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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게임 속 악역의 시한부 딸입니다 5권
 
지은이 : 김촉촉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 김촉촉, 2025
※ ISBN : 979-11-7408-074-5
※ 가격 : 3,000원
※ 발행일 : 2025년 05월 29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백가장의 비밀
 
 
아버지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더 컸던 것일까.
무복을 비롯한 옷 몇 벌을 가져다 달라고 전한 지 채 열흘이 지나지 않아 본가에서 새 옷 한 보따리가 도착했다.
제발 살려 달라는 숙부의 서신도 함께였는데, 흠. 겨울이 지나 오리털의 판매 기간도 아닌데 왜 이러시지?
한창 바쁠 때는 다 지났겠다 싶어서 안심하고 있던 나는 어째 안절부절못하는 숙부의 시종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탄신이요?”
“그래. 올해는 연회 없이 지낼 듯하나, 그래도 여러 가문에서 손님이 오는 건 막을 수 없으니 말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초대도 안 했는데 놀러 온다고?
문득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할아버지가 이곳 온천 장원에서도 타 가문에 보낼 선물 목록을 살피며 머리를 싸매시던 것을 떠올리곤 무릎을 탁 쳤다.
놀러 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축하와 선물을 전하러 오는 것이라면 숙부가 왜 발을 동동거리는지 알 만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남궁세가는 안휘에서 제일가는 명문가인데 아무리 연회를 안 연대도 축하 인사를 안 해 줄 리는 없겠네요.”
“음, 그렇지. 아마 지금쯤이면 중원 곳곳에서 사람을 보내오고 있을 게다.”
안휘성의 인사들만 생각해도 벅찬 마당에 중원 곳곳에서 사람이 온다고?
와, 이건 정말…… 숙부가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네.
중원의 관습상 축하 인사를 받아 놓고 아무런 답례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마 상대가 보내온 선물, 그리고 상대의 지휘에 맞게 답례품을 정해 돌려보낼 준비를 해 둬야 할 텐데, 판촉물이 발달한 세계도 아니고 일일이 해당 지역과 가문의 금기를 피해 가며 선물을 고르는 것은 상당한 중노동일 게 뻔했다.
심지어 오리털 외투를 판매한 이후로 우리 남궁세가에 줄을 대려는 이들이 폭증했으니…….
“원래는 이 일을 누가 처리했어요? 작년 이맘때쯤엔 숙부님께서 외유를 하셨던 것 같은데.”
심지어 작년엔 연회까지 크게 여느라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을 것이다.
총관님 혼자 다 처리할 수 있을 만한 규모는 절대 아닐 터.
의문을 갖고 바라보기도 잠시, 아버지가 아주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작년에는…… 형님과 내가 둘이 나눠서 일을 맡았지. 진 총관도 많이 도와주었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때에 맞추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아, 맞다. 큰아버지.
그땐 아직 뇌옥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가주의 장남으로서 집안의 대소사는 대부분 그의 몫이었겠네.
물론 혼자 처리하기엔 워낙 큰살림이라 아버지나 진 총관님도 함께 나서서 일을 처리한 것일 테고 말이야.
아무리 연회를 치르지 않는다고 해도 본래 셋, 아니 아무리 적어도 둘이 나눠서 하던 일이다.
그걸 혼자서 전부 처리하려니 병이 나지 않을 수가 있나. 심지어 숙부는 그런 일을 맡는 게 올해가 처음이고 말이다.
대뜸 살려 달라며 고통을 호소한대도 이상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숙부님의 애원에도 귀가를 서두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괜히 눈치를 보던 백무현에게 부모님을 추모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자며, 백가장이 있던 구화산 자락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사흘간 쉬어 갈 계획을 언급할 정도였다.
뭐, 아버지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제 그만 큰아버지에게 내린 형벌을 거두어 달라는 의미겠지.’
아버지는 본래도 후계 다툼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
오히려 아예 대놓고 가주 자리는 자신이 아닌 조카들에게 물려주라고 말씀하시는 쪽.
그런 아버지에게 차기 가주의 아버지인 백부가 뇌옥에 갇혀 있는 상황은 자못 불편할 것이다.
아직 어린 조카들에게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도 들 테고 말이다.
물론 큰아버지가 망혼미백단 사건에 연루된 것은 아버지에게도 큰 상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내게 직접적으로 독을 먹인 인물은 아니지 않나.
엄밀히 따지자면 그는 가문의 체면을 위해 진실을 은폐하려던 조금 매정하고 위선적인 인간에 불과하니.
개인적인 배신감이야 들지 몰라도 평생 뇌옥에서 썩게 만들 정도로 원한이 깊은 것은 아닐 테다.
게다가…….
‘형제 싸움이 다 그런 거지 뭐. 멱살잡이에 주먹다짐을 하다가도 밥 한 끼 나눠 먹으면 자연스레 화해가 되는 게 혈육이잖아.’
형제는커녕 친구도 되기 어려운지 늘 투닥거렸던 백무현과 진이윤의 모습이 묘하게 아버지의 향수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기어코 원로회에서 백부의 사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본가로 갈 짐을 꾸렸다.
그렇게 거의 반년. 마침내 본가로 돌아갈 수 있게 된 무인들 사이에서 기쁨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 *
 
