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9. 좋아하며, 사랑하며
10. 함께했던 이 계절을
11. 널 좋아하니까
12. 붕괴의 전조
9. 좋아하며, 사랑하며
속으로 비명을 내지른 모드가 무릎 위에 올려 둔 붉은 냅킨을 움켜쥐었다.
“아! 네!”
“왜? 아닌가?”
뻔뻔스러운 라이오넬의 표정에 당황한 모드가 말을 쏟아 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산타…….”
“산타?”
그녀는 속으로는 거의 울고 있었다.
“산타클로스를…… 닮으셨어요!”
볼록 솟아오른 모드의 양볼이 복숭아처럼 물들었다. 두 손까지 모아 가며 포근하다는 둥 인자하다는 둥의 말을 늘어놓는 그녀는 정말이지 바빠 보였다. 모드의 뺨을 물들인 분홍 색채가 진해질수록 라이오넬의 미소 또한 눈에 띄게 선명해졌다.
“하하! 산타클로스 노릇 중인 건 맞긴 하지.”
벌써 그런 이야기까지 나누었냐며 즐거워하는 라이오넬의 호탕한 웃음이 밤하늘을 수놓던 찰나다. 모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성탄절에 뉴올랜드의 장난감 가게에서 산타클로스 일을 하십니다.”
그의 덤덤한 설명에 깜짝 놀란 모드는 카일의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혹시 시계탑 옆에 있는 제일 큰 장난감 가게 맞아요?”
“그거까지는 모르겠는데.”
알아야 할 필요가 있냐는 듯한 카일의 태도에 모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찰나다. 카일이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뭐든 아는 척하지 마. 귀찮아질 거야.”
귓가를 타고 흘러내린 부드러운 중저음이 목덜미 위를 간질이며 맴돌았다.
원래 목소리가 저랬나?
똑같은 남자가 자꾸 다르게만 느껴지는 오늘. 놀란 모드가 재빨리 자세를 바꾸었다. 그녀는 카일에게서 최대한 떨어져서 의자 등받이에 꼿꼿이 등을 기대고 앉았다. 라이오넬과 다시 시선을 마주한 모드가 어색하게 미소를 보였을 때였다. 라이오넬이 어딘가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씩 웃었다.
“저거 말이야. 반품 불가네.”
바로 카일이었다.
“네?”
하여 그를 흘끗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는데. 카일 또한 이미 저를 내려다보고 있지를 않겠는가! 때문에 그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자꾸만 목덜미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인기가 별로 없거든. 그렇잖아?”
카일을 훑어 내린 라이오넬이 질린다는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그의 박한 평가와는 별개로 모드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내내 이곳을 엿보고 엿듣고 있는 눈과 귀들에게서 야유를 듣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조금 멋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 인기는 제법 많아요. 외탁이 훌륭해서요.”
간드러지는 모범 답안에 라에오넬이 솟아오른 광대를 숨기지 못하였다. 말도 안 된다는 카일의 눈빛에 모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배시시 웃는다.
무르익어 가는 밤. 바람에 춤을 추는 노란 레몬들 사이로 세 사람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스몄다.
* * *
기분 좋게 취한 라이오넬을 펠릭스의 손에 맡기고 카일은 곧바로 벡포드 호텔의 로비를 나섰다. 여전히 모드와 함께였다. 와인을 몇 잔 마신 탓인지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달아올라서 카일이 잔잔하게 웃었다.
“나 진짜 안 취했어요.”
“그러니까, 누가 뭐랬나.”
태연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카일을 향해 모드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웃는 것을 다 보았다며 그녀가 꿍얼거리는 시끌벅적한 여름밤의 거리.
“저택까지 걸어도 괜찮겠어요?”
“그럼요.”
모드가 저는 끄떡없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조용히 걷던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아까 땀을 엄청 흘리지 않았느냐며 추궁하는 눈초리가 자못 날카로웠다. 차마 쉬지 않고 달려왔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카일은 그저 괜찮다는 말로 화제를 돌릴 수밖에는 없었다.
“다행이네요.”
안도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들린다.
“작년에 만났던 산타클로스가 아무래도 할아버님 같은 거 있죠.”
뉴올랜드의 가장 큰 장난감 가게에서 만났다며, 모드는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하여 카일은 조용히 들어 주었다. 산타클로스가 제게 선물 상자를 주었다고 말하던 때였다. 모드가 한번 맞춰 보라면서 질문을 내어놓았다.
“뭐가 들어 있었을까요?”
