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Page
전남편이 황제가 되었다 2권
지은이 : 달가듯이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달가듯이, 2025
※ ISBN : 979-11-7313-973-4
※ 가격 : 3,000원
※ 발행일 : 2025년 5월 17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6.
한나가 말하는 무도회란 6월 말에서 7월 초에 행해지는 밀 수확을 기념하는 행사.
예전에는 한 해의 농사가 전부 풍년이길 기원하며 각 마을에서 벌이는 작은 축제 같은 행사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며 귀족층에 흡수되어 7월 초가 되면 일주일 내내 밤 무도회를 여는 행사가 되었다.
그래도 처음 시작할 당시의 정신을 반영해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의 황금색 의상을 입는 관례가 있고, 또 무도회가 열리는 황궁 밖에서는 올해 수확한 작물과 과일로 백성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있다.
일주일 내내 벌어지는 춤판에선 누가 얼마나 눈부신 장신구를 걸치는지, 누가 얼마나 큰 액수를 기부하는지 등등이 화재가 되곤 했고 때문에 귀족들은 사교 철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 행사를 준비했다.
“글쎄. 아직 재판 중인 사안이니 혹시 모르지. 유죄 판결이 난 것도 아니고. 유죄 판결이 난다고 해도 델미르는 관련이 없는 사안이잖아.”
내가 게르틸 공작 부인으로 있을 당시 여름밤의 무도회는 일주일에서 하루로 줄어 간략하게 공작 저에서 치러졌다.
나는 두 번의 행사 내내 불쾌한 눈빛과 모욕의 언사들을 견디며 속은 썩어 들어갈지언정 겉으로는 기품 있는 공작 부인의 행세를 해야만 했다. 전국의 귀족들이 전부 모인 자리. 아직 신혼이었던 첫 번째 행사에서 당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상에 아직도 초야를 보내지 않았다고요?’
‘하긴 나라도 제국의 원수의 몸에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을 것 같네요.’
헬리오네스가 없는 자리에서 나를 향해 쏟아지던 모욕의 시작은 델미르가 천진한 얼굴로 내뱉은 한마디였다.
‘초야도 치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의무를 다하시다니, 게르틸 공작 부인께서는 참으로 성실하시네요.’
얼핏 나를 추켜세우는 말 뒤에 의도를 숨긴 채 델미르는 타인의 입을 빌려 내 처지를 비웃었다.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그래도 이 자리에 나와서 행사를 주관하고 계시잖아요. 귀부인의 귀감이 되는 모습이 아닙니까?’
악의라곤 하나 없는 델미르의 말에 귀부인들은 어느새 또 마음이 바꾸어 나를 동정했다.
‘그러게요. 독수공방하는 신부가 이런 자리에 나오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역시 왕녀라 그런지 강단 있으시네요. 모두가 자신을 원망하는 자리를 이리 철저히 준비하시고.’
동정인지 비꼼인지 모를 말들을 그저 속으로만 받아 삭이며 나는 그 밤 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상처 입지 않은 척 영혼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에는 델미르에게 화도 나지 않았다. 나는 내심 스스로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프리앙크를 멸망시킨 나라의 왕녀가 프리앙크의 전통 행사를 주관하고 있으니 그 정도 취급은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당시의 취급에 대해서 그리 큰 불만은 없다. 아무리 속이 좋은 사람이라도 적국의 왕녀에게 호의를 품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사람 속은 참 간사한 것이다. 한나와 루신다에게는 델미르의 참석이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내심 그녀가 무도회에 참석하길 바라고 있었다.
모두의 화를 산 공녀가 무도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그 밤을 어떻게 견디는지 문득 궁금해진 것이다.
아, 이왕이면 나도 보고 싶은데.
그러나 막상 참석하자니 망설여지는 것 또한 사실. 지금이야 발타르 공작가의 재판 때문에 묻혔지만 내가 누군가? 적국의 왕녀 출신 주제에 황제의 정부가 되는 게 아니냐며 연일 기십지를 달구던 전 부인이 아닌가?
나는 델미르가 곤란에 처한 모습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지만 역시 참석은 무리라고 생각하며 황궁으로부터 온 초대장에 거절의 답신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뭐, 어찌 될지는 다음 날 신문을 보면 알겠지.”