구화산의 밑자락, 아름다운 차밭을 배경으로 한 어느 작은 마을.
우리는 잿더미 위에서 겨우 그 흔적을 드러내고 있는 백가장 터에 자리를 잡고 간단히 천막을 쳤다.
복구 작업을 진행한 지도 벌써 수개월이지만, 워낙 기둥 하나까지 알뜰하게 불타오른지라 사당의 위치를 찾고 위패들을 다시 세우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달까.
덕분에 백무현이 나고 자란 장소를 느긋하게 살펴보려던 나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오히려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해 버린 백가장의 모습을 보며 백무현이 상처받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기 바빠진 것은 덤이었다.
“그, 차라리 근처 민가에 머무르는 게 더 나았으려나? 천막생활 불편하지 않아?”
“별로. 생각보다 꽤 널찍하고, 스승님께서 잘 돌봐 주셔서 문제없어.”
“아무리 그래도…… 마음이 쓰이거나 하지는 않아? 힘든 일이 있던 장소잖아.”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를 견디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아.”
나의 걱정 어린 물음을 백무현은 아주 단호한 한마디로 끊어 냈다.
처음에는 단순히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 싫어 그리 말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어진 백무현의 말을 들은 나는 기분이 조금 오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백무현은 주변 마을에 ‘싹수 노란 망나니’로 알려져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착각계 망나니물 웹소설도 아니고 대체 어쩌다 그런 결과물이 나왔는가 하니…….
“하인의 손목을 잘랐다가, 그를 죽게 만들었다고?”
“응.”
“왜?”
“그가 그리해 달라고 했으니까.”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제 손목을 잘라 달라고 했다는 건 뭐고, 그렇다고 해서 진짜 자른 건 또 뭔데.
나는 황망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자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겁할 만한, 그러나 막상 뜯어보면 나름대로 일리는 있는 사연이 아주 담백한 어조로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이미 한 번 도박 빚 때문에 딸을 팔아 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도둑질까지 한 전적이 있으면서, 또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했단 말이지?”
“응.”
“심지어 제 입으로 ‘두 번 다시는 도박에 손대지 않을 겁니다. 또 도박하다 사고를 친다면, 차라리 제 손목을 잘라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고 말이야.”
“맞아.”
뭐야, 자연사잖아.
불행한 이야기지만 이 시대에 노름을 하다가 자식을 팔아 버리는 인간은 많다.
하지만 겁대가리 없이 주인 집안의 보물에 손을 대는 인간은 많지 않다.
그것도 무가의 비급을 훔치려 드는 멍청이는 감히 듣도 보도 못했고 말이다.
하지만 백무현이 본의 아니게 죽게 만들었다던 그 나이 든 시종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백가장의 비급을 훔치려 들었다.
심지어 처음 걸렸을 때 죄를 용서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노름빚에 팔려 간 그의 큰딸을 진현 대협이 사비로 구제해 주었음에도 같은 죄를 반복해 저질렀다.
이 무정한 강호의 일반적인 상식대로라면 그는 그 자리에서 목이 베인대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죄인이었다.
염치를 모르는 뻔뻔한 작자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자의 큰딸이 네 전담 시비였다고 했지?”
“응. 영매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날 돌봐 주었어.”
유모……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이 많이 들었겠네. 그런 이가 한 번으로도 모자라 두 번이나 기루로 팔려 가다니.
심지어 찾는 게 늦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했다지.
“소중한 사람이 그자 때문에 그리 끔찍하게 죽었으니, 화가 날 만도 하네. 복수를 하고 싶었대도 충분히 이해해.”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적 제제가 온당하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천살성치고는 상당히 온화한 처사 아닌가? 애초에 그 하인을 죽이려는 목적이 있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가 과다 출혈로 죽게 된 건 뭐,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곳 중원의 논리대로라면 충분히 정상참작을 할 만했다.
마을 사람들이 백무현을 꺼리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은 이어진 그의 한마디로 인해 곧장 깨지고 말았다.
평이한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딱히 복수를 하려던 건 아니야.”
“으응? 복수가 아니라고? 그럼 왜 그의 손목을 잘랐는데?”
“입 밖으로 낸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배웠으니까. 난 그저 그가 제 입으로 한 약속을 지키도록 도우려 했을 뿐이야.”
단순히 약속을 지키고자 했을 뿐이라고? 다른 것도 아니고 손목을 잘라 달라는 약속을?
백무현이 평범한 이들과 사고방식을 약간 달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차이가 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왜 그의 부모님이 그토록 이 어린 아이를 경계하고, 마을 사람들도 내심 꺼렸다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어쨌거나 ‘배운 대로’ 행동하려 했을 뿐 아닌가.
그가 천살성에 대한 소문처럼 피에 굶주리고 살육을 선호하는 성향을 가졌다면 문제가 심각하겠지만, 딱히 그래 보이진 않았다.
타인의 감정이나 고통에 둔한 탓에 오해를 사기 쉬웠지만, 올바른 길을 배운다면 분명 차츰 나아지리라.
글 말인즉, 컴퓨터 코딩을 하듯 그에게 사회 규칙들을 꾸준히 학습시키면 문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뜻 아닌가.
위기는 곧 기회가 될 수도 있는 법. 나는 뚱한 얼굴을 하고 있던 백무현에게 말했다.
“아무리 본인이 정한 약속이고 부탁이라고 해도,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하는 일은 숙고해서 결정해야 해.”
“어째서?”
“부상이나 죽음은 그 자체로 엄청난 손실이고 불이익이잖아. 또, 한번 선택하면 돌이킬 수 없는 영역의 일이기도 하고.”
백무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음, 역시 측은지심 같은 자연스러운 마음은 설명하는 게 좀 어렵긴 하네. 차라리 예시를 들어 볼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너와 목숨을 걸고 내기를 했다가 졌어. 약속대로라면 내 목을 내놓아야 해. 그런 상황이라면 넌 어떻게 할래? 약속대로 날 죽일래?”
“뭐?”
백무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뒤이어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는 것이 충격을 넘어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아직 어린 그를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