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나 에스테반 1권
아드리나 에스테반 1권
아드리나 에스테반
1권
아드리나 에스테반 1권
차 례
1. 때려치우다 -1
2. 때려치우다 -2
3. 운명이라 적혀진 -1
4. 운명이라 적혀진 -2
5. 투쟁하라 -1
6. 투쟁하라 -2
7. 불편한 동행
아드리나 에스테반 1권
1. 때려치우다 -1
“우리 헤어지는 게 좋겠습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약혼자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눈동자, 차마 마주치지 못하는 시선, 자꾸만 숙여지는 고개.
그런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행동들을 두고 그가 하는 말을 어찌 그대로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만약 그녀가 그를 겁박할 수 있는 무서운 존재였다면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는 전형적인 귀족 레이디였다. 교과서에 나올법한 우아하고 나긋나긋한. 그래서 모든 신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많은 레이디의 우상이 된 여자.
“…그 말을 지금 저보고 믿으라는 말씀이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지금도 자신을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의 표정에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나르디안 테르제. 그녀가 그를 사랑하기로 한 시작이 그러했다. 남들은 귀족의 덕목에 맞지 않는다고 숙덕거리겠지만 무엇 하나 숨기지 못하는 그 순진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르디안, 무슨 일 있어요?”
나르디안이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 없고 그저 부정했다. 아드리나는 점차 답답해졌다.
애초에 차이가 꽤 나는 결혼이었다.
에스테반. 그 이름이 어떤 이름이던가.
셀레스틴은 제국에게도 쉬이 굽히지 않는 자존심과 힘을 가진 나라였다. 보통의 왕족들이 사용하는 호칭 대신 제국과 비견하여 왕후, 왕녀, 왕태자라 일컫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그들은 제국보다 자신들이 못할 것 없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마도 왕국 셀레스틴의 개국공신이자 대대로 왕의 최측근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 후작가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언제나 가장 최전방에 서길 주저하지 않는 왕국의 검.
가문의 모든 역사를 왕의 검으로써 살아온 이름난 무가였으며, 제국에서도 탐내는 마도 기사를 배출하는 보장된 재능의 피를 가진 가문. 그런 가문의 장녀가 아드리나 에스테반이었다.
“우리는 애초에 격이 맞지 않았잖아요.”
우스운 소리다. 그런 걸 따졌다면 그들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이미 가문이 보장된 데다가 아드리나는 타고난 마나량도 많고 검술에 재능도 있었다. 그녀와 결혼한다면 그 가문의 부흥은 보장되어있는 셈이다.
게다가 정치적인 능력은 어떠한가. 사교계에 등장하자마자 내로라하는 귀부인들을 사로잡아 그 정점에 오른 여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들의 영역은 감히 넘어서지 않았다. 아름답기까지 했으니 가문이든 사내들이든 당연히 이 레이디를 탐냄이 응당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아드리나가 그저 그런 흔한 귀족가 중 하나인 테르제 백작의 차남을 택했을 때 귀족들의 사이에서 일었던 파란이 예상이 가는가. 무언가 커다란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장남도 아닌 차남이었다. 그 장남이 백작가를 물려받으면 나르디안이 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자작이었다.
“우리는 이미 첫 만남부터 서로의 신분을 알았어요. 그게 이제 와서 부담스러워졌다고요?”
조곤조곤하게 그에게 따져 드는 아드리나에 나르디안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로서도 억지임을 알았다.
둘은 분명 차이가 났다. 그럼에도 아드리나는 나르디안을 택했다. 그는 권력이 강하진 않지만, 귀족 사회에서 드물게도 사랑으로 결혼한 부모의 사이에 태어났다. 그로 인해 충만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더불어 그녀가 여인이라고 해서 남성이라는 억지에 가까운 권리로 짓누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남들은 유약하다 했으나 실은 많은 것들에 다정한 남자였고 거짓말에는 천부적으로 재능이 없어 늘 솔직했다. 그래서 아드리나는 나르디안을 사랑했다.
지고지순하고 순종적인 순애보. 뭇 사내들은 그를 비웃었으나 많은 레이디들은 아닌 척 그를 흠모한다. 비록 가진 바가 크진 않아도 그 해맑은 웃음은 뒤돌아서면 적이 되는 귀족 사회에서 본능적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지녔다.
“디나… 제발.”
아드리나가 강권하게 나가자 나르디안이 힘없이 그녀를 불렀다. 평소 같으면 그런 그에게 아드리나는 기꺼이 져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제가 이별이라면 다르다.
아드리나는 확신했다. 그녀의 생에 있어 나르디안 같은 남자를 찾는 것은 힘들 것이다.
“내가 납득할 만한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해요.”