“참석하지 않으시려고요? 엄청 큰 행사잖아요! 부티크에서 황금색 가운도 잔뜩 보냈는데.”
황궁에서는 초대장을 보내며 동시에 황금색 가운도 함께 보냈다. 내 치수를 꼼꼼히 기록한 디자이너가 화려한 황금색의 의상을 잔뜩 가지고 와서는 황제 폐하의 전 부인께 걸맞게 디자인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마도 내가 초라하게 등장하면 또 가십지에 오르내릴 것을 배려한 조치겠지만 나는 그 의상들을 걸칠 마음은 없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이 아깝기는 했지만 원단은 분해해 다시 쓸 수 있으니까.
나는 부티크에 의상을 돌려보내고 황궁에 답신을 보내려고 엘렌을 불렀다. 그런데 답신을 부치기 직전 내 마음을 돌릴 만한 일이 일어났다.
며칠 발걸음을 끊었던 넬리아와 엘리제, 지젤이 숙소를 방문한 것이다.
엘리제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자신의 혼인을 망친 델미르가 곤란해졌으니 꽤나 통쾌할 것이 분명한데도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발타르 공작이 기부금을 사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재산도 많으면서 왜 그런 짓을 한 걸까요?”
먼저 이야기를 꺼낸 넬리아의 물음에 지젤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저희 아버지께서 후원금으로 장학 기금을 만들어 세우려던 교육 기관도 발타르 공작 때문에 없던 일이 되었잖아요. 아버지께서는 그저 형편이 어렵지만 재능 있는 학생들이 싼 이자에 넉넉한 상환 기간으로 학비를 대출받게 하고 학교가 보증을 서 주는 제도를 만들려고 했던 것뿐인데요.”
“그러게요. 발타르 공가가 운영하는 교육 재단은 학비가 엄청 비싼 엘리트 교육 기관이라 굳이 그럴 필요 없었을 텐데요.”
“그렇죠. 학생층이 겹치지도 않는데, 그저 다른 이가 거대한 교육 재단을 소유하는 게 싫었던 거죠. 원래 가진 사람일수록 더 많이 원하잖아요. 돈이 없어서 후원금을 끌어다 쓰진 않았겠죠. 단지 극단 배우와 사생아에게 자신의 돈을 쓰는 게 아까웠던 거죠.”
꽤 냉소적인 말투로 보아 지젤 또한 발타르 공가에 쌓인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동안 열을 올리며 델미르와 발타르 공가의 뒷소문에 대해 이야기하던 게 다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델미르에게는 큰일이네요. 부티크에서도 완성된 의상을 납품하는 걸 거절했다고 하던데요.”
“그렇겠죠. 이렇게 여론이 안 좋은 때에 사교계에 등장했다 하면 이목이 집중되는 델미르에게 누가 자신의 의상을 입히려고 하겠어요.”
지젤과 넬리아가 한마디씩 주고받는 동안 엘리제는 여전히 대화에 끼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루시안 님은 무도회에 참석하시나요?”
“?”
그러다가 처음 물어본 것이 나의 무도회 참석 여부. 나는 당연히 참석하지 않는다고 답하려고 했지만 엘리제의 말이 더 빨랐다.
“오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 상황에서 델미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무척 궁금하거든요.”
어쩜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그날 이야기를 나누고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하여 이리저리 알아보니 발타르 공가에서 덜컨 후작에게 먼저 혼사 이야기를 꺼냈더군요. 후에 작은 땅도 하사받았고요.”
“허억.”
넬리아와 지젤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놀란 얼굴로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엘리제를 응시했다.
“저는 그때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보름 넘게 물밖에 못 마셔서 몸무게가 거의 절반으로 줄었었거든요. 밖에 나가는 것도 무서웠어요.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저를 보며 흠이 있어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여자라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서요.”
엘리제는 비교적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지만 내 속은 점점 기괴한 형태로 구겨지기 시작했다.
“델미르가 괴로워했으면 좋겠어요. 그 붉은 입술이 부르트고 투명한 피부가 푸석해지고 햇살 같은 미소가 얼굴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저 진짜 나쁜 사람이죠?”
