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를 부탁해 2권
황제를 부탁해 2권
황제를 부탁해
2권
황제를 부탁해 2권
차 례
11. 요정을 부탁해
12. 성인식을 부탁해
13. 이별을 부탁해
14. 재회를 부탁해
15. 헤이미쉬를 부탁해
16. 세 사람을 부탁해
17. 복수를 부탁해
18. 벨을 부탁해
19. 두 사람을 부탁해
20. 황제를 부탁해
21. 작별 인사를 부탁해
22. 봄을 부탁해
황제를 부탁해 2권
11. 요정을 부탁해
집무실 책상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벨이 돌연 인상을 구겼다.
눈앞에 놓인 의문의 종이쪽지 하나가 그녀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규칙적이고 경직된 시계음에 맞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던 벨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슨 꿍꿍이지?”
그녀는 가만히 유진을 떠올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대지의 궁 창문을 깨고 들어온 정체불명의 소년, 그녀보다 오래 일한 대지의 궁 시종, 제국에는 드문 마법사.
그를 알게 된 지도 어느덧 1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벨이 그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이름과 나이뿐이었다.
‘이제는 내가 알고 있는 게 진짜인지도 모르겠어.’
사실 17살이 아닐지도 모르고, 이름은 진도, 유진도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걸 속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니 그를 향한 의구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사실 이제까지만 해도 별로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녀의 모든 관심은 알렉스에게로 향해 있었으니까.
벨은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쪽지를 움켜쥐었다.
쪽지에는 분명 ‘밤 9시, 시종 숙소 뒤쪽’이라고 적혀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벨은 무심코 황자의 방이 있는 벽면을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깨어있을 알렉스였지만, 처음으로 포럼에 참석한 탓일까, 그는 피곤에 절어 곯아떨어진 지 오래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떳떳지 못한 밤 외출이 마음에 걸렸는지 벨이 알렉스의 방 쪽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새카만 로브를 뒤집어쓰고 밖으로 나갔다.
창문 사이로 뜬 둥근 달만이 그녀를 배웅할 뿐이었다.
* * *
시종 숙소에 도착한 벨은 걸음을 멈췄다.
공교롭게도 오늘 에이미와 조제프는 휴가를 내고 본가로 내려간 상태였다. 시종 숙소에는 유진뿐일 것이다.
시종 숙소 뒤편에는 마가목 숲이 있었다. 밤만 되면 스산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곳은 확실히 누가 숨어 있어도 모를 만큼 어둡고 음습했다.
주변을 살피며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벨은 높은 가지 위에서 울어대는 정체불명의 새소리를 듣고 넘어질 뻔했다.
진흙투성이가 된 신발 앞코를 툭툭 털어낸 그녀가 긴장했다. 등 뒤에서 기척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나오셨네요. 안 오실 줄 알았는데.”
갑자기 들려온 유진의 목소리에 놀란 것도 잠시 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른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제가 부른다고 당신이 순순히 나올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그의 말에 벨이 순간 멈칫했다. 동시에 훈훈한 봄바람이 그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여전히 제 앞에서 생글생글거리는 유진을 보며 벨은 어쩐지 빈정이 상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심호흡을 한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아까 포럼 때, 어떻게 된 겁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알렉스 전하까지 당신을 못 알아보던데.”
잎사귀 색으로 물든 벨의 눈동자가 유진의 얼굴을 꿰뚫을 듯이 강렬한 기세로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열렬한 시선에 유진은 이내 피식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제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그새 잊은 겁니까?”
유진이 조용히 그녀 가까이로 다가왔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코앞에 다가온 그는 자수정같이 투명하고도 어두운 눈동자로 벨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날 어떻게 알아본 걸까요?”
유진의 말에 벨이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녀 역시 그 점을 이상히 여기고 있었다. 만약 그가 마법을 쓴 것이라면 자신 역시 그를 못 알아봐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만이 유진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마법을 쓴 건 너잖…….”
벨이 대답하려 하자, 유진이 자신의 입에 집게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정말 모릅니까?”
“…무슨 뜻이야?”
당황한 벨이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자, 유진은 그녀에게로 또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알렉스와 키가 비슷한 유진과 벨이 마주 보고 서 있자 마치 사자와 어린양이 마주 보고 선 아찔하고도 위험한 장면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는 벨과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는 유진, 두 사람 사이로 다시 한번 바람 한 줄기가 불어 들었다.
“당신, 아까 알렉스 전하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죠?”