그에게 늘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나르디안 또한 아드리나를 사랑했다. 헤어짐을 고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본인의 얼굴이 더 괴로워 보이는 주제에 나르디안은 눈을 질끈 감고 아드리나에게 말했다. 정말 한결같이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못된 말을 내뱉는 이 순간까지도 아드리나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알아요, 디안? 당신은 정말 거짓말에 소질이 없어요.”
그녀의 말에 움찔 그의 몸이 떨렸다. 어쩔 줄 모르는 젖은 눈망울이 아드리나를 향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꾹 다물어버린다.
아드리나가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그 부드러운 손을 얹어 들어 올린 후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사실은 그가 어느 순간부터 늘 자신들의 관계에서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제 그만 말해 봐요. 무엇이 당신을 자꾸 힘들게 하는지.”
아드리나가 조곤조곤 그를 다정하게 달래었다. 워낙 아드리나에게 숨길 줄을 모르는 나르디안이라 찔려서라도 스스로 말해줄 줄 알고 기다렸다. 하나 들려오는 게 이별의 말이라니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에 캐내어 물었을 것이다. 그녀는 제 연인을 이렇게까지 몰아간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녀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의향이 충만했다. 그럴 힘도 충분했으므로.
“디나…….”
애달픈 나르디안의 목소리에 아드리나는 그 알 수 없는 대상에게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나르디안을 향한 시선은 여전히 다정했다. 그녀는 그 순간에도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헤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무엇도 그들이 헤어질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한은.
“디나, 당신을 위한 겁니다……. 그러니까-”
나르디안의 시야가 흐려졌다. 아,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그녀를 놓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르디안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녀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를 일방통행으로 만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늘 함께였다.
그래서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나르디안의 생에서는 숨을 쉬는 것인 양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나를 위한다고요?”
순간 아드리나는 진심으로 그리고 처음으로 나르디안에게 화를 낼 뻔했다.
제게서 기어코 한발 물러서려는 그를 보던 아드리나가 갑작스레 그의 멱살을 잡고 제게로 확 끌어당겼다. 그런 얼굴을 하는 주제에 나와 헤어지자고. 점점 더 화가 났다.
무엇이든 해주겠다는데,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는데. 뭐가 그리 두려워 자꾸 뒤로 물러서기만 하나.
“말해 나르디안 테르제.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라고, 나를 위해서라는 비겁한 변명 따위로 물러서지 말고 당신이 뭘 숨기는지 말해. 똑바로 봐.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아?”
갑작스러운 힘에 놀란 나르디안의 눈이 커졌다. 고귀한 레이디. 아드리나 에스테반. 단언컨대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검에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교계에 데뷔한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나르디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그는 반드시 그렇다고 대답해야 했다. 그는 알았다. 아드리나는 그 답이 아니고서는 그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저는-”
그러나 그것은 나르디안의 생에 있어 가장 큰 거짓이어서, 그는 차마 그것을 두 번이나 입 밖으로 꺼내놓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진실로 그녀와 이별할 것이라는 것을.
나르디안은 앞으로 다가올 운명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녀에게 이별을 고했으나 실로 자신이 단 하나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결국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진실을 토해냈다. 그동안 담아놓은 무거운 것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디나, 내 사랑. 그대는 결국 펠릭스 대공을 사랑하게 될 겁니다. 저는 그걸 견딜 자신이 없어요.”
“…하?”
순간 그녀는 누군가 그녀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무슨 듣도 보도 못한 헛소리란 말인가.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순식간에 화염이 타올랐다. 아드리나는 지금껏 자신이 마음을 졸여왔던 게 모두 이것 때문이었다는 것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게 무슨……!!!”
“못 믿겠지만, 전 압니다. 그와 당신은 운명이고 결국 난 버려질 거라는 걸.”
아드득- 순간 살벌한 이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르디안은 그 소리에 움찔했다. 그러나 그 살벌한 소리에도 나르디안은 마치 제 말이 절대 어긋나지 않는 예언이라도 되는 것인 양 확고한 눈을 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디나 그대가 납득하도록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중에는…….”
나르디안은 아르디나를 보며 최대한 그녀를 납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도 처음에는 믿기 싫었던 진실을.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제외한다면 모든 것은 ‘책’의 이야기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고 그녀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의 생에 있어 아드리나만큼 가치 있는 존재를 찾기 힘들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필 이 세상이 ‘책’의 내용임을 알고 난 뒤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때 이미 그는 아드리나를 사랑했다. 나르디안이 슬픔에 젖어 말을 이었다.
“나도 당신을 놓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는 무수한 방향으로 발버둥 쳤다. 속이 썩어 문드러져도 그녀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러면 무얼 한단 말인가. 그가 발버둥 치는 것들과는 하등 관계없이 이야기는 ‘책’의 내용대로 흘러갔다.