허탈하게 그리고 초연하게 웃는 엘리제의 모습이 그대로 내 심장을 파고들어 왔다.
나는 내 인생이 너무 끔찍했다.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 번씩 했다. 어머니의 유언이 없었다면 진작에 스스로 이 모진 삶을 끝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이었다. 가족들이 증오하는 여인은 새로운 가족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였다. 어딜 가나 누굴 만나나 나는 늘 불행했다. 행복하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감히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흉으로 뒤덮인 육신만큼이나 망가진 영혼이 부끄러워졌다.
사랑받지 못해 썩어 버린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악취를 어떻게든 감춰 보려고 우아한 왕녀, 품위 있는 부인을 연기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고통에는 큰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로덴시아의 침공으로 멸망한 나라들이 신문에 실렸을 때에도 나를 보며 악마의 딸이라는 노파의 저주를 들었을 때도 그들의 고통을 헤아려 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 전쟁은 싫은데. 더 이상 죽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장미 덩굴 아래에서 델미르의 치졸한 행동을 듣게 되었을 때도 엘리제라는 여인이 참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괴로울지 상상해 보며 마음 아파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나는 적국의 왕녀. 나를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처지.
남편마저 외면하는 나 같은 사람이 나서서 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의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무섭고 또 두려워서 그저 그녀의 마음이 속히 회복되기를 기도했을 뿐이었다. 내가 진실로 엘리제의 아픈 마음에 신경을 썼다면 하다못해 먼저 말이라도 걸어 봤겠지.
그러나 나는 내 고통에 매몰되어 하루하루를 버텨 내는 것조차 버거웠다. 변명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때문에 나에겐 주변을 돌아볼 시야가, 아니 여력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마음이 참 좁은 사람이었다.
이런 내가 싫다. 정말.
“아니에요! 엘리제 양은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저도 사실 기사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델미르가 무도회에 나올지, 나온다면 어떤 꼴로 나올지 궁금해했다고요!”
좀처럼 큰소리를 내지 않는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엘리제가 잠시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동지가 있었네요. 그럼 우리 같이 무도회에 가요. 가서 델미르가 어떤지 같이 확인해요. 잔뜩 풀이 죽은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뒤에서 실컷 비웃어 주자고요!”
엘리제는 참 착한 사람이다. 이미 델미르가 자신에게 한 짓을 알고 있으면서 고작 뒤에서 비웃는 정도로 넘어가려고 하다니.
그러면서 나쁜 사람이라고? 네가 그러면 나는 뭐가 돼. 네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나는 순간 엘리제가 뭐라고 하든 나 혼자라도 델미르가 한 짓을 폭로하려고 생각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찌 되었든 그 일은 엘리제의 약점이요 상처. 타인이 함부로 들먹일 일은 아니다.
나는 엘리제가 델미르가 현재 당하는 고난으로 만족하고 침묵한다면 나도 침묵하고, 역시 그냥 넘어갈 수 없어 폭로하기로 한다면 내 명예를 걸고 그녀의 주장을 확인해 주리라 다짐했다.
“그래요! 저도 참석할게요! 델미르가 어떤지 같이 확인해 봐요!”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엘리제가 연한 미소를 지었고 눈치 빠른 넬리아와 지젤은 얼른 화제를 새로 맞춘 황금색 의상으로 전환했다.
“저는 이번에 그리스 여신처럼 꾸미려고요. 머리 장식도 금색으로 다 맞췄어요!”
“저도 좀 우아하게 가려고요. 요즘 엠파이어 드레스가 유행이잖아요? 여름이니까 가볍게 입을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아요.”
분위기를 띄워 보려는 배려가 잘 먹혔다. 엘리제는 어느새 얼굴에서 복잡한 상념은 지워 내고 맞장구를 쳤다.
“와! 저도 페티코트를 뺀 가벼운 드레스로 골랐는데 신기하네요! 저는 고대 중동 지방의 튜닉에서 영감을 받은 의상이랍니다.”
한 사람씩 자신의 의상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 여인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아, 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니 부티크에서 가져온 의상 중에 드레이프로 장식된 깃털 같은 느낌의 가벼운 로브가 한 벌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 그대로 반납하려고 했는데.
“어깨부터 주름이 지고 허리 부근에 드레이프 장식이 있는 시폰 드레스가 있어요. 저도 첫날은 비슷하게 입을 수 있을 거 같네요.”
“우와! 저희 넷이 동시에 등장하면 신화에서 추수의 여신들이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이겠어요! 엄청 기대돼요!”
지젤의 설레발에 나는 약간의 부담감과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그와 동시에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 심장 박동을 느꼈다.
옷을 맞춰 입다니. 사교 행사에서 델미르와 무리들이 의상을 맞춰 입고 즐겁게 떠드는 모습을 항상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내가 그걸 한다고? 28살이나 먹어서 주책 같기도 하지만 설레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우리 이왕 하는 김에 헤어랑 액세서리도 맞춰 봐요! 흐흐 다들 깜짝 놀라겠죠?”
잔뜩 기대에 들떠 어깨까지 들썩이며 아이처럼 웃는 지젤을 나와 엘리제, 넬리아는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발타르 공작에게 온 관심이 쏠려 있는 틈을 타 나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재판이 시시각각 진행되고 또 다른 비리가 줄줄이 밝혀지며 수도에는 발타르 공작을 비판하는 대자보까지 나붙고 있었지만 나는 낮에는 세 영애들과 무도회에 대해 떠들고 밤에는 황궁을 방문해 붉은 정원에서 헬리오네스와 함께 한가로운 때를 누렸다.
찰나 같은 사흘이 그렇게 지나고 드디어 여름밤의 무도회의 첫날이 되었다.
나는 곱슬거리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성글게 땋아 앞으로 가지런히 넘겼고 신체를 타고 흐르는 주름과 드레이퍼리 장식의 시폰 드레스를 걸쳤다.
사치스러운 보석은 그다지 걸치고 싶지 않아 게르틸 공작 부인 시절에 사용했던 금으로 된 얇은 목걸이와 팔찌를 세 개씩 겹쳐 착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오늘 밤 무도회에 참석하는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드리겠다며 신이 나서 솜씨를 총동원한 한나와 루신다 덕분에 얼굴에는 오랜만에 잔잔한 홍조까지 돌고 있었다.
준비가 끝났다. 황궁으로 출발해 볼까?
해는 이미 벌써 저물어 평소라면 지상은 어둠에 잠겨 있어야 하는 시간.
하지만 여름밤의 무도회 첫날답게 황궁 앞 광장은 가스등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고 낮보다 더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인파 사이에는 여름 꽃들로 장식한 호사스러운 마차들이 줄을 지어 입장을 대기하고 있었는데 조금 소소한 마차에 탑승한 나 또한 그 행렬에 껴서 차례를 기다렸다.
황실과 귀족들의 기부로 황궁 밖 광장에서 베풀어지는 연회는 풍성하기 그지없었다.
차고 넘치는 먹을거리와 마실 거리,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과 가볍게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까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즐거운 연회를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한 모습에 나의 입가에는 어느새 환한 미소가 걸렸다.
아, 기분은 전염이 되는 것이 확실하다. 나까지 발을 까딱이며 박자를 맞추게 되네.
그러나 곧 광장 한쪽에서 소란이 일며 대기를 감싸고 돌던 열기가 서서히 식기 시작했다.
“발타르 공작은 진실을 밝혀라!”
“사학 재단의 비리를 총지휘한 발타르 공작은 직접 재판에 나와 법의 심판을 받아라!”
“사생아에게 불법적으로 증여한 재산을 전부 사회에 환원라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광장 한쪽에서 중앙으로 들어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라 국제적인 법적 공방으로 이어진 사건이다 보니 요즘 들어 많이 생겨나고 있는 시민 단체에서 시위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로덴시아에서 왕궁 앞에서 이런 일을 벌였다가는 아바마마께 산 채로 재가 되었겠지.
물론 그렇게 시대착오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바마마의 사후 로덴시아가 바로 멸망해 버린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비리 없는 귀족이 있나?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발타르 공작의 사태를 보며 잃을 것이 많은 대부분의 귀족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문득 올해의 여름밤의 행사 기부액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기사를 본 것을 떠올렸다.
아, 다들 이 사태를 의식하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