마침, 좋은 술이 있다며 떠드는 더글라스에게 클리프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도 안 되는 세금 문제에서도 곧 해방될 테니 한잔해도 괜찮을 듯하여서.
“아, 그거 좋지!”
클리프턴은 아셀이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던 날만큼이나 환하게 웃어 보였다.
* * *
세 사람이 황궁을 나서며 나누었던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였다. ‘잘했다.’ 에릭이 카일의 방에 썸머의 선물을 놓아두러 간 일도, 하여 그와 마주친 딘이 수상한 편지 이야기를 꺼낸 일도, 윌터는 모두 잘했다며 치하했다.
사실이지 않던가. 급보의 내용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투서였다. 늦게 보았다면 더 큰 일이 벌어졌을 터였다. 바로스 현지도 그리고 서해 연안도.
숨이 턱 막힌 그는 황급히 창문을 열었다.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도 여전한 답답함을 마주하며.이윽고 기지로 돌아온 세 사람은 윌터의 집무실에 모였다. 가장 먼저 말문을 연 이는 당연히도 윌터이다. 투서를 내려다보던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투서 말이네. 누가 남겼는지는…… 모르겠지.”
“……네.”
“그렇지, 아무래도.”
빤히 알면서도 물어본 것이다. 주인을 밝혀낼 수 없는 투서임을 알면서도. 짧은 대화는 금세 끝나 버렸다. 다시 말을 잃은 세 사람은 짙은 침묵 속으로 숨어들었다. 더욱이 이른 시간임에 따라 정적은 한층 더 깊이 스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