아드리나 에스테반이 사교계의 꽃으로서 이름을 날리고 펠릭스 대공이 셀레스틴의 오랜 숙적인 왕국 아델리아에게서 전승을 거두는 것까지.
“그러나 내 발버둥은 소용이 없었죠.”
그는 비로소 인정했다. 사실 나르디안은 그녀가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녀에 대해 알았다. 그녀는 자작 부인 따위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아드리나는 자작 부인 따위에 머무르기에는 지나치게 대단하다.
그리고 펠릭스 대공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막막한 셀레스틴 왕국에서 아드리나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소설 ‘펠릭스 대공비’는 거기서 시작됐다.
“나는 대체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아드리나로서는 도저히 나르디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가 슬프게 웃었다.
나르디안은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났을 때 충분히 그가 가진 것들에 만족했다. 아주 드높은 권세를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적당히 명망 있고 부유했다. 그래서 도리어 다른 귀족들과 큰 충돌이 일어날 일도 없었다.
부모님은 드물게도 귀족 사회에서 정략결혼이 아닌 사랑으로 이어졌다. 귀족 부부간에 흔히 있는 외도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사랑을 기반으로 한 탄탄한 가정은 아이들에게도 행복했다.
그 아들인 나르디안 테르제가 타인에 비하여 얼마나 운이 좋았던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전생의 삶에서도 누려보지 못한 평온을 나르디안은 이 세계에서 누렸다.
“내가 겪은 것들을 그대가 모두 이해하기란 힘들 거에요.”
나르디안도 확신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기 때문에 잊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아드리나 에스테반을 처음 만났을 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임을 알면서도 그저 워낙 유명한 가문이라 그러겠거니 하고 넘어가 버렸던 것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나르디안은 사실 이 삶에 있어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는 책에 나오지 못한 존재이고 제 연인인 아드리나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것을 자각했을 때, 그 후 내내 그는 늘 상상해왔다. 아드리나가 자신을 버리는 순간을.
“다만 확신하는 건… 당신의 운명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아드리나.”
사랑은 점차로 깊어졌고 그래서 아드리나에게 이별의 말을 듣는 순간 나르디안은 자신이 견딜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저와 이별해주세요. 디나, 나는… 난… 당신이 날, 버리는 걸… 견딜 자신이 없습니다-. 이건 정해진 운명이에요… 전 이걸 바꾸려고, 매번, 노력했지만… 내가 읽은 운명은 바뀌질 않았습니다.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대는 결국 나를 떠나게 될 거에요.”
이곳이 책 속의 세상이라도 좋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평온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흘러가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들의 끝을 그리고 있었다. 나르디안은 처참함에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제 두 손으로 가렸다.
그 슬픔에 잠겨 나르디안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민한 아드리나는 그 속에서도 나르디안의 말을 잡아냈다.
“하…하하하…!! 하…하… 좋아요, 나르디안. 그래. 당신이 읽은 운명 속에 내가 펠릭스 대공과 무얼 하던가요?”
분노와 황당함 그리고 그 속에서도 눈물을 흘리는 제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안타까움. 그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 곳에 뭉쳐 그녀를 헛웃음 짓게 만들었다.
“나는 당신을 버리고 펠릭스 대공비가 되던가요?”
아드득- 다시 한번 이가는 소리가 났다. 아드리나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방금까지 타오르던 불꽃을 그대로 얼려버린 듯 뜨거운데 또 시렸다.
그녀가 스스로의 얼굴을 가린 나르디안의 두 손을 강제로 잡아 내렸다. 처음으로 아드리나의 손길이 그에게 강압적으로 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럴 수 있었다. 다만 지성인으로서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를 겁먹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펠릭스 대공비라는 말에 나르디안의 몸이 움찔거렸다. 정답인 모양이다. 그가 무엇을 읽었는지 정확히 말해주지 않아 아드리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믿고 있고 또한 그것에 꽤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아드리나는 생각했다. 만약에 그것이 진실로 예기된 운명이라고 할지라도 그녀가 그것을 깨부숴주겠노라고.
아드리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무엇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감히 누가 제가 나아가기로 정한 길을 방해하는가?
“좋아요, 그럼 내가 후작이 되면 그 운명은 잘못된 것이 되겠군요.”
아드리나는 마침내, 맞지도 않던 순종적인 레이디 흉내를 때려치우기로 했다.
“…지금, 뭐라고……?”
“후작이 되겠다고 했어요, 나르디안.”
나르디안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후작이 되는 미래는 그가 봤던 ‘책’의 이야기에 없었다. 애초에 소설의 제목부터가 ‘펠릭스 대공비’가 아니던가.
물론 소설에서 자신의 존재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에스테반 후작가에 있어 테르제 백작가, 특히나 그 차남밖에 안 되는 자신과의 약혼은 실상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레이디에게 있어서 파혼은 분명 결혼에 있어 커다란 걸림돌임이 분명하지만 그 상대가 아드리나 에스테반이라면 유명무실하다.
그래서 그는 지금껏 이미 서로가 약혼자의 관계로 묶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없었다.
“내가 후작이 되면 디안이 그런 걸로 나와 이별할 이유는 사라지죠. 아닌가요?”
셀레스틴 왕국은 분명 마력에 있어서는 남녀의 커다란 차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여성들에게 엄격한 나라였다. 여인들에게는 당연하게 귀부인으로서의 역할이 강요됐다. 지금껏 이 오랜 역사에 여인이 왕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나마 귀족들 중에 여인이 가문을 물려받은 경우가 있긴 했다. 그래봤자 표면적으로는 데릴사위가 작위를 물려받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펠릭스 대공이 아드리나의 날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반푼이라고 불리는 백치 왕녀를 제외하고는 이 나라에 차기 퍼스트레이디가 될 여성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공비라는 지위는 그녀가 원하는 바를 펼치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예컨대, 어쩌면 그녀의 말은 허황된 것과도 같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나르디안은 ‘책’을 통해 그녀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자신을 택한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드리나는 대단했다.
“그렇지만, 디나… 이미 에스테반의 후계자는…….”
그는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힘들다 부정하지 않았다. 아드리나는 그것이 만족스러웠다. 나르디안은 그녀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보지 ‘대단한 여자’라고 보지 않았다.
다만 후계자를 정하는 일은 가주의 권한이다. 가문의 원로회조차 가주의 권위를 존중하여 가주가 이미 한번 결정 내린 사안은 바꾸지 않는다. 에스테반에는 이미 후계자가 있었다. 그녀의 남동생인 앨버트 에스테반. 나르디안의 말을 담담히 아드리나가 이었다.
“앨버트가 있죠.”
앨버트는 꽤 견고한 위치를 가진 후계자였다. 무가인 에스테반의 명성에 맞게 그는 검을 잘 다뤘다. 동시에 마검사였다. 검술 자체로는 소드마스터에 못 미쳤으나 마검사는 마도 왕국 셀레스틴에서도 각광받는 존재다. 그쯤은 문제가 되지 못했다.
이미 능력이 증명된 후계자는 그 외모와 키도 훤칠하여 곧 명문가와의 약혼을 앞두고 있었다. 앨버트는 알로하 후작가의 장녀인 아나이스와 약혼을 할 것이고 결혼 후에는 막대한 지참금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디안, 당신은 날 알지 않던가요.”
아드리나는 자신 있게 웃었다. 사실 아드리나 에스테반의 능력 앞에서 그런 것들은 하등 쓸모없으니까. 아드리나는 이미 후계자가 되기를 포기하면서 대신 제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켰다. 그 사랑하는 것에는 분명히 제 약혼자인 나르디안 테르제 또한 포함되어있었다.
나르디안은 원래대로라면 그는 결혼 후 에스테반이 보유한 많은 작위 중 아스터 백작위를 양도받게 될 예정이었다. 아스터 영지는 약간의 애로사항을 제외한다면 그 농토 자체는 기본적으로 풍족한 편이었다. 두 사람이 적당히 지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자작위가 전부 아니냐며 빈정거리던 치들 또한 더 이상 그에게 함부로 굴 수 없을 것이었다. 물론 애초에 아드리나 에스테반의 연인인 이상 나르디안에게 함부로 굴 미친 자들은 없었으나 아주 가끔은, 인간이 미칠 수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당신이 안도할 만한가요?”
아드리나는 그 정도면 꽤 행복한 인생이 되리라 여겼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제 가족들도 사랑했으므로 가문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제가 원하는 사람과 부족하지 않은 여생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녀가 한편으로 제 능력을 펼치는 욕심을 접어둔 것은 다른 곳에서 그 욕심을 충족시킬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무언가를 포기하는 삶은 아드리나의 미래설계에 없었다는 말이다. 적어도 모든 것은 그녀가 원하는 한도 내에서 흘러가야만 했다.
나르디안을 포기해야 한다면 모든 전제는 뒤틀린다.
“디나, 지금… 제가 하는 말을, 믿는 건가요?”
나르디안은 여러 가지 충격에 무엇부터 그녀에게 물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여전히 신성제국이 건재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예지’의 힘을 가진 자가 나오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니까 예언이라는 것은 이 시대에 있어 옛날이야기가 되었다는 소리다.
특히 마도 왕국은 철저한 마법에 의해 지배되는 왕국이었다. 즉 신성제국이 제국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를 갖추고는 있으나 그들의 교리 같은 것은 딱히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나르디안이 살던 전생으로 따지자면 마법은 과학에 가까운 것이었다. 정교한 주문과 마법진, 수식, 영창 등에 의해 발휘되는.