알렉스가 어떤 질문을 했더라- 벨이 인상을 찌푸리는데 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당신, 이것들이 보입니까?”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벨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들의 주변에 있는 나무 사이로 광풍이 휘몰아쳤다. 바람이 쓸고 간 자리에서는, 벨의 눈동자를 닮은 연한 녹빛을 띠는 자그마한 빛 구슬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이내 벨과 유진의 주위를 감쌌다.
마치 두 사람을 보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치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답하십시오. 이것들이 보입니까?”
유진이 주위를 날아다니는 연녹색 구슬들을 가리키자, 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구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왜 갑자기 나타난 것 같습니까?”
멍하니 선 벨의 귓가에 유진이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벨 헤이미쉬.”
“너, 너… 어떻게?”
“방금 당신에게 죽일 기세로 마법을 날리려고 하니 숨어 있던 겁쟁이 종족들이 단체로 튀어나온 거란 말입니다.”
하지만 벨은 유진의 뒷말을 들을 수 없었다.
녀석이 어떻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놀란 눈을 한 벨이 입술만 달싹이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유진이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눈꼬리를 휘어 보였다.
“조사를 좀 했죠.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뭐라고?”
“그래서 이것들이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요정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왜 안 중요합니까? 적어도 우리에겐 중요한 사실일 텐데요.”
그랬다. 유진의 말대로 그녀는 포럼 수업 때 요정을 목격했었다.
하지만 요정을 제 눈으로 보지 못해 시무룩해하고 있는 알렉스의 앞에서 요정이 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진 때문에 머리가 아팠던 탓도 있었지만.
“…이게 다 요정이라고?”
“그렇습니다, 많죠?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수를 합쳐도 요정의 수보다는 적을 겁니다.”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초록빛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은 벨은 이내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둬들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유진이 눈을 굴렸다. 자신도 처음 요정을 본 날 저런 얼빠진 반응을 했었다.
“지난 여섯 달 동안 당신을 계속 지켜봤습니다.”
벨이 요정족 혼혈일지도 모른다는 백작의 말을 듣고 나니 신경을 쓰지 않으려야 안 쓸 수 없었다.
“지켜본 결과, 당신이 나와 같은 요정족 혼혈이라는 걸 확신하게 됐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요정족 혼혈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릴 할 거면 난 돌아가겠어!”
벨은 자기도 모르게 유진에게 말을 놓아 버렸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예의도 같이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인지 아닌지는 당신이 제 생각을 읽어보면 알 것 아닙니까.”
유진의 물음에 벨은 아무 생각 없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생각은 안 읽힌다고!”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벨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유진은 그저 가만히 벨을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너 어떻게 안 거야?”
벨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자, 유진은 진정하라는 듯 그녀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이름도 알아냈는데, 그 정도쯤이야 어렵지 않죠. 뭐, 당신도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요.”
그때, 벨이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멱살을 잡은 벨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거랑 같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잖아!”
벨이 악을 쓰자 유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해서 드러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제가 마법을 쓰는 순간을 당신이 늘 볼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벨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의 마법을 막아낸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더 궁금했고,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기척을 감추고 그녀를 따라다니곤 했다.
기척을 감추는 건 마법이 아니라 무술의 영역이었기에 그녀 역시 눈치채지 못했다.
그 역시 자신의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너무나 무의식적인 행동들이었다.
그렇게 여섯 달을 지낸 결과, 그는 벨에게 이상한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굳이 말하지 않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고, 당신이 없는 곳에서 한 일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죠. 생각을 읽는 능력이라고 말한 건 찍은 건데 맞았네요.”
할 말을 잃은 벨이 멍하니 유진을 쳐다보다 이내 눈썹을 찡그렸다.
“…너 스토커야?”
“그런 말 들어도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선은 지켰습니다.”
단호한 어조로 대답하는 유진을 보며 벨은 이걸 그냥 놔둬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다 이내 포기했다는 듯 잡았던 멱살을 풀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 됐다. 말을 말자. 그래, 네 말대로 다른 사람의 생각 읽을 수 있어. 그런데 그게 뭐? 그래서 내가 요정족 혼혈이라고? 웃기지 마, 난 그냥 인간이야!”
더 이상 평범한 사람에서 멀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자신이 반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듣게 되면 더 감당하기 힘들 것만 같았다.
벨이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지만 유진은 단호했다.
“아니요, 당신은 요정족 혼혈이 맞습니다. 그것도 페어리 퀸의 피가 섞인.”
“뭐?”
“당신의 그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았습니까? 그건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벨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라곤 멍청히 유진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 * *
티 없이 맑은 하늘 아래, 알렉스가 열심히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직 통통한 몸매의 소유자인 그였지만, 예전과는 달리 보기 좋게 살집이 붙은 체형이었다. 오히려 살 덕분에 또래 소년들보다 늠름하고 풍채가 좋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