쉽게 맞추지 못할 것이라며 기세등등하였으나 카일은 뻔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곧장 문제를 해결했다.
“자물쇠.”
모드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도 받아서.”
“응?”
“10개도 더 있는데.”
참으로 천연덕스러운 대답이었으니까.
“……그렇구나.”
더 이상 말할 의지를 잃은 모드는 푸른 잎을 흔드는 가로수들을 바라보았다.
“뭐야. 재미없어.”
“다 들리는데.”
“아, 정말 미안요.”
꿍한 표정과 조금 더 붉어진 뺨을 내려다보던 카일이 헤픈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가장 큰 장난감 가게에서 무엇을 샀느냐고.
“선물이요. 곰 인형 같은 것들?”
전부 다른 옷들을 입혀 놓았는데 꽤나 귀여웠다며 그녀가 웃었다. 바퀴가 달려서 움직이는 것도 있다나 뭐라나.
“사실 제일 유명한 건 프러포즈용 곰 인형이래요. 전부 다 맞춤으로 제작할 수 있어서 예비 신부들이 좋아하는 걸 봤어요.”
필요한 때가 오거든 꼭 가 보라며 종알거리는 모드에게 카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얕은 침묵이 흐르는 사이, 모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바람을 맞았다.
오랜만에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서 걷기가 좋은 날이었다. 바람이 잦아들 때쯤,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카일의 질문 때문이었다.
“곰 인형은 어떤 모습이면 좋겠습니까? 만약에…… 받게 된다면요.”
잠시 고민해 보겠다던 모드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시범을 보였다.
“머틀 꽃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귀에 꽂아서.”
그런 모드를 보면서 카일은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고.
흔해 빠진 머틀 꽃 자수에 내내 눈길을 주었을 때부터, 내기를 핑계 삼아 찾아갔을 때부터, 마음이 온통 그녀를 향해 있었던 것 같다고.
* * *
레이언은 천하태평이었다. 연일 호외가 쏟아지고 주간지들이 도망친 지휘권자를 찾겠다며 호들갑을 떨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는 금빛으로 물든 베르겐의 바다를 바라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애초에 해군의 영웅이니 간판이니 하는 것들을 누가 원했다고.
저따위 찰나의 것들이 저를 빛낼 수 있다고 레이언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터였다. 비릿한 웃음을 흘린 레이언이 습관처럼 오델피를 피워 물었다. 여름이 짙어질수록 모드에 대한 생각도 함께 짙어졌다.
언제나처럼 그가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것은 모드 하나뿐이다. 하여 오델피를 피우는 것이었다. 환영 속의 모드는 언제나 웃고 있으니까. 중독에 금단 증세까지 보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진짜 모드를 얻을 때까지는……. 그때까지는 오델피가 필요했다. 오델피는 레이언에게 오르골 상자와 같았다. 언제든지 모드를 보여준다. 게다가 제 주머니까지 두둑하게 채워 주고 있었으니 그 방면에서만큼은 오르골 상자 그 이상이기도 하였고.
다만, 내어놓게 된 황태자 자리만큼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가 라이즈호와 부대원들을 버리고 도망쳤단 사실을 아버지는 모르지 않았다. 한데 이제 와서 보카테 해전의 일을 문제 삼겠다는 저의가 분명하지 않던가.
적통에게 자리를 돌려주겠다는 것이리라. 아등바등했던 지난 세월들을 곱씹으며 레이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서 죽은 듯 있어.
오델피의 연기 속에서 오르는 아버지의 환영은 언제나처럼 머릿속이 울리도록 시리고 냉하였다.
―수도 본부는 카일이 맡는다.
경멸의 눈빛을 짙은 연기와 함께 흘려보낸다. 머지않아, 금빛이 사라진 바다 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환영 속의 바다는 늘 그러하였다.
보카테의 그날과 닮아있다. 서해의 시커먼 파도가 몰아치던 그 바다를. 레이언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피비린내 풍기는 갑판 위에 서 본 적도 없는 것들이……. 부대원을 따라, 배를 따라 순장되는 그딴 개죽음을 누가 알아주는데.
누구든 한 번만 그 죽음의 바다 위에 서 본다면 아무도 저를 욕하지 못할 것이라고 레이언은 확신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연달아 2개를 태워 내고 나니 상념 또한 짙어진 터였다. 나른하고 졸렸던 초반과는 달리 근래에는 피면 필수록 생각이 많아졌다.
아니 그저 망상인가.
