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5. 여름의 장면
6. 태풍을 타고 온 파도
7. 사랑은 마치
8. 언제부터 이 여자를
5. 여름의 장면
“어머! 몰라뵈었어요. 페이턴의 자제분들은 그리아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던 터라…….”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불편함을 숨기지 않던 밀레드의 표정이 모드의 말 한마디에 봄 햇살에 눈 녹듯이 풀어졌다.
“괜찮습니다. 실제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레이디 모드 하블레인.”
제법 의기양양하기까지 한 태도에 아셀이 실소하며 조금 더 시선을 내린 때였다. 붉게 물든 밀레드의 뺨이 보였다.
저 새끼가 누굴 보고 낯짝을 붉혀.
아셀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이대로 밀레드의 멱살을 잡아 늘 기웃대던 카드판의 테이블 위에 처박아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밀레드가 얼굴을 붉힐수록 그 생각도 함께 무르익고 있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해요. 레이디 브리사와는 선약이 있으셨나요?”
“선약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남성복도 하신다고 하셔서요.”
갸웃거리던 모드가 브리사와 시선을 마주했을 때였다. 절대로 제가 먼저 꺼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브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음, 그럼 그렇지.
하여 새로 맞춘 옷에 관해 밀레드가 열심히 떠들어 대는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들어봐야 하등 쓸모없는 것들 뿐이니. 졸작이라던 두 아들들이 페이턴가를 말아먹을 것이란 소문이 사교계에 파다한 지 오래였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죄송하지만 레이디 브리사는 저와 선약을 해 둔 터라 먼저 실례해야겠어요.”
열의 없이 대충 고개만 끄덕이던 모드가 브리사의 손을 잡아끌어 제 쪽으로 데려온 참이었다. 밀레드가 곧장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제가 레이디들께 식사 대접을 할 기회를 주시면 어떨지요. 물론 아셀 경도 함께.”
밀레드가 저 보란 듯이 웃으며 도발해 오자 마침내 아셀의 인내심이 다하고야 말았다. 금방이라도 밀레드를 치워 버리려는 그를 모드가 제지했다. 그녀는 한 치의 동요도 일지 않은 말간 얼굴로 아셀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지금부터 도와주면 된다고.
“아셀 경과 아는 사이시군요. 그럼 더 잘되었어요! 아셀 경께서 오해 없도록 잘 설명해 주실 테니까요.”
아셀이 눈치껏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밀레드의 낯빛이 가라앉았다.
“아쉽지만 오늘은 이미 아셀 경께 그 기회를 드렸답니다.”
한여름의 태양 같은 환한 미소를 띤 아셀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가시죠, 레이디분들. 넌 내일 사 줄 테니까 해군 본부로 와라, 밀레드.”
아셀의 에스코트와 함께 멀어지는 세 사람을 바라보는 밀레드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저 새끼가 진짜.”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 그가 아니꼽다는 듯 내내 세 사람을 주시했다.
* * *
여름 잎이 빽빽하게 들어찬 가로수의 길목에서 회색빛 슈트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아셀이 멋쩍은 듯 웃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계산을…….”
운동복 차림이었던 터라 식당에 가기 위해서는 환복이 필요했는데 브리사가 선뜻 제 의상실로 두 사람을 에스코트했다. 얼핏 보기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았던 슈트는 마치 제 주인을 만난 듯 빛이 났다.
“아니요. 보답할 기회를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브리사가 단호하게 거절하며 고개 젓자 아셀도 더 이상 제 고집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럼 잘 입겠습니다, 레이디 브리사.”
대신 기꺼이 수용하며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바로 가장 멋진 곳에서 식사 대접을 하겠다는 너스레와 함께.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함께 웃음 짓던 모드가 불현듯 말문을 연 것은 그때였다.
“대위님도 밝은 옷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늘 어두운 옷만 입으니 아쉬워요.”
그 말에 아셀이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모드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기울이는 그의 표정 위로 자리한 수많은 물음표. 그럴 리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아셀은 걸음이 점차 느려지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확실히 선호하시는 편은 아니죠.”
하지만 밝은 옷도 제법 가지고 계시다며 말을 잇는 빛나는 얼굴 위로 화사한 웃음이 떠올랐다. 마주 선 브리사가 그런 두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렇군요.”
모드는 그저 아셀을 따라 웃으며 짧게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브리사는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저의 완벽한 투자자가 대공의 옷차림에 은근한 신경을 쓰고 있단 사실을.
―여름에는 신사들도 밝은 옷들을 주로 입겠죠?
그저 사업에서 비롯된 관심이겠거니 여겼는데, 사소한 데에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야말로 사랑과 다름없었다.
정말 좋아하시나 봐! 귀여우셔라.
미소 짓는 브리사의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이제 탁월하게 잘생긴 외모와는 달리 눈치는 조금 떨어지는 아셀의 입을 막아야 할 차례였다. 브리사가 맹렬한 여름 볕 아래 반짝이는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중요한 일에는 무게감이 있는 톤으로 착용하시겠어요. 그렇죠?”
미소를 띤 그녀가 은밀하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모드가 서 있는 방향을 눈짓했다. 묘한 표정의 모드를 마주하고 나서야 제 실수를 알아챈 아셀이 흠칫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렇습니다. 그게 제일 잘생겨 보이시기도 하니까요.”
그의 들뜬 목소리가 바람결에 스미고 웃음 짓는 두 사람의 나른한 목소리에 물드는 여름. 모드가 가만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뭐, 완벽하게 믿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기분 맞춰 주려는 두 사람의 노력이 꽤나 귀여우니까.
모드가 살포시 웃으며 반대편 길목의 초입으로 눈을 돌린다. 느티나무 너머로 펼쳐진 시계탑의 정경. 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빛 시곗바늘이 열한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 맞다, 사라.
만나기로 약속한 그녀의 하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브리사가 곤란해 보여서 나섰지만……. 사실 선약이 있어요.”
황급히 시선을 돌린 모드가 멋쩍음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말을 잇자 브리사가 커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황이 묻어나는 얼굴. 저를 혼자 두고 가지 말라는 가련한 표정의 브리사를 마주한 모드가 씩 웃어 보였다.
“두 분이서 식사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아쉽지만 저는 함께한 걸로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저를 향한 모드의 장난기 어린 미소에 브리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에 모드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이런 미남은 흔치 않다는 듯 은밀한 눈빛을 건넸다. 곧이어 아셀이 아쉬워하며 입을 열었다.
“아쉽네요. 다음번엔 꼭 대위님과 함께 사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모드가 싱그러운 미소를 띤 채 말하고.
‘꽤 잘 어울린단 말이지.’
두 사람을 살피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한편, 아셀은 초조함으로 얼룩진 브리사의 얼굴을 살폈다. 아무리 보아도 저를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괜찮으려나…….
아셀이 살짝 다가섰다.
“제게도 보답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브리사 양.”
그러나 브리사가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자 아셀이 다시 움직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떠올리게 되는 공원에서의 한 장면.
밀레드가 다가서자 브리사는 내내 뒷걸음치던 모습이었다.
하……. 멍청한 새끼. 이런 무례를.
아셀이 마른 한숨을 삼키는 사이. 열한 시를 알리는 종탑이 울리고.
“오늘 정말 죄송해요! 아셀 경 그리고 브리사 미안해요! 먼저 가 볼게요.”
두 손 모아 미안함을 전한 모드는 활짝 웃더니 가로수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살짝 웃어 보인 아셀의 시선은 다시 브리사를 향하고, 브리사가 어색한 듯 미소 지었다. 그녀는 분명 거절하려고 마음먹은 터였다.
“강요가 아니니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브리사 양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그런데, 아셀이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낮의 바람 속으로 스미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 바람의 열기에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듯하였다.
* * *
주인 없는 카일의 집무실에선 먼저 도착한 펠릭스가 위스키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타이를 진작 풀어내 버리고도 목덜미가 답답한지 내내 셔츠 깃을 만지는 모습이다. 소파에 늘어진 자세와 달리 허공을 맴도는 그의 눈초리가 자못 날카로웠다.
출항 열흘 전.
미간을 구긴 펠릭스가 레이언의 최근 행적을 곱씹었다. 레이언이 아더스호의 보험료를 대납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보험을 판매한 제임스 스콧이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 탓이었다. 물론 지금은 황후가 나서 그 입을 막은 듯하지만.
뭐 제 딴엔 과감한 결단이었겠지.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늘 하던 등신짓에 불과했으니. 말이 무역선이지 아더스호가 불법 노예 무역에 동원되고 있단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노예 무역을 철폐하는 법안이 통과된 지 수년이 지났지만, 귀족들과 신흥 부르주아들의 비호 아래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 터였다. 많은 기계가 인력을 대체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한 곳들 또한 여전했으니 다들 포기하지 않을 수밖에.
인도주의적 관점에서의 비난과 경멸은 자본과 욕망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오직 이익만을 좇아 그것으로 점철된 사회. 그것이 지금이었다. 자본과 권력으로 시장과 이익을 지배하는 시대로의 도래. 냉혹한 탐욕의 시대였다.
보험, 대납, 과감한 결단.
펠릭스가 내내 그것들을 곱씹으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늘 하던 멍청한 짓거리이긴 한데. 뭐랄까. 이상하게 신경을 긁고 있는 일이었다. 펠릭스는 끊임없는 상념으로 시간을 보냈다.
깊은 밤이 드리운 후에야 카일이 집무실에 나타났다.
“우리 대공 전하께서는 퇴근이 늦어도 너무 늦네.”
펠릭스가 늘어져 있던 자세 그대로 인사를 건네자 장교모를 벗어 든 카일이 흘긋 시선을 던지며 그를 지나쳤다. 열린 창밖에서 제법 열기가 가신 밤바람이 불어왔다. 카일이 제 앞에 착석을 마치자 펠릭스가 흐트러진 머리를 넘기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아더스호 말이야. 보험료 대납을 했단 말이지.”
그를 바라보는 카일의 눈빛이 서늘했다.
“무슨 소리야.”
짤막한 대답을 내어놓은 카일은 펠릭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무언의 의심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펠릭스는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나 말고. 레이언 그 멍청한 새끼 말이야.”
저를 뭘로 보는 거냐며 위스키 잔을 내려놓은 펠릭스가 마뜩잖다는 얼굴로 입술을 샐쭉거렸다. 그제야 카일의 시선이 자연스레 떨어졌다.
언제나처럼 무감한 눈빛.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열린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무슨 꿍꿍이인지 살펴봐.”
으레 그래 왔듯 과시 따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나, 혹시 다른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당분간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창문에까지 이른 커다란 느티나무의 그림자가 카일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그림자는 마치 그의 눈 속에서 짙은 파도처럼 보였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펠릭스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위스키 병을 손에 쥔 채 살짝 흔들어 보이며 카일에게 물었다.
“한잔할래?”
하지만 카일이 피곤한 듯 제 눈두덩이를 짓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재미없는 새끼.
잔에 남은 위스키를 털어 넣은 펠릭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술도 담배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아마 수도승도 이보단 나을 테지.
재미없는 사촌의 인생을 되짚는 펠릭스의 미간에 짜증이 깃들었다. 옅은 한숨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의 시선이 맞은편에 자리한 장식장 위로 닿았다.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간 펠릭스는 처음 위스키를 꺼낼 때처럼 신중하게 유리 너머를 살폈다. 기껏해야 장식용인 주제에 내로라하는 것들만 늘어놓은 꼴에 실소가 새어 나왔다.
보나 마나 밀튼 작품이겠고.
주인의 체면을 고려한 접대용 컬렉션이 분명할 터였다. 펠릭스가 고개를 저으며 장식장의 유리문을 열었다. 그리곤 시선을 잡아끄는 오렌지 그림의 와인병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불쑥 나타난 손이 병을 빼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
카일이 병을 품에 넣고 돌아섰다. 너른 걸음으로 책상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 위로 펠릭스의 노골적인 시선이 따라붙었다.
“난 그게 마시고 싶은데.”
펠릭스가 책상에 놓인 오렌지 와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치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질척이고 묘한 눈빛으로.
다른 말 없이 잠잠한 눈으로 펠릭스를 바라보던 카일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거두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으나 이대로 지나치게 놔둘 펠릭스도 아니다.
“마음을 드린 분께서 주기라도 했나?”
펠릭스가 눈을 찡긋하며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생기 넘쳐 보였다.
“그래.”
대답을 마친 카일의 시선이 병 위로 내려앉았다.
“그렇다고?”
당황한 펠릭스가 되묻자 카일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빨리 인정해 버리면 놀리는 보람이 없지 않나. 펠릭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궁금했던 모습이긴 했으나 막상 마주하고 보니 징그럽기 그지없는 사촌의 연애사였다.
“그러니 다른 걸 골라.”
단호한 카일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벙쪄 있던 펠릭스가 이내 헛웃음을 내뱉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더 이상의 놀림은 무의미할 터였다. 그가 체념한 듯 살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술이라도 챙겨야지.
찬찬히 술병들을 훑는 펠릭스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물론 가장 유서 깊은 레밍의 오렌지 와인이라 못지않게 귀한 것이었으나 밀튼이 마련해 둔 컬렉션들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묵을 대로 묵어 한 병에 족히 수천 라르를 호가하는 귀한 것들인데. 하나 사랑에 눈먼 사내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면 별수 없는 것이겠지.
자꾸만 웃음이 삐져나왔다.
“이거 하나면 족해.”
펠릭스가 음흉한 미소와 함께 가장 비싼 포모도산 위스키를 품에 안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자리한 값비싼 유리병들이 흔들리는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서 빛나고 있었다. 어차피 제게는 무용한 것들일 뿐이니까.
“그러던지.”
성의 없는 대답을 마친 카일이 건조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다시 처음과 같은 곳으로 향한다. 시선을 내린 곳에 자리한 오렌지 그림과 오렌지로 만들어진 와인. 온통 오렌지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정작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복숭아였다.
바람이 실어 나른 것은 흐드러지게 핀 여름 장미인데 어쩐 일인지 복숭아의 향기가 묻어나는 듯했다. 레밍에서 돌아온 후로 카일은 종종 복숭아를 떠올렸다. 그저 철을 맞아 자주 눈에 띄니 그런 것이라 여기며.
카일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 * *
우두커니 선 채로 레논 베이럴드를 바라보는 레이언의 눈빛이 서늘했다. 그는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로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흠집 하나 없이.”
레논을 훑어 내리며 짧은 감평을 마친 그의 얼굴에 냉소가 어렸다. 동맹국인 트로아니아로 파견되어 정찰 임무를 마치고, 반년 만에야 복귀한 해군항공대 소위 레논 베이럴드를 향한 노골적인 비아냥이었다. 하지만 레논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 너머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두고 허리를 세웠다. 힘이 실린 반듯하고 꼿꼿한 자세다.
“이렇게 매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