기울어진 입가에서 짙은 연기가 흘러나온 때였다. 허공을 바라보던 레이언의 눈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대단한 것이라도 알게 된 듯한 얼굴이었다.
“설마 에릭 베이커를 살려 낸 것도……. 하하!”
퍼붓던 겨울비처럼 서늘하고 매섭던 아비의 뒷모습을 떠올려 낸 레이언이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은 마치 울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 * *
“기자는?”
알맞게 시간을 들인 꽃차는 생각대로 잘 우러난 터였다. 맑은 찻잔 위로 여름 녹음의 풍경과 여유 있는 표정의 사에나가 비쳤다.
“실족사로 마무리되었고 장례는 내일 치른다고 합니다.”
“변호사한테 가족들이 보험금을 잘 받을 수 있게 도우라고 전해.”
“네.”
부고가 차만큼이나 사에나를 만족시킨 듯 보였다. 퍽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그녀는 잔을 들어 올렸다. 사에나는 제 비서에게도 선뜻 차를 권했다.
“한잔하겠어?”
비서인 앨리 포스터가 곧장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앨리는 마무리할 일이 남았다고 덧붙였다. 하여 사에나도 더는 강권하지 않았다.
“알았어.”
평안이 내린 정원의 한편에서 그녀는 여름을 만끽했다. 부러 여름을 좋아할 이유는 없었으나, 구태여 여름을 싫어할 이유 또한 없었다.
본디 계절이란 것은 그런 것이니까.
―전하께선 여름을 좋아하시죠.
반드시 돌아오지만,
―모드가 돌아오니까.
반드시 떠나간다.
고여 있는 법이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차를 머금은 사에나가 생긋 웃었다. 그녀는 잠시 개릿 로버츠를 생각했다. 부고의 주인. 어리고 유능한 인재의 죽음이 애석하였으나 별다른 수가 없었다. 노을빛이 내린 노우드가의 응접실에서 그는 취재를 중단하는 일은 없을 거라며 못 박았다.
―아니요, 기사는 반드시 세상에 나올 겁니다. 모두가 알아야지요. 진짜 황태자 전하가 어떤 분이신지.
확신에 찬 개릿의 목소리가 꽃차의 향을 따라 흐른다.
아니 틀렸어.
그가 틀렸다. 대중은 우매해야지. 그래야만 핏줄은 고귀하고 계급은 공고할 테니.
하여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황태자가 매일을 오델피에 취해 있다는 것도, 직접 유통하여 뒷돈을 챙기고 있다는 것도, 보카테 해전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마저도 전부 다. 감히 머리를 맞대고 신문을 나누며 떠들 이야기가 아니지 않던가.
해를 따라 기울어진 나무의 그림자를 일별하는 사에나의 눈빛이 단호했다. 사랑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이제 그녀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손에 넣는 것.
가지고 나면 사랑하게 될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그러했다. 강아지도, 드레스도, 황태자의 약혼녀 자리도. 전부 가진 뒤에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사실 사랑과 소유욕은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사에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레이언의 욕망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초여름이 지나고, 오늘처럼 무르익은 한여름 속에서는 그의 욕망이 저의 사랑과 꼭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니 레이언도 가지고 나면 사랑하게 될 것이었다. 이 사에나를. 석양이 고개를 들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층 더 붉게 보였다.
“…….”
낙조에 붉게 잠긴 머리카락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밀려드는 레이언의 목소리.
―먼바다 건너의 아주 작은 이국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지. 모든 남녀는 운명의 붉은 실로 이어져 있고, 실로 손끝을 묶인 남녀는 반드시 부부로 만난다는 그런.
그것은 이명처럼 귓가에 내린다.
―그 실이, 네 머리카락을 닮았단 생각을 해.
결국 신이 묶어 낸 것은 저의 손끝이리라.
붉은 머리카락의 끝을 만지면서 사에나가 선선한 웃음을 지었다.
* * *
이른 아침부터 하블레인 저택의 응접실이 소란하였다. 거대한 상자들 때문이었는데 대부분이 벡포드 호텔에서 보내온 것들이었다. 모드는 의심에 찬 눈초리로 제 앞으로 배달된 수상한 상자들을 살폈다.
“이게 다 뭐야……?”
샴페인에서부터 향수에 이르기까지 품목도 천차만별이었는데, 전부 최고급인 터라 펠릭스가 보낸 것이 확실해 보였다.
―사업하며 알게 된 어르신인데.
능숙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던 펠릭스 생각